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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69화 (69/224)

00069 옷 사는 날 =========================

나는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박헌영은 어쩐지 텐션이 올라서 힘차게 영화관으로 들어간다.

박헌영이 무슨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을 하고 있다고 그걸 보자고 했지만 나는 절대로 싫다고 했다.

“이게 그 러브라이븐가 하는 그거냐?”

박헌영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단번에 기각했다. 몇 번의 실랑이가 오간 끝에 우리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기로 정했다. 디즈니나 픽사에서 만드는 애니메이션류는 나도 좋아한다. 박헌영은 시무룩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보기 싫은건 절대 안 본다. 예전에 연애할 때도 이거 때문에 참 많이 싸웠다. 취향이 같지 않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스위트박스 밖에 없는데요. 그걸로 드릴까요?”

막상 예매를 하려고 하자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 전 좌석이 이미 매진되었고, 남아있는 것은 커플석인 스위트박스 뿐이었다. 박헌영은 냉큼 결제했다.

“야, 너 물어보지도 않고….”

“뭐 어때.”

박헌영이 싱글벙글 웃는다. 이 자식 진짜 기분나쁘다. 솔직히 스위트박스건 뭐건 어떻냐는 생각이 들긴 한다. 실제로 영화 보러 왔는데 이런 일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내가 남자였을 때였다. 시간 이선준과 나는 굳은 표정으로 스위트박스에서 최대한 떨어져 앉은 채 영화를 봤었다.

뭐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되지만, 박헌영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좀 꺼려진다. 이 자식 오늘따라 더 심한 것 같다.

입장 시간이 조금 남은 탓에 오락실에서 게임을 몇 판 했다. 사람들이, 특히 남자들이 날 쳐다본다.

“야, 너 지금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남자로 보이는 것 같은데?”

내가 놀리듯 말하자 박헌영은 씨익 웃으며 말한다.

“솔직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 생에 이런 미녀와 데이트를 하게 되는 날이 오다니!”

장난에 더 큰 능글맞음으로 맞받아쳐오니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진짜 이 자식은 나랑 사귀고 싶기라도 한 건가? 왜 이렇게 추근거리는거야?

그러고 보니 같이 쇼핑을 하고 영화를 본다. 이건 그냥 생각해 보면 데이트랑 별다를 것이 없다. 여기서 영화 보고 모텔로 들어가면 그야말로 전형적인 데이트구나. 그런 생각도 든다. 물론 내가 갈 이유가 전혀 없지만.

영화관에 입장해서 좌석에 앉는다. 스위트박스는 넓은 듯 좁다. 영화관의 대부분은 커플들이나 여자들끼리 오거나, 가족들끼리 오거나다. 남자들끼리 영화를 보러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야 뭐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선준이나 박헌영과 영화를 보러 갔던 적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다.

영화 자체는 재미있다. 애들이 이다금 제멋대로 떠들고, 울고, 시끄럽게 구는 걸 제외하면 괜찮다. 박헌영도 몰입해서 영화를 본다.

중후반부에 접어들고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점점 더 긴장감이 생긴다. 디즈니 특유의 개그 코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나는 잘 안 웃는다. 박헌영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긴 장면이 나올 때마다 나를 보며 웃는다. 나는 마주 빙긋 웃어보인다.

이렇게 보면 박헌영은 완전히 애 같다. 뭐 그래서 장르소설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인 상상력이 그만큼 되는 거겠지.

그리고 결말부에 들어갈 때쯤, 나는 내 손등을 덮는 손길을 느꼈다.

박헌영이 내 손을 잡는다.

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다. 이건 평범한 장난이 아니다. 박헌영은 영화 화면에 집중하고 있다. 박헌영은 지금 용기를 내서 내 손을 잡은거다. 그래서 나와 눈을 마주칠 수 없는거다.

박헌영은 대체 왜 용기를 낸걸까. 답은 나와 있다. 이런 장난들이, 나에게 자꾸만 치근거리는 것들이 완전히 장난은 아니란 뜻이다. 박헌영이 내 손을 부드럽게 말아쥔다. 나는 손을 빼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내가 손을 빼버리면 박헌영에게 상처가 될거다. 나는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그냥 손을 잡는거다. 너무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나는 민감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뭐든지 시작이 어렵다. 손을 잡고 나서, 그 다음 단계로 자꾸 다가오려 하면 나는 슬플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 나는 어느 정도 체념하게 된다. 나는 더 이상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이건 거의 자연의 법칙처럼 느껴진다. 내가 여자가 된 일이 불가항력적이었던 것처럼, 박헌영이 내게 이러는 것도 박헌영의 잘못이 아닐거다. 이건 불가항력적인 일이다.

나는 더 이상 친구라는 이름으로 박헌영의 옆에 있을 수 없다.

나도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박헌영도 저항할 수 없는거다. 박헌영은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녀석의 손에서 땀이 배어나온다. 엄청 긴장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도 든다.

박헌영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되어버린 것뿐이다. 나는 손을 빼지 않는다. 하지만 손을 잡지도 않는다. 나는 있는 힘껏, 정말 작지만 또박또박 말한다.

“오늘만이야.”

나는 고개를 숙인다. 박헌영은 내 손을 더욱 세게 붙잡는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는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밖으로 나온다. 박헌영이 갑자기 손을 덥석 잡는다. 나는 겁이 난다. 하지만 방금 오늘만큼은 괜찮다고 말했다. 나는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어색하게 웃는다. 목소리가 떨린다.

“왜 이래?”

“뭐 어때?”

박헌영의 웃는 표정에는 어느 정도 죄책감도 어려있다. 박헌영의 손이 뜨겁다. 나는 능동적으로 박헌영의 손을 잡지는 않지만 뿌리치지도 않는다. 그래, 오늘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자. 그리고 죄책감 같은 건 떨쳐내자. 막상 이러고 나면 별 것 아니었구나 하고 원래대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밥 먹을까?”

“뭐 먹을건데?”

영화는 그냥저냥 괜찮았던 것 같다. 엄청난 명작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재미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영화 얘기를 하며 식당가로 내려간다. 여전히 손을 잡고 있다. 그렇게까지 역겨운 기분이 들지 않는게 오히려 신기하다. 그냥 평범하다. 두근두근거리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싫은 것도 아닌 그런 기분이다.

그리고 만남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항상 찾아온다.

“어?”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다가 맞은 편에서 올라오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다.

“박헌영?”

이선준이 맞은편 에스컬레이터를 올라오고 있다. 혼자다.

우리는 내려와 있었고, 이선준이 다시 내려온다. 죽고싶다. 죽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선준은 나를 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한다.

“뭐야 너…. 설원?”

“아….”

이선준은 나와 박헌영을 번갈아 바라본다.

“아, 이제 봄이라서 옷 사려고. 같이 왔어.”

박헌영은 쇼핑백을 들어올리며 말한다. 이선준은 나를 쳐다본다. 치마에 단화, 완벽한 여성복을 차려입은 모습이다. 무슨 도둑질이라도 하다가 들킨 것 같은 기분이다. 꼭 박헌영과 몰래 데이트라도 하다가 걸린 것 같다. 이런 차림에 심지어 손까지 잡고 있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거다.

“아…. 그래?”

이선준은 고개를 끄덕인다. 손을 잡고 있던 건 못 본걸까?

“소설 쓴다더니 여기는 어쩐 일이야?”

“교양수업 듣는데 과제가 영화 보고 감상문 쓰는 거라서.”

이선준은 영화명을 말한다. 나와 박헌영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치맛자락만 아래로 잡아내린다. 발가벗겨지는 기분이다. 누군가 마주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내 생각이 너무 짧았다. 꼭 몰래 야동이라도 보다가 들킨 것 같은 처참한 기분이다.

“영화 봤어?”

박헌영에게 향하는 이선준의 말투가 어쩐지 가시가 돋친 것 같다.

“어.”

박헌영도 어쩐지 곱게 답하지 않는다. 박헌영과 이선준 사이에 어떤 미묘한 신경전이 생긴 것 같다. 원인은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바로 나다. 둘은 잠시동안 말이 없다. 이선준은 한숨을 푹 쉬더니 말한다.

“너 왜 고개 숙이고 있어? 죄 지었냐?”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선준에게 어쩐지 죄책감 비슷한 것이 든다. 이선준은 나를 보며 웃는다.

“잘 어울리네. 앞으로도 그러고 다녀.”

“어? 아…. 응.”

“나중에 보자. 영화 시간 얼마 안 남아서.”

이선준은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간다. 이선준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이선준이 화를 낼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선준이 화를 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은 명백하게 모순되어 있다. 박헌영이 말한다.

“밥 먹을까?”

“음…. 아니, 그냥 가자.”

박헌영은 고개를 끄덕인다. 녀석은 내 손을 다시 잡지 않는다. 어쩐지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은 기분이다. 잘 어울린다는 그 말에 나는 구원받는 기분이다. 동시에 위로받은 기분이다. 잘 어울린다. 잘못한 게 아니다. 그런 말이었다.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저녁 먹고 가.”

대학가로 돌아와서 박헌영은 그렇게 말한다. 그 말은 바깥에서 저녁을 먹는게 아니다. 집에서 뭔가 만들어 주겠다는 뜻이다. 주저하게 된다. 내가 머뭇거리자 박헌영은 다시 말한다.

“그냥 먹고 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먹을 수가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는 사람을 마주치기라도 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아무도 없다. 그런 생각이 드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 나는 이제 여자다. 내가 여자 옷을 입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그걸 나쁘게 보는 사람들이 이상한거고,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이상한거다.

“뭐 먹고싶은 거 있어?”

“어? 그냥 다 괜찮아.”

말했듯 박헌영의 집은 개판이다. 벗은 옷과 속옷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설거지는 항상 해두는 탓에 음식물 냄새는 안 난다.

나는 화장실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예쁜 옷을 입고 있으면 솔직히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편하지는 않다. 누가 내 속옷이라도 훔쳐보면 어쩌나 하고 전전긍긍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괜히 치맛자락만 조물거리고, 자꾸 뒤를 쳐다봤다.

여러모로 여자라는 건 정말 불편하다. 그리 짧은 옷을 입은 것도 아닌데도 이 정돈데, 미니스커트 같은 걸 입는 사람들의 신경이 어떻게 되먹은 건지 궁금할 정도다. 오히려 그쯤 되면 그런 것에는 신경쓰지 않는건가?

박헌영이 준 옷은 어쩐지 나한테 꼭 맞는 츄리닝이다. 아무리 봐도 박헌영한테 맞는 사이즈는 아니다. 나는 흰색 반팔 셔츠와 검은색 반바지 츄리닝을 입고 나온다.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이런 옷도 사놓은거야? 월수입이 보장되니까 이상한 곳에 돈을 쓰는 모양이다.

박헌영은 재료를 손질하고 있다.

“뭐 만들게?”

“폭립.”

“어?”

자취방에서 만들 수 있는 요리인가 그게? 폭립

“별로 안 어려워. 오븐도 있고.”

박헌영네 집에는 전자레인지 겸 오븐도 있다. 대전에 있는 본가에도 저런 건 없다. 박헌영은 정말 요리를 좋아한다. 이런걸 보면 정말 이 녀석은 식당이나 뭘 차려도 잘 할 것 같다. 박헌영은 뭔가 섞고, 고기를 물에 담가 핏물을 빼는 등 분주하게 움직인다.

“롤이나 몇 판 해, 빨리 안 끝나.”

“그래?”

뭐 혼자 앉아있기도 심심하니까 나는 컴퓨터를 켠다. 게임을 좋아하기는 한다. 하지만 이 몸이 되고 나서는 그다지 하게 되지 않는다. 애초에 방에는 노트북밖에 없고, 밖에 나가는 게 꺼려지니까 피씨방에 간 것도 상당히 오래 된 일이다.

============================ 작품 후기 ============================

지름식으로 시작했던게 어느 새 70화 언저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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