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8 옷 사는 날 =========================
“야, 그래도 사람들 다 보는데 그런 짓을 하냐?”
“한 번 더 할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주먹을 쥐자 박헌영이 물러선다. 미친 놈, 진짜 말을 안 가리고 하는 것이 최대 단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배려를 안 하는건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는 아직도 그 때 일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박헌영의 거짓말과 그 날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박헌영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 녀석이나 나나 그 날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 녀석은 나를 즐겁게 만들고 싶은 것뿐이다.
“이선준은 뭐 한대?”
“소설 쓰는 것 같던데.”
그러고 보니 이선준의 합평 날짜가 얼마 안 남았다. 소설을 쓰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작업이다. 다들 글을 쓰는 방식이 천차만별이다. 박헌영은 누가 있건 없건 제 마음대로 쓰는 타입이고, 나나 이선준은 누가 곁에 있으면 잘 못 쓴다. 요즘 이선준을 못 만난 것도 꽤 되었다. 워낙 자기검열이 심한 타입이라서 소설을 나태하게 쓰는 건 아니지만 상당히 오래 걸리는 편이다.
“그나저나 이제 덥네.”
사월 중순이다. 아침이나 저녁에는 춥지만, 대낮에는 솔직히 덥다는 느낌이 든다.
“너 옷 좀 사는게 좋지 않겠냐?”
“어…. 뭐 그렇네.”
솔직히 덥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옷이 많은 것도 아니다. 봄이 지나가면 여름은 정말 순식간에 다가온다. 원래 나는 더위를 좀 심할 정도로 탔다. 이 몸이 된 상태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더운 건 정말 질색이었다.
“언제까지 후드티만 입고 다닐거야?”
“그러네.”
얇은 옷을 사기는 했지만 충분히 많다 싶을 정도는 아니다. 간편한 옷이라도 많이 가지고 있는 편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다.
“내가 사줄까?”
“니가 내 옷을 왜 사줘?”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직 지원금은 꽤 남아 있었다. 생필품을 사고, 옷을 살 정도는 충분히 됐다. 무엇보다 박헌영의 의도가 괘씸하다. 딱 봐도 내게 무슨 인형 옷입히기 같은 변태적인 즐거움을 충족하려는 시도일 게 뻔하다. 그런 것에 내가 맞춰줄 필요는 없다.
라고 생각하는데, 박헌영의 표정이 상당히 시무룩해진다. 군대라도 다시 가라는 소릴 들은 사람같다.
“야, 뭐 그런 표정을 짓고 그래?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
원래 같았으면 쌍욕부터 나왔을 텐데 이런 표정을 보니 마음이 약해진다. 솔직히 박헌영에게는 모든 걸 빚진 것과 다름없다. 박헌영에게 진짜 무릎꿇고 용서를 빌어도 모자랄 정도다. 당장 울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을 보자 나는 말문이 턱 막힌다.
“아니 왜…. 이런 걸 가지고….”
진짜 바보같다. 이런 걸 가지고 시무룩한 박헌영도 웃기고, 그것 때문에 미안해지는 나도 웃긴다. 뭐 옷을 사야 하는 것도 맞으니까 내가 할 말은 하나밖에 없다. 나는 인상을 팍 쓰며 짜증난다는 듯 말한다.
“알았어. 가면 되잖아.”
“진짜?”
이 새끼가 왜 이래? 울먹거리는 표정 지어봐야 하나도 안 귀여운데. 내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이자 박헌영은 표정이 대번에 밝아진다.
“백화점은 좀 그렇고, 이 주변에서 사자.”
백화점은 엄청 비싸다. 옷 한 번에 몇십만원씩이나 하는데 내 사정에 거기서 옷을 막 살 수도 없고, 박헌영이 사준다 해도 부담스럽다. 그리고 이 주변의 옷가게들에서 옷을 산다고 해서 나쁠것도 없다.
“그래도 괜찮겠냐?”
“뭐가?”
내 말에 박헌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막…. 옷 사다가 다른 사람 만나면 이상한 오해 받을 것 같은데.”
“…그러네.”
그 생각을 못 했다. 둘이 옷 사러 돌아다니는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괜히 이상한 오해가 생길 것 같았다.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 오해의 소지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버스타고 다른 데로 가자.”
박헌영과 나는 버스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갔다. 학교 자체도 번화가에 위치해 있지만 태원시는 넓다. 갈만한 곳은 어디든지 있다. 나와 박헌영은 같은 자리에 앉았다.
박헌영은 자리에 앉은 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꼭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가만히 앞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꼭 정신이라도 나간 것 같아서 오히려 내가 다 무섭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어? 아 뭐…. 그냥….”
박헌영은 그러면서 씨익 웃는다. 무슨 생각 하는지 나는 그제야 알 것 같다.
“엄청 짜증나는 생각 하고 있구만.“
나한테 무슨 옷이 어울릴지 생각중일거다.
“너 코스프레 같은거 해도 장난 아닐 것 같은데.”
“이게 진짜?”
내가 때리려고 하자 박헌영은 식겁하며 몸을 뺐다. 코스프레라니, 생각도 해본 적 없다. 하지만 어울릴 것 같다는 말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이 정도면 검은 머리 캐릭터는 뭐든지 잘 어울린다는 소리 들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옷, 죽었다 깨어나도 입고 싶지 않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누가 그런 옷 산대냐.”
박헌영은 툴툴거렸다. 어쩐지 투덜거리는 꼴이 귀엽다는 생각도 문득 든다. 뭐, 너무 무리한 것만 아니면 박헌영에게 맞춰줄 생각이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치마 정도 입어도 별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곳은 옷가게가 즐비하다. 학교 앞에도 많지만 이곳은 더욱 많다. 그런 탓에 가격도 싼 편이라서 옷 살 일이 있으면 나는 여기에 잇는 남성복 매장을 주로 이용했다. 이제 그 남성복 매장에 내가 갈 일은 없을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슬프네.
이제 나도 내성이 좀 생겼으니가 본격적인 여자옷 정도는 한 번 입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무엇보다 박헌영은 이따금 멍한 표정을 지을때가 많다. 그 표정은 너무 슬프고 안돼 보여서 나는 그럴 때마다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니까 하루 정도는 이 녀석 비위에 맞춰줄 필요도 있다.
“왜 안 나와?”
박헌영이 보채는 소리에 못 이겨 나는 피팅룸에서 나간다. 입고 있는 옷은 빨간색 플리츠 스커트에 하얀 블라우스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거 진짜 내가 너무 오만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어머 손님 너무 잘 어울리세요.”
“아, 아. 네….”
“체구도 아담하고 너무 어려 보였는데 이렇게 보이니까 딱 여대생같다.”
옷가게 주인이 나를 보며 호들갑스럽게 말한다. 박헌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있다.
“여, 역시 그만두는게…. 내가 치마는 무슨! 내가 미, 미, 미, 미쳤지!”
무릎 위까지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렇게 짧은 치마는 아니다. 하지만 여자옷을 입는다는 건 생각보다 큰 결심이 필요한 것 같다. 치마를 입는 건 바지를 입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다. 밑에가 너무 썰렁해서 아무것도 안 입은 거하고 다름없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딱 붙이고 서 있게 된다.
이 자식한테 뭐 잘 보일 필요가 있다고 내가 이런 미친짓을 했을까.
옷이나 갈아입고 나와야지. 나는 피팅룸으로 다시 들어가려 했다.
“야, 야.”
들어가려는 나를 박헌영이 붙잡는다.
“어, 엄청 잘 어울려.”
박헌영은 더듬기까지 하며 그렇게 말한다. 박헌영은 내 팔을 확 잡아끌며 말한다.
“다른 것도 입어보자.”
“어?”
어쩐지 누르면 안 되는 빨간 스위치를 눌러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제 그만 좀 사자….”
박헌영은 손에 쇼핑백을 세 개나 들고있다. 원피스 세 벌, 치마랑 블라우스 세 벌씩. 그리고 신발까지 삿다. 전부 다 박헌영이 사려는 걸 내가 극구 말려서 절반은 내가 결제했다. 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박헌영은 결국 사버렸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짧은 보폭으로 걷고있다. 지금 나는 조금 긴 파란색 테니스 스커트에 회색 긴 스웨터를 입고 있다. 굳이 입고 다닐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박헌영이 아주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봤기에 어쩔 수 없이 지금 입고 돌아다니고 있다. 스타킹도 난생 처음 신어보고, 구두도 처음 신어봤다. 하이힐도 신어봤지만 너무 불편해서 도저히 무리였다. 그냥 예쁜 디자인의 단화를 사서 신고 있다.
생각보다 단화가 편하고 좋다. 예쁜 옷을 입으니까 솔직히 기분이 좋다. 물론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솔직히 옷차림이 문제가 아니라는 걸 나도 알고 있다. 학교에서도 쳐다보는 사람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니까 이제와서 수치스럽다거나 그런 생각은 안 든다.
하지만 스타킹은 좀 갑갑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조금 춥기도 하다. 무난한 커피색 스타킹을 신은 내 다리는 내가 봐도 예쁘다.
“화장품 살래?”
“아니 전혀.”
박헌영의 말에 나는 칼같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한쪽 손에 쇼핑백을 두 개 들고있다. 매장에 갈 때마다 사람들이 화장을 조금만 하면, 화장 했으면 더 예쁠 거라는 둥 말을 해댔다. 하지만 역시 화장은 무리다.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그런 문제가 아니다.
굳이 그런 것까지 배워서 내 인생의 피곤함을 더 늘리고 싶지 않다. 나는 박헌영을 보며 웃었다.
“그런 거 안 해도 나 충분히 예쁜데.”
박헌영은 피식 웃었다. 굳이 부정하지는 않는다. 화장 안 해도 속눈썹 길고 모양도 예쁘고, 입술 빛깔도 예쁘다. 눈썹 정리를 굳이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화장 해 봐야 귀찮은 날파리들만 더 꼬이고, 내 주변 사람들 흔드는 것밖에 안 된다. 솔직히 지금 이러고 있는데 박헌영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
“야, 이상한 생각 하면 안돼.”
“안 하거든?”
내 말에 박헌영이 발끈한다. 꼭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 같은 태도다.
“이런 건 눈으로만 보는거야. 만지면 안돼.”
내가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박헌영은 기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이 이상 해 줄 수 있는 건 없다. 해주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도 안 된다. 사람이 많은 거리다 보니 나는 박헌영과 꼭 붙은 채 걷고 있다. 팔이 살짝 스칠 때마다 나는 묘하게 몸이 긴장된다. 그나저나 사람 진짜 많다.
“앗!”
지나가는 사람한테 치여서 나는 뒤로 홱 밀려난다. 박헌영이 내 팔목을 잡아당겨 자신 쪽으로 끌고간다. 나는 박헌영에게 붙잡힌 채 인파가 많은 길목을 벗어난다.
어쩐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박헌영에게 붙잡힌 채 이 인파를 뚫고 나간다.
“하아…. 사람 진짜 많네.”
박헌영은 사람이 좀 드문 길로 나와서야 숨을 놓는다. 사람 많은 곳 진짜 싫다. 예전에는 그래도 키가 있어서 괜찮았는데, 키가 작아진 지금은 사람들이 모두 벽처럼 느껴진다. 답답해서 짓눌려 죽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야 괜찮아?”
“어? 아. 괜찮아.”
박헌영은 내 안색을 살핀다. 얼굴 가까이 들이밀지 마 이 자식아.
“그보다 이제 놔도 돼.”
“어? 아…. 미안.”
박헌영은 지금까지 내 팔을 꽉 잡고 있다. 손을 떼자 팔목에 발갛게 자국이 남는다. 박헌영은 머쓱한지 뒤통수를 긁적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은 CGV뒷편이다.
“영화나 볼래?”
“영화?”
영화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주 챙겨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뭐, 굳이 여기까지 왔는데 영화 한 편 보는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너가 사.”
나는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박헌영은 어쩐지 텐션이 올라서 힘차게 영화관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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