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66화 (66/224)

00066 가르침 =========================

내 말에 이선준과 한정운은 대답이 없다.

“알아서 잘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내 말에 이선준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한정운하고 이런 걸 하는 게 그렇게나 싫은가?

이선준이 이렇게 나와봐야 내 기분만 안 좋아진다. 이선준은 잠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세미나실을 나갔다. 저렇게 나가버리니까 내 기분은 더 안 좋아진다.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지만 결국 서운한 마음은 들거다.

“오늘은 그만 하자.”

“그러세요.”

어차피 할 얘기는 다 한 참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더 얘기를 해 봐야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지도 않을 것 같다. 한정운은 짐을 챙기고, 나도 밖으로 나간다.

한 주에 한 권씩 책을 읽는다. 나쁘지 않다.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었다기보다. 책을 읽고 생각을 한다는 그 자체가 마음에 든다. 한정운이 내게 해준 것은 그저 텍스트를 추천해준 것 밖에 없다. 결국 생각하는 것도 나고, 결론을 내리는 것도 나다.

이선준이 걱정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세미나실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내가 기분이 충분히 나쁠만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선준을 그렇게 보내버린 것은 역시나 마음이 좋지 않다.

얘기나 좀 해보는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뭐해?] – 설원

카톡을 보낸다. 답장은 곧 온다.

[집에 있는데] – 이선준

[커피 마실래?] – 설원

[ㅇㅇ] – 이선준

한정운은 먼저 돌아가고, 나는 이선준과 만나기로 한 카페 앞에서 기다린다.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초조하다. 대학가가 좁은 탓에 아는 얼굴이 몇 지나간다.

“어머 언니, 안녕하세요.”

“어? 아. 그래….”

서혜인이다. 어디 술이라도 마시러 가는지 여자애들과 같이 있다. 인사만 하고 지나치기는 했지만 기분이 이상하다. 여자들의 시선이 날카롭다.

솔직히 저번 문제 때문에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어쩐지 묘한 것도 사실이다. 새내기들의 시선은 전부 적대감이나 다름없다. 이 녀석들은 재미있다는 듯 보고 있다. 그 시선을 견뎌야 하는 것이 짜증난다.

서혜인을 본 것만으로도 마음이 울적해진다. 서혜인과는 딱히 무슨 충돌이 있었던 건 아니다. 이선준이 전역했을 때 생긴 일 정도다. 그건 시비가 붙었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냥 내가 짜증났던 일에 불과하다.

그러고 보니 서혜인을 도와준다고 해놓고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선준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선준을 만나서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나도 잘 모르겠다. 단지 이선준을 그런 식으로 보낸 것이 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선준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것은 분명히 내게 부담되는 일이다.

“야.”

“어? 아, 왔어?”

이선준이 나를 부르며 다가온다. 카페에 들어가서 이선준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나는 모카라떼를 시킨다. 휘핑크림 얹어서. 이선준은 주문하고 앉아있는 나를 보며 말한다.

“단 거 싫어하지 않았냐?”

“땡기더라고.”

나는 피식 웃는다. 몸이 바뀐 것은 내 마음에도 영향을 미친다. 단 걸 원래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였다. 하지만 이제는 단 걸 먹으면 정말, 진심으로 맛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런 나 자신이 웃기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변화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학습 한다더니.”

이선준의 말에 나는 겸연쩍게 볼을 긁는다.

“뭐, 일찍 끝났어.”

“별로 오래 하는 건 아닌가보네.”

“학습 자체보다 책 읽고 소설 쓰는게 주된 내용이니까.”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한정운에게 배운다는 식으로 이선준이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배우는 것보다 내가 알아서 학습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모임이다. 음료가 나오고, 나는 컵을 만지작거린다.

이선준도 멍하니 앉아있다. 바로 본론을 꺼내야 할까? 이런 고민을 하는데, 사실 나는 이선준을 부르기만 했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도 잘 모른다.

“뭐 하다 왔어?”

“그냥 소설 쓰고 있었는데.”

역시 성실남. 내 주변에는 생각해 보면 전부 성실한 인간들밖에 없다. 한정운이야 뭐 말할 것도 없고, 이선준도 그렇다. 박헌영은 게을러 보이지만 인터넷에 소설을 올리기 위해서 하루에 정해진 시간은 꼭 글을 쓴다. 생각해 보면 글을 쓰는 것만 생각해보면 내 주변 사람들 중에서는 박헌영이 제일 성실하다고 볼 수 있다.

이선준의 안색을 살핀다. 평소처럼 그냥 무뚝뚝한 표정이다. 뭔가 그리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화가 났냐고 물어볼까? 그런 말을 해봐야 화가 났다고 대답할리가 없다. 그래, 사실 나는 돌려 말하는 재주 같은 건 없다. 그냥 직설적으로 말해야겠다.

“학습 하는거, 이상하다고 생각해?”

이선준은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젓는다.

“이상한 건 아니지. 열심히 하는 건 좋은 거니까.”

이선준은 그렇게 말하고 아메리카노를 홀짝인다. 나도 한 모금 먹는다. 달다. 단 걸 먹으니까 몸에 기운이 나는 것 같다.

“열심히 해보려고, 솔직히…. 음.”

말하지만, 나는 평소에 이선준을 형이라고 불러왔다. 나는 의외로 예의가 바른 사람이다. 아무리 학번이 같아도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형이라고 하는게 맞는 거라고 생각해왔다. 이 상태가 되고 나서는 호칭이 이상해져서 그냥 되는 대로 불러왔지만. 이선준을 이름으로 그냥 부르는 것은 어쩐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다.

그러니까.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오빠…. 가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데 굳이 형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이선준의 안색이 살짝 변한다. 굳어있던 표정이 살짝 풀어진다. 진짜 어쩌라고, 이름으로 부르는 건 솔직히 안 내킨다고.

“뭐, 잘 하겠지.”

화가 났는지, 삐졌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걸로 풀렸을거다. 나는 웃는다. 이선준을 나를 쳐다본다. 그러고 보니 오빠니 뭐니 이런 말 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꼴로 형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지금이 쌍팔년도 학생운동 시절도 아닌데.

솔직히 말하자면 두렵다. 친구 이상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그 속도가 너무 빠른 것 같다. 내가 원래 모습이었다면 내가 한정운과 학습을 한다고 해서 이선준이 이렇게까지 하려고 할까?

그럴리가 없다. 정말 단순하고, 너무 단순해서 위험한 문제다. 마음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고, 태도가 변하는 것이 느껴져서 두려운거다. 단지 그거다.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시답잖은 얘기다. 술 마시면서 했던 이야기들을 이제는 술 안 마시면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 사실이 우리가 정말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커피를 다 마시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일어난다. 각자 해야 할 일이 있다. 새내기 때처럼 아무렇게나 놀아도 될 정도로 우리는 여유가 있지 않다. 뭐 실제로 여유는 만들면 되는 거다. 하지만 우리는 여유가 있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지 않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사람은 항상 많다. 나는 인파 속에서 이선준에게 말한다.

“서혜인 어떻게 생각해?”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물었다.

하지만 이선준은 똑똑히 들은 모양이다. 이선준은 나에게 말한다.

“그건 왜 물어?”

굳은 표정과 목소리다. 어쩐지, 조금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당황한다.

“아니 그냥, 걔…… 음, 딱 티 나잖아. 좋아하는거.”

우리는 계속 걷고 있다. 이선준은 말이 없다. 항상 그랬다. 이선준은 말을 하면, 그 말 속에 들어있는 진의를 파악하려 한다. 그런 말을 왜 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하는건지 알아내려 한다. 내 성격도 어떤 면에서는 이선준을 닮아있다.

“네가 그런 걸 신경쓰는 이유가 뭐야?”

“그냥 궁금할수도 있는거지. 그렇잖아?”

“지금껏 그래오지 않았는데?”

나는 이선준이 누구를 만나건, 누구와 연애를 하건 신경쓰지 않았다. 이제와서 그러는 건 솔직히 웃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도 잘 모르겠다. 이제와서 이선준에게 서혜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대체 왜 물어보는 걸까.

곧 인전이 드문 원룸촌으로 들어선다. 내 집이 더 먼저 나오기에 나와 이선준은 문 앞에 선다. 이선준은 내게 말한다.

“너, 무섭냐?”

“어? 뭐가 무서워?”

이선준의 목소리는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물어보고 있다. 어떻게 보면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선준은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내가 너 좋아할까봐 무섭냐고.”

“…….”

그 말에 나는 숨이 턱 막힌다. 이선준은 항상 정곡을 찌르는 사람이다. 그걸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이건 어떨 때에는 지독하리만큼 나쁜 단점이다. 바로 지금처럼.

나는 눈을 내리깐다. 할 말이 없다. 그 말이 사실이다. 나도 인정하지 않았고,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지만 그건 사실이다. 지금 내가 걱정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선준이 서혜인을 좋아한다고 말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관계는 여전히 친구일 수 있다고, 앞으로도 친구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좋겠다. 그걸 바란다.

이선준이 나를 좋아할까봐 무섭다. 이선준이 나를 사랑할까봐 무섭다.

그래도 괜찮지 않냐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정과 사랑은 전혀 다르다. 나는 이선준을 사랑하지 않는다. 소중한 사람이지만 이성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직 내 마음은 그렇게 많이 멀리 떠나오지 않았다.

그런 관계는 서로에게 고통이 될 뿐이다. 내가 이선준을 사랑하고, 이선준도 나를 사랑해서 행복하게 된다고 해도. 나는 그 관계가 행복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것은 열정으로 시작해서 허무와 슬픔으로 끝난다. 그런 고통과 아픔으로 차 있는 관계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지금껏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과는 항상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했다.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다시 만나지도 않는다.

우정도, 사랑도 끈질기지만, 사랑은 끈질긴 만큼이나 거칠게 끝나버린다. 누구나 그렇다. 이별한 사람과 다시 만나서 친구로 지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관계가 몇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랑은 아픔과 분노, 증오, 슬픔만 남기고 사라진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이선준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 변해가는 내 마음이 언젠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이 정말로, 정말로 소중하다.

그래서 사랑하게 되는 것이 두렵다.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되는 것도 두렵다. 결국 상처만 남긴 채 끝나버리고, 지금껏 겪어왔던 사랑처럼 증오만 남기고 모든 관계가 휘발되어 버릴 것 같아서 두려운거다.

나는 이선준과 눈을 맞추며 말한다.

“응, 무서워.”

나는 숨을 내쉰다. 내 숨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네가 나를 사랑할까봐 두려워.”

이선준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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