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67화 (67/224)

00067 옷 사는 날 =========================

이 말을 꺼내는 것이 나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이선준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여전히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이다.

“너 예뻐.”

이선준은 그렇게 말하고 내게 다가온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선다. 건물 벽에 등이 닿는다. 이선준은 그래도 내게 걸어온다.

“오, 오지 마….”

이선준은 어느 새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 숨이 막힌다.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걸까. 이선준을 믿지만 나는 이 상황이 무섭다. 이선준은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쳐다보다가 뒤로 물러선다.

“네가 싫어하는 행동을 내가 할리가 없잖아.”

“…….”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이선준은 손을 뻗어 내 볼을 만진다. 거친 손이 볼에 닿는 감촉은 기묘하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할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모호하다.

결국 나를 위한다는 뜻이다. 이선준은 피식 웃는다.

“그리고 사실 말하자면 마음에 들어하는 편이지. 아니, 좋아한다고 해야 하나?”

서혜인에 대한 얘기다. 솔직히 이선준이 이렇게 얘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거짓말처럼 들린다.

“그럼…. 왜 안 사귀는 건데?”

호감이 있다는 뜻이다. 서혜인은 이선준을 많이 좋아한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면 만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선준은 그러지 않는다.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호감이 있다면 연애를 하는거다. 당연히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선준은 피식 웃으며 말한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꼭 연애를 해야 할 필요는 없지. 호감과 그 사람과 연애를 하고 싶다는 감정은 전혀 다른거야.”

비논리적인 것 같지만 그 이상 가는 논리가 없을 정도의 논리다.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낀다. 이선준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게 아니다. 서혜인에게 진짜로 호감이 있는거다.

단지 이선준은 연애를 하고 싶지 않은거다. 좋아하는 것과 연애를 하고 싶은 것은 전혀 다른 감정이다. 정말로 맞는 말이다. 안심이 된다. 정말 안심이 된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러면서도 전혀 다른 감정이 생긴다.

나는 정말 안심하고 있는건가?

이선준은 나를 쳐다보더니 말한다.

“너한테 쥐뿔만큼도 관심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알았어?”

“어? 아…. 딱히 기분 좋지는 않네.”

내가 실없이 웃으며 말하자 이선준은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어쩌라는거야 이 자식이?”

-딱!

“악!”

이선준이 튕긴 손가락이 내 이마에 정통으로 명중한다. 아프다.

“간다.”

이선준은 그렇게 말하고 손을 흔든다. 나는 이마를 싸쥔 채 배웅도 하지 못한다. 이거 진짜 아프다. 머리가 웅웅 울리는 느낌이다. 이선준이 가고 난 거리는 나는 한동안 바라본다. 이선준은 서혜인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이선준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정말 다행이다. 나는 이걸 기뻐해도 된다. 이선준과 나는 친구일 수 있다. 서혜인의 행동을 보자면 아무리 싫다고 해도 연애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계단을 오르며 복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나는 전혀 웃고있지 않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샤워를 했다. 하루에 꼭 두 번 씩은 씻는다. 너무 자주 씻는 것도 안 좋지만 나는 강박적으로 샤워를 한다. 몸을 닦고, 편한 옷을 입고 침대에 누운다. 핸드폰이 울린다. 이선준인가?

발신자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서준영이다. 그 이름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란다.

[미안해]

[다시 만나자고 말하는 거 아니야]

[너한테 잘못한 게 많으니까]

[내가 전부 잘못했다 다시 만날수는 없겠지만 잘 지내라]

나는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 이제와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지? 이럴거면 애초에 나한테 그런 짓을 안 하면 되는 거잖아. 하지만 실수는 주워담을 수 없다. 실수는 실수인 채로 남아있다. 나는 그걸 용서해야 할 필요도, 이해해야 할 필요도 없다.

나는 아직도 그 때의 일이 똑똑히 기억난다. 아직도 그 때문에 힘들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게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서준영과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나 그 누나랑 사귀기로 했어]

[달라지려고 노력할거다]

[너도 잘 지내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나는 알림창에 뜨는 그 메시지를 본다. 나는 서준영이 진심으로 밉고 싫다. 하지만 그 말들을 보자 나도 놀랄 수밖에 없다. 나는 순수하게 잘 됐다고 생각한다. 서준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착해서 그런게 아니다. 착하다기보다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이다. 서준영을 만날 생각도 없고, 용서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단순하게 서준영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선량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사람을 오랫동안 미워하는 것이 슬픈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너무 열심히 미워한다면, 오히려 내가 불행해진다. 나는 침대에 쪼그려 앉은 채 설훈에 대해 생각한다.

설훈도 여전히 밉고 싫다. 설훈이 불행하라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마주칠 용기가 없다. 서준영을 만나기 싫은 것처럼 설훈도 만나기 싫다. 다만 자신의 공간에서, 나와 마주치지 않는 세계에서 설훈이 살기를 바란다.

나와 관계없는 채로 살았으면 한다.

중간고사가 끝났다. 뭐 문창과의 중간고사라고 해 봐야 레포트 대체가 대부분이다. 시험공부를 할 필요는 없지만 과제에 치여서 그야말로 사람 꼴이 아닌 모습으로 학교를 들락거린다. 몸은 씻지만 머리를 며칠동안 안 감아서 머리를 묶고 모자를 쓰고 다녔다.

“으아아아아!”

마지막 레포트 제출을 끝내고 나는 비명을 지른다. 정말 열심히 한다고 해도 데드라인에 맞추는 것이 전부다. 이 정도면 노력한 편이라고, 아무도 듣지 않지만 투덜거리고 싶은 기분이다.

“이제야 다 끝냈냐?”

박헌영이 눈앞에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며 말한다. 박헌영은 진작에 과제를 전부 끝내고 인터넷에 연재하는 소설을 두드리고 있다. 괴물 같은 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나를 너 따위와 같은 선상에 두지 마라.”

“퀄리티를 포기하면 과제야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지.”

“그러니까 니 학점이…. 아니야. 됐어.”

내 주제에 누굴 뭐라할까. 애초에 박헌영은 학점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장르문학 작가 쪽으로 이미 마음을 먹었고, 실제로 팔리고 있으니 이 녀석이 글밥 먹는 쪽으로는 사실 제일 유망하다. 학점이 중요한 단계는 이미 지나간거다. 어떤 면에서는 부럽기도 하다.

나도 글 써서 먹고살고 싶다. 그런 생각이 굴뚝같다. 나는 테이블에 엎드린 채 말한다.

“너 얼마나 버냐?”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벌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음…. 이런 거 묻는거 예의 아니지 않냐?”

“무슨 너랑 나랑 직장 동기도 아니고, 나는 0원이다 0원!”

내가 땡깡이라도 부리듯 몸을 부들부들 떨자 박헌영은 실실 웃는다. 박헌영은 잠시 인터넷을 뒤적거리는 것 같더니 답한다.

“평균적으로 삼백오십은 되는 것 같은데.”

“…뭐?”

뭐야 그게. 미친 거 아냐?

“거짓말 하지 말고.”

“요즘은 개강해서 별로 못 하는데, 이것저것 더해보면 삼백오십 정도 되는 거 같은데.”

“뭐야 너, 진짜…. 뭐야….”

대단하다.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많이 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대체 몇 명이 보는건지 감도 안 잡힌다. 지금까지 총 번게 아니라 매달 그 정도 벌고 있다는 말이다. 박헌영은 실실 웃는다.

“그거 쓰면 그대로 남는거 아냐?”

“뭐 수익 떨어지기는 해도 완결작 가지고 있으면 꾸준히 들어오지.”

쌓이면 쌓일수록 글들이 돈을 번다는 얘기다. 웹소설 시장이 풍비박산이 나지 않는 이상 계속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박헌영은 무서울 정도로 글을 찍어내는 놈이다. 글이든 소설이든 제출하라는 말만 떨어지면 바로 그 날 완성해버리는 무서운 녀석이다.

퀄리티는 어떻든 상관없다 치더라도, 그 정도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흔하지 않다.

“너 학교 그만두지 그러냐.”

“졸업장 정도는 있는 편이 이득이잖아.”

이 녀석은 정말 순수하게 글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도 좋아하는 거지만, 좋아하는 만큼 쓰는 것이 더 대단하다. 이 녀석은 앞으로 잘 되면 잘 됐지 추락할 일은 없어보인다.

“나 너한테 시집가도 되냐?”

나는 무기력하게 말한다. 당연히 장난이다. 하지만 박헌영의 표정이 단번에 돌변한다. 엄청 진지한 표정이다.

“당연하지. 지금 올래?”

“어?”

“나 돈 좀 모아놨거든, 한 달 안에 결혼식 할 수 있어.”

“어? 어?”

뭐야, 이게 무슨 소리야?

“딴말하기 없다. 지금 바로 가자. 신고부터 하자.”

“어? 야? 야! 자, 장난이잖아!”

“전세 정도는 구할 수 있을거야.”

뭐야 이 자식 진지하다. 진지해서 무서울 정도다. 박헌영이 당장 벌떡 일어나려는 것을 나는 가까스로 말린다.

“미안,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박헌영은 낄낄 웃는다. 장난 한 번 쳤다가 꼼짝없이 당할 뻔했다.

“되로 주고 말로 받기 싫으면 헛소리 하지 마 이 자식아.”

박헌영이 짐짓 무섭게 말한다. 나는 박헌영을 노려본다. 이 자식은 내가 이렇게 된 이후로 어떻게든 엮지 못해 안달이다. 너무 노골적이라서 화가 나지도 않는다.

“야, 그래도 장난을 다큐로 받아들이냐?”

박헌영은 내 말에 표정을 싹 굳히더니 말한다.

“솔직히 나는 괜찮은데. 너랑 결혼하는 것도.”

“거기까지만 해주세요…”

내가 죄인이다. 쓸데없는 말을 해서 이런 말을 하게 만들어버린 내 잘못이다. 진지해지지 마, 제발 부탁이다. 박헌영은 나를 보며 말한다.

“그런 말도 있잖아. 남자든 여자든 맛만 좋으면 그만이지.”

“죽어!”

나는 박헌영의 머리를 후려갈긴다. 카페 사람들이 전부 우리를 쳐다본다.

============================ 작품 후기 ============================

약속을 지키지 않는게 사람이라지만 이 정도면 내가 생각해도 너무하네.

나도 사람인지라 할일이 있어서 짬 내는게 쉽지가 않다.

매일 한 편은 진짜 무리인 것 같고.... 삼일에 한편? 일주일에 한편?

진짜 노력중이니까. 계속 봐주길 바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