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0 옷 사는 날 =========================
나는 롤을 두 판 했고, 결과는 참패였다. 게임이라는 건 안 하다보면 뭔가 바뀌어서 적응하기 힘들다. 그래, 내가 쌌다.
“뭐!”
요리를 다 완성하고 나를 빤히 바라보던 박헌영에게 내가 버럭 성질을 낸다,. 박헌영은 어쩐지 기분나쁘게 웃으며 상을 차린다. 사실 게임을 못한 것도 있지만 계속 맛있는 냄새가 나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뭐 이런 걸 집에서 하냐?”
“재료만 있다면 밖에서 먹는 것보다 해먹는게 싸지.”
없는 상태에서 재료를 사서 만들려면 오래 걸리지만, 박헌영 집은 냉장고도 크고 안에 준비된 재료들도 많다. 애초에 자취방에 오븐에 대형 냉장고라니, 그런데도 이 방이 좁지 않은 걸 보면 새삼 박헌영 원룸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된다.
그래도 앉은뱅이 식탁에 앉아서 먹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술 마실래?”
“아니.”
나는 단칼에 거절한다. 박헌영이 어쩐지 서운한 것 같은 표정을 짓지만 안 먹는 건 안 먹는거다. 박헌영은 솔직히 불안하다. 이선준과 박헌영을 차별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정말 불안하다. 박헌영은 조금만 빈틈을 보여줘도 갑자기 다가오려고 한다. 손을 잡은 것도 그렇다.
박헌영이 내심 술을 먹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술을 마시게 되면 이 녀석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다.
“너 안 먹으면 나도 안 먹지 뭐.”
“어쩐 일이래.”
박헌영은 진짜로 술을 먹지 않는다. 내 불안감을 안 건지 그냥 먹을 사람이 없으니까 안 먹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술을 안 먹는다는건 불안할 일이 없다는 거니까 다행이다.
“너 그런데 이럴거면 차라리 요리 하지 그러나.”
정말 맛있다. 고기가 딱 적당하게 익었다. 옆에는 드레싱 얹은 양상추 샐러드가 있고, 찍어먹는 소스도 직접 만든건지 맛이 괜찮았다. 고기는 고기 자체만으로도 맛있지만, 그 고기의 맛을 끌어올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양념을 안 한 고기에도 이 정도 맛을 낼 수 있다는 건 정말 박헌영의 요리 실력이 대단하다는 거다.
“그보다 글을 더 잘 써서 어쩔 수 없지.”
“너 재수없어.”
이 자만심이 박헌영을 지금까지 이끈 원동력일 수도 있다. 뭐 사실 자신감이라는 건 어느 정도만 있다면 좋은 거니까.
“너 집 가면 네가 요리하지.”
내가 갈비살을 뜯으며 말하자 박헌영은 고개를 끄덕인다.
“뭐 그렇지.”
박헌영은 어쩐지 표정이 좋지 않다. 나는 그걸 제대로 보지 못했다.
“흠, 나중에 글 쓰다가 지치면 식당이나 하나 해도 괜찮지 싶은데.”
뭐, 이렇게 먹고 있으면 드는 생각인데, 정말 박헌영은 식당을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박헌영은 실실 웃으며 그런 얘기를 한다.
“프랑스 유학 다녀오면 셰프소리 들으면서 레스토랑 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고.”
“돈은 어디 땅 파서 나오냐?”
라고 하지만 이 녀석, 돈 많이 벌고 있다. 박헌영한테는 돈 얘기 같은 거 하면 안 된다. 일단 나나 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내가 그런 얘기를 하닥 표정이 굳자 박헌영은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안다는 듯 말한다.
“뭐, 나중에 할 일 없으면 서빙 알바 정도로는 써주지, 시급 육천원에 계약직으로. 사대보험 없이.”
“내가 미쳤냐?”
박헌영은 잘 먹는다. 나도 평소보다 조금 더 먹는다. 자취하는 사람들이 밥 잘 챙겨먹고 다니는 건 정말 무리다. 아침은 안 먹거나 대충 길거리에서 파는 간단한 걸로 때우기 일쑤다. 나는 길거리에서 사먹는 게 싫어서 아예 안 먹는다. 뭐 딱히 건강에 대해 신경쓰는 건 아니지만서도 그냥 꺼려진다. 애초에 별로 맛있다는 생각이 안 든다.
그러니까 박헌영이 해주는 밥을 먹을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잘 못 먹고 비리비리하게 지내던 자취생이 오랜만에 집밥을 먹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니, 그보다 좀 더 뭔가 다른 그거다.
“너 솔직히 우리 엄마보다 요리 더 잘 하는 것 같아.”
진짜 그렇다. 우리 엄마도 요리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박헌영은 좀 특출난 면이 있다. 따끈하게 김이 오르는 밥과 고기를 먹는다. 마치 가뭄에 단비 같은 느낌이다. 나도 집에서 밥을 해먹는 편이기는 하지만 만드는 게 오래 걸리는 것들은 해먹지 않는다. 무엇보다 귀찮아서고, 안 해봤기 때문에 시도를 안 하는거다.
“하다 보면 늘어.”
맞는 말이긴 하다. 뭐든지 하다 보면 늘게 된다. 박헌영은 그러고 보면 처음 만드는 요리도 곧잘 했다. 요리를 하다 보면 어떤 감각이라는 게 생기는 모양이다. 처음 하는 요리라도 간은 이 정도, 배합은 이렇게, 굽는 정도는 이렇게라는 느낌이 있는 것 같다.
나도 하다 보면 늘겠지만, 지금은 귀찮아서 하기 싫다. 그래서 설거지를 하는 정도로 나는 박헌영에게 얻어먹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한다.
“너 왜 이렇게 속이 좁냐?”
남은 갈비들을 보며 박헌영이 한 말이다.
“양이 줄었다는 말을 너무 나쁘게 표현하는거 아냐?”
박헌영이 꽤 많이 먹었음에도 상당한 양이 남았다. 애초에 너무 많이 만든 탓이다. 나도 예전처럼 먹지 못한다는 것은 알텐데, 이 녀석은 손이 너무 크다. 내가 원래 상태였어도 이걸 다 먹지는 못했을거다.
다 먹고 나서 나는 설거지를 한다. 박헌영은 컴퓨터에 앉아서 소설을 쓴다. 나는 뭔가 제대로 준비되고, 마음가짐이 된 상태에서나 쓸 수 있는데 이 녀석은 특이하다. 앉은 자리라면 어디서든지 소설을 쓴다. 짬이 날 때마다 부업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설거지라는 건 귀찮은 일이기는 하지만 막상 하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 그래서 하고 나면 왜 이걸 오랫동안 묵혀뒀는지 하는 자괴감이 생기기도 한다.
설거지를 끝내고 나는 털썩 주저앉는다. 술을 안 먹으니 밥만 먹고 끝이다. 할 일도 없으니 집에 돌아가서 잠이나 자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박헌영이 뭔가 주섬주섬 꺼낸다.
“야, 나 이거 샀다.”
“뭔데?”
“빔 프로젝터.”
동글동글하게 생긴 자그마한 기계다. 그러고 보니 텔레비전에서 봤던 것 같다. 초소형 빔 프로젝터니 뭐니 하면서.
“이걸 왜 사?”
“왜 사긴? 쓰려고 샀지.”
“원룸에서 이걸 어떻게….”
그러고 보니 한 쪽 벽면이 말끔하게 치워져 있다. 그 프로젝터를 쏘아내는 하얀 천 같은 건 없지만, 벽지가 하야니가 그냥저냥 될 것 같기도 하다.
“영화 보려고?”
“뭐 영화도 보고 이것저것 보려고 산거지 뭐.”
박헌영은 그러면서 그걸 컴퓨터와 연결하더니 설치를 한다. 의외로 금방 끝난다. 뭘 보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박헌영의 그런 행동이 어쩐지 나를 집에 보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프로젝터 화면으로 박헌영이 동영상을 재생한다.
“너 기껏 이거 보려고 샀냐?”
“저번에 못 봤거든.”
박헌영이 기껏 재생시킨 동영상은 지난 롤드컵 영상이다. 뭐 나도 못 본 건 매한가지지만 게임은 하는 걸 좋아하지 굳이 볼 생각까지는 없다. 빔 프로젝터씩이나 사서 게임 동영상이나 본다니 어쩐지 한숨이 나온다.
나는 군말 하지 않는다. 박헌영은 바로 대회 영상으로 넘어가서 내 옆자리에 앉는다. 나는 어쩐지 두려워져서 박헌영과 거리를 둔다. 박헌영은 그런 내 기색을 아는 것 같은 눈치다.
솔직히 엄청 긴박하거나 현란한 장면이 나오지는 않는다. 이건 마치, 그래. 운동선수의 잔뜩 긴장된 근육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모두 웅크리고 있다가 마치 동물처럼 뛰어들거나, 도망친다. 그 긴장감이란 지루할 정도로 경직되어 있어서 나는 별로 재미있다는 생각은 안 든다. 하지만 박헌영은 눈도 떼지 못하고 그걸 보고 있다.
경기 영상은 정말 길다. 나는 그냥 화면을 보고 있을 뿐,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내 처지가 마치 저 화면 속에 갇힌 게임과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여러 사람들이 구경하며 환호하고, 매료되고, 혐오하거나, 비웃는 저런 게임 속 화면과 내 인생이 별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내 삶을 지금 누군가 관전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트루먼쇼처럼, 누군가 나를 구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두려워진다.
내 삶의 가치를 정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울해지네.
“너는 재미가 뭐라고 생각하냐?”
두 번째 경기가 끝나고 난 뒤, 박헌영이 내게 묻는다. 솔직히 경기 내용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 보라색 팀이 이겼다는 것만 안다.
“재미?”
“그래, 재미.”
“즐거움에 대해서 말하는거야?”
“그렇게 봐도 좋지.”
나는 잠시 고민한다. 재미라는 건 뭘까. 사실 간단하다. 재미라는 건 굉장히 원초적이고, 욕망과 밀접한 단어다.
“하고 싶은 걸 하는거지.”
내 말에 박헌영은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말을 갑자기 꺼내는 이유가 뭘까. 해야 되는 일들은 대체로 재미가 없다. 공부가, 일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다.
“재미라는 건 사실 안 해도 되는 일들에 붙는 속성이 아닐까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맞는 듯 틀린 말이다. 재미라는 말은 욕망인 동시에 취미라는 말과도 굉장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게임이든, 운동이든, 뭐든 재미를 느끼는 일들은 사실 그리 인생에 필요치 않은 것들이다. 박헌영의 말에는 오류가 많지만 나는 굳이 지적하지 않는다.
“사실 세상에 굳이 해야 될 일이라는 게 어딧어?”
“그렇지.“
의무감은 우선순위에서 온다. 공부도, 일도 사실 안 해도 죽지는 않는다. 단지 현재를 팔아서 미래를 사려는 노력일 뿐이다. 박헌영은 나를 쳐다본다. 이제는 박헌영도 빔 프로젝터 화면을 보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사실 재미라는 것은 어떠한 일에도 조금씩은 들어있는 속성이지.”
“왜, 게임 하는 거 보니까 이걸 왜 보고 있나 하는 회의가 드나보지? 재미없어?”
“아니.”
박헌영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네 말대로, 사실 세상에 해야만 할 일이라는 건 없잖아.”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제는 감도 안 잡힌다. 박헌영은 계속 나를 쳐다본다. 저 입에서 나올 말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두렵다.
“네 말 뒤집어 보면, 하면 절대로 안 되는 일이라는 것도 없잖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없듯, 절대로 하면 안 될 일이라는 것도 사실 없다.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문제가 있는 말이다.
“무슨 비약을 하려고 그런 소피스트 같은 논리를 들이미는거야?”
내가 핀잔을 주듯 말하자 박헌영은 피식 웃는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전혀 감도 못 잡고 있었다.
“우리 친구잖아. 그렇지?”
“어…. 그렇지.”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이런 말을 하니까 덜컥 겁이 난다. 박헌영은 빔 프로젝터를 끈다. 소리도 꺼진다. 불 꺼놓은 방 안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그것은 무서울 정도로 빨라서,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숨기는 거 질색이야. 그러니까 친구끼리, 솔직하게 말할게.”
어둠 속에서 박헌영이 어떤 표정인지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무슨 말이 나오든 나는 기쁘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은 확신처럼 다가온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미처 뭐라 말하기도 전에 박헌영이 말을 꺼낸다.
“나는 지금 너를 욕망하고 있어.”
그 말만으로도 내 불안한 마음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작품 후기 ============================
미안..... 요즘 공모전 준비중이라 너무 바쁘다. 약속해놓고 못 지켜서 미안하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