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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71화 (71/224)

00071 우연과 필연 사이 =========================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당연히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박헌영은 지금 섬뜩할 정도로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박헌영은 나에게 끌린다고, 내가 좋아지고 있다는 식으로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박헌영은 굉장히 원초적인 마음을 말한거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가장 솔직한 방법으로 내뱉은거다.

어둠 속에서 박헌영은 가장 선명한 진심을 말하고 있다.

욕망(慾望)한다. 사실 이 말은 사랑만큼, 혹은 사랑보다도 더 순수한 말이다. 욕심(慾心)과는 다르다. 욕심은 바라는 마음이지만, 욕망은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이다. 욕심에는 주체가 있지만, 욕망에는 주체가 없다. 이 말은 ‘나’라는 주체마저 사라질 정도로 깊게 바라고, 또 원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사랑보다도 더 간절한 감정이다. 박헌영이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은 것일 수가 없다.

나는 내 마음을 항상 이렇게 설명해왔기 때문이었다. 박헌영과 이선준에게, 짝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내가 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여자를 욕망하는거야.’

사랑보다도 직관적이며 간절한 말이었다. 물론 이 단어에는 성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나는 그것이 나쁘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이, 그 단어의 뜻을 같이 음미하던 친구가 나를 대상으로 그런 말을 한다.

더럽다는 생각보다도 허탈한 기분이 든다. 노력이라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까 느꼈던 것처럼, 박헌영은 지금 몸이 달아 있다. 박헌영은 강제로 나를 취하려 하지는 않을거다. 하지만 이 마음에 솔직해진 이상 한 걸음 더 다가오려고 할 것은 뻔하다.

“내가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잖아.”

“…….”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냐.”

“…아니.”

이제는 인정해야만 한다. 박헌영이 나쁜게 아니다. 나를 욕망하는 사람들이 나쁜게 아니다. 나쁘다는 표현은 사실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쓸 수 없다.

남자는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탐나는 것을 갖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다. 어둠 속에서 박헌영은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다.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 머리가 오래된 경첩처럼 삐걱거린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차라리 덮치지 그래.”

그랬다면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조금 울었겠지만 잊어버렸을거다. 다시 한 번 내 마음의 한 부분을 잘라내는 것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거다. 내 친구가 나를 욕망한다는 것은, 애정한다는 것은 그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전자가 분노라면, 후자는 슬픔이다. 박헌영을 비난할 수 없다. 방향을 잃은 감정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새로이 느껴야만 하는 감정들이 너무 많다.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다른 각도로, 다른 시선에서 내게 향하는 감정과, 내 안에서 생겨나는 감정들이 너무나 많다. 토하듯 말한 내 언어에 박헌영은 답하지 않는다.

끊어내야 하는걸까. 끊어낼 수 있는걸까. 나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박헌영을, 나를 욕망한다는 죄목으로 잘라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아무리 박헌영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고, 죄책감을 느껴도. 나는 죄책감 때문에 억지로 이 녀석을 사랑할 수는 없다.

“긍정적인 대답을 바라고 말한 건 아니지?”

어둠 속에서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실루엣이 보인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온다. 박헌영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눈물이 난다. 하지만 보이지 않을거다.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어. 네가 뭘 원해도, 지금은 아무것도 줄 수 없어.”

그대로 몸을 돌려 돌아가고 싶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최대한 건조하게 말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한다.

“미안해.”

마지막 말에 울음이 묻어나와 버린다. 나는 어두운 현관에서 단화를 신는다. 도망치듯 박헌영의 방에서 나오지만 박헌영은 따라 나오지 않는다. 어찌보면 박헌영은 나를 떼어놓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건지도 모른다. 더 깊은 마음이 되기 전에 나를 뿌리치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욕망한다. 그 말의 뜻을 알고 있지만, 그 말을 직접 들으니 결코 기쁘지 않다. 고백의 종류로 따지자면 정말 최악이다. 사랑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당연하다. 욕망은 사랑과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나는 그 말을 사용했던 날들을 후회한다.

눈물을 질질 짜는 것도 웃기다. 찬 바람에 눈물이 말라붙는다. 얼굴이 뻣뻣한 느낌이 전해져온다. 스타킹을 신어도 춥다. 이런 차림으로 울면서 걸어가니까 꼭 바람이라도 맞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는다. 손으로 눈가를 훔친다.

누가 볼세라 나는 잰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걷는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또 이상한 소문이 퍼져나갈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항상 이런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이럴 때마다 나는 누구를 만난다. 다행히 이상한 소문을 퍼뜨릴 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만남은 필연적인 것이다. 당연히 만날 수밖에 없는 만남이다.

집 앞에서 이선준이 서있다. 왜 여기에 서있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이선준은 나를 쳐다보더니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세워 나에게 다가온다.

“너…… 뭐야, 울었어?”

굳이 묻지 않아도 뻔하다. 박헌영과 둘이 있었으니 불안했겠지. 대체 뭐가 불안했던 걸까. 무엇이 이 추운 가을날 이선준을 내 집앞에 서서 기다리게 했을까. 그건 무슨 불안감일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켠다. 이선준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냥 무작정 기다린거다. 어쩌면 이렇게나 멍청할까.

나는 이선준을 노려본다. 이선준은 자신이 무슨 바보짓을 하고있는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거다.

“이러면 안 되냐?”

“어, 안 돼.”

나는 매몰차게 말하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뒤통수가 따갑다. 그리고 나는 현관을 열고 다시 나와서 말한다.

“기다려, 옷 갈아입고 나올테니까.”

나는 성큼성큼 걸어 집에 들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신발을 대충 구겨신고 나왔다. 이선준은 약간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본다. 나는 그런 이선준을 보면서 말한다.

“왜 기다렸어?”

“아니 그냥…… 술이나 한 잘 할까 해서….”

예전부터 그랬지만 이선준은 거짓말을 잘 못한다. 얼마든지 속마음을 헤집고 들어가서, 난도질해버릴 수도 있다. 술이 먹고 싶으면 전화나 카톡을 하면 되는거지 집 앞에서 기다릴리가 없다. 내 집 문을 두드려보고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안 해본 게 분명하다. 그냥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 때문이었을거다. 그 감정이 어디서 비롯하는지 나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봐야 더 힘들어질 뿐이다.

“뭐가 걱정되서 기다리는데? 내가 지금 박헌영이랑….”

나는 말을 더 잇지 못한다. 어쩐지 감정이 복받쳐 오른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떨군다.

“몰라, 됐어. 다 됐으니까. 안 물어보고 안 화낼거야.”

나는 이선준을 노려보며 말한다.

“그러니까 뺨 한대만 때려도 돼?”

이선준은 흠칫하는 표정이다. 얼빠진 표정이 어쩐지 웃기다. 이선준은 엉거주춤하게 선 자세로 얼굴을 내민다.

“등신.”

오히려 내미니까 때리고 싶은 기분이 확 사라진다. 나는 한숨을 쉰다. 이선준은 내 표정을 보더니 어색하게 웃는다.

“술이나 먹자.”

내가 앞서 걸었다. 이선준이 따라온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 작품 후기 ============================

연재주기는 느릴거야.... 미안하다는 말밖에 못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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