00072 우연과 필연 사이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선준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러니 사실 나는 무슨 말이든 한 것과 다름없다. 내가 많이 울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선준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거다. 사실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사람들은 말보다 표정으로, 행동으로, 태도로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언어는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비언어적인 표현들보다 한참 뒤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이선준이 정말로 걱정했던 일,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선준도 모를거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알았고, 내 눈물의 의미라는 것은 얼마든지 유추해낼 수 있을거다. 이선준은 똑똑하니까 그 정도는 얼마든지 억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억측은 진실에 닿아있을거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주를 한 병씩 비웠다. 추운 초봄의 밤에 어울리는 오뎅탕과 함께다.
“너가 나였으면 어땠을 것 같아?”
나는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낸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는 않을거다. 나는 이선준에게 지금 오빠라느니, 형이라느니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제멋대로다.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부른다. 이선준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말한다.
“겪지 않은 채 말하는 건 오만한거지.”
“그 오만을 써내는 게 소설가들이잖아.”
나는 또 말한다.
“겪은 것을 말하는 것이 오만에서 벗어나 있는 것도 아니야. 제멋대로 현실을 판단한다는 측면에서는 다를 게 없어.”
나는 약간 혀가 풀린 채 말한다. 이선준은 고개를 끄덕인다. 소설가를 꿈꾼다는 건 세상에서 제일 오만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말을 돌려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말해봐.”
“뭐에 대해서 말하라는거야?”
나는 소주를 한 잔 더 마신다.
“만약 이선준이 여자가 됐다면, 내가 남자고, 이선준이 여자라면.”
나는 이선준을 노려본다.
“나랑 섹스할 수 있어?”
직설적인 말에 이선준은 말이 없다. 직설이란 간단하면서도 어렵다. 이 세상은 비유와 은유, 환유로 가득하다. 답정너짓을 하는 사람도 사실 은유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를 직설적으로 욕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직설로 무장한 인간은 매우 드물다. 그래서 우리는 술을 빌려 고백하고, 핸드폰 문자로 진심을 말한다. 직설은 공격이다. 그것은 칭찬이든 비난이든 마찬가지다.
술은 마음을 태우는 불이다. 그리고 그 열기를 빌려 하지 못했던 말을 한다.
이선준은 자신도 한 잔 들이킨 뒤 말한다.
“그렇다고 하면?”
“가정은 집어치워. 하나만 말해.”
나는 공격적으로 말한다. 내 어딘가 망가져버린 것 같다. 이선준이 내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나는 박헌영을 공격하지 못했다. 박헌영을 깔아뭉개고 말로 난도질하지 못했다. 나는 울분을 엄한 곳에 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걸 잘 알고 있다.
“만약은 없어.”
“그걸 누가 몰라?”
싸우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우리는 싸우듯 말한다. 내 감정은 격해져 있다. 이선준은 침착하다. 사실 싸움이라기보다 나는 이선준에게 일방적으로 화를 내고 있다. 이선준은 한숨을 쉰다. 폭력적인 내 말에 이선준은 어울리려 노력한다.
“안 하겠지.”
“왜?”
“사유의 통로가 변질되니까.”
이선준은 변질이라고 표현한다. 원론적인 대답이다. 친구에서 사귀는 사이가 되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달라져버린다.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고,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하게’되어버린다. 이러한 원칙에서 위배되는 행동이나 말을 한다면 상대방은 화를 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관계가 변하면 공유하는 언어도 변질된다. 그것은 곧 서로에게 향하는 사유의 통로 자체가 변해버리는 것을 뜻한다.
“사귀는 게 아니라 섹스를 할 수 있냐는 문젠데?”
이렇게 말하니까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나는 이선준에게 결국 같은 질문을 한 것과 다름없다. 이선준이 여자건, 내가 여자건 의미는 같다. 나는 이선준에게 어쨌든 ‘나와 섹스를 할 수 있냐.’ 라고 물은 것이다.
“네가 남자고 내가 남자라도 못할 건 어딧냐?”
이선준이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통에 나는 웃어버린다.
“이건 아주 간단한 얘기지. 성별 같은건 집어치워, 단순하게 ‘친구와 섹스를 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수준의 아주 낮은 층위의 토론이라고.”
무시당하는 기분이지만 내가 한 말이 멍청한 말이라는 건 인정한다. 섹스에 감정이 없다면 얼마든 할 수 있는거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선준은 내 멍청한 말에 끝까지 어울려주려고 하는 모양이다.
“나는 육체관계에 감정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런 관계를 갖게 되면 없던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 내가 여자가 되었고, 너와 섹스를 한다면 그런 감정의 기조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어. 그러면 말했듯 우리가 공유해왔던 것들의 대부분이 바뀐단 말이야. 나는 그게 싫어.”
보수적이다. 이선준은 소주를 따르며 말한다.
“그러니까 못 할 것 같은데.”
사실 내가 했던 짓도 결국 답정너에 불과하다. 나는 이선준이 이렇게 말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말했듯 이 질문은 결국 이선준이 여자든, 내가 여자든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다. 지금의 관계가. 친구인 상태가 소중하다고 말하는거다. 나는 이선준이 따라준 술을 들이킨다. 나는 이선준을 보며 말한다.
“이런 말, 다시는 안 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잘 들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나는 이선준에게 술을 따라준다. 나는 조심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나랑 섹스할래?”
이선준은 피식 웃는다. 방금 전의 그런 대답을 유도해놓고 묻는 건 말을 꺼낸 내가 생각해도 악질적이다. 이선준은 소주를 훅 들이키며 오뎅을 씹는다. 그리고 말한다.
“안 해.”
그래, 나는 이 말이 듣고 싶었던거다.
“싫다고 하지는 않네.”
“나는 항상 언어를 적확하게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지.”
‘싫다’ 와 ‘안 한다’는 전혀 다른 말이다. ‘싫다’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근접해 있지만, ‘안 한다’는 그 둘의 거리가 멀다.
말하자면 ‘싫다’는 단어와 의지가 같은거고, ‘안 한다’는 의지와 단어의 거리가 멀다. ‘안 한다’는 ‘참는다’라는 뜻을 포함한다. ‘싫다’는 정말 싫은거다. 그러니까 나는 완전히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의 언어는 이렇게 되어 있다.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되어 있다. 그래도 나는 이선준이 안 한다고 말해줘서 고맙다.
“하고 싶다고 하면 진짜로 할 생각이었는데.”
“너 죽을수도 있어.”
이선준이 길고 굵은 오뎅탕을 들고 흔들며 말한다. 굉장히 상징적인 동작이다.
“자신감이 충만한데?”
시끄러운 오뎅탕집에서 우리의 대화는 조용하다. 음담패설이지만 이 안에는 우리의 관계가 들어있다. 그래, 나는 안심할 수 있다.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변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역시나, 변할 수밖에 없다.
-우웅
“너 전화 오는데.”
“그러네.”
누군가 했더니 엄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원아 어쩌면 좋냐!]
그 전화가 나를 다시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잠깐 나가서 통화를 한다.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이선준이 술집에서 나온다. 이선준은 나를 보며 담배를 빼문다.
“뭐야 너, 안색이 왜 그래?”
이선준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한다. 나는 손을 늘어뜨리고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무엇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있었던 걸까. 이선준이 담뱃불을 당기고 내게 다가온다. 내가 지금 뭘 들은건지, 이게 현실인지조차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
“무슨 일 있으시대?”
“…….”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잘 모르겠다. 실감이 안 난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나는 건 단 하나밖에 없다.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항상 내가 해왔던 행동 하나밖에 없다.
“담배 하나만.”
이선준이 내 말에 놀란 표정이 된다. 하지만 이선준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빈 담뱃갑을 열어보인다.
“그거라도 줘.”
나는 이선준이 물고 있는 담배를 억지로 빼앗아서 한 모금 들이킨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아서 아주 천천히 내뱉는다. 아찔한 감각과 함께 흰 연기가 뿜어져나온다. 뇌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나쁜 안정감이 찾아온다. 한 모금 더 삼키려다가 그만둔다. 이선준이 물었던 담배는 약간 촉촉하다. 남이 물었던 담배를 피우는 걸 정말로 혐오했는데, 사실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다.
그런 것에 기분나빠질 상황이 아니다. 이선준은 내가 건넨 담배를 받고 다시 입에 문다. 나는 쭈그려 앉은 채 말한다. 오늘따라 너무 춥다.
“동생이 사람을 때렸대.”
나는 그 말을 하고 나자 맥이 탁 빠져버려서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이선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머리가 갑자기 깨질 것처럼 아프다.
============================ 작품 후기 ============================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