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5 가르침 =========================
그 뒤로 학교생활은 보다시피…. 망했다.
원래도 딱히 긍정적인 학교생활이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새내기들을 만날 때마다 그 시선에 담긴 적의가 느껴진다. 남자들은 비웃고, 여자들은 명백하게 적의가 가득한 시선이다.
여자에게 쌍욕을 하고, 남자는 모욕을 줬다. 내게 좋은 소문이 날리가 없다. 그래봐야 새내기들이 나에게 영향을 줘봐야 별 것 없다. 같은 수업을 들을 일도 없고, 그냥 지나다니면서 그런 느낌을 받을 뿐이다. 그냥 조금 기분나쁜 정도라고 해야 될 거다.
내가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이었으면 정말 힘들었겠지. 하지만 여기는 대학교다. 애들인 건 맞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지키는 선이 있다. 사물함에 죽은 고양이를 넣어놓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물론 나 중고등학생 때도 죽은 고양이를 넣어놓는 정도의 장난을 치는 녀석은 없었지만. 표면적인 괴롭힘이 없으니 그 안 좋은 분위기를 실감하게 되는 순간만 없으면 지낼만하다.
소년만화가 아니다. 나는 모두의 친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냥 내가 좋은 사람,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있으면 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생활은 안정적이다. 처음의 일 주일에는 정말 많은 사건이 있었고, 나는 고통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까 나쁘지 않았다. 박헌영과 이선준, 한정운 세 명이 나를 챙겨주고 아껴주는 것이 느껴진다.
아직 치마를 입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들지만, 이런저런 여자의 부분들이 이해가 된다. 조금 더 지나면, 아마 일 년 정도 지나면 나도 치마를 즐겨입고, 화장도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여전히 불행하다. 이런 마음은 변하지 않지만, 불행하든 어떻든 일상에는 소소한 재미가 있다. 결국 관계라는 건 중요하다. 즐거움도 결국 관계에서 온다. 하지만 그 관계라는 것도 꼬이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를 테면 오늘의 그 이상한 기류처럼.
이선준 - [뭐하냐?]
화요일 밤, 나는 소세미나실에서 저번 주에 읽은 책 내용을 가지고 한정운과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선준에게 카톡이 온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설원 – [학습함]
이선준 – [오 대단한데 혼자 학습도 하고 ㅋㅋㅋ]
설원 – [혼자 아닌데 ㅋ]
이선준 – [? 누구랑 같이 하냐?]
설원 – [한정운이랑]
그 뒤로 이선준은 한동안 말이 없다.
“핸드폰 하러 오신 거 아니잖아요.”
“어? 아, 알았어.”
고등학교 때 선생님도 날 이렇게 쪼지 않았다. 한정운은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모더니즘의 등장과 후에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 그것이 결국에 다른 것이면서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뜻이다. 여러 전문용어들이 나오는데 못 알아듣겠다. 예전에는 자괴감이라도 들었지만 이제 그런 생각도 안 든다. 자포자기라고나 할까.
“뭐 나도 그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줘. 자꾸 전문지식 늘어놓으면 나는 네가 현학적이라고 생각된다고.”
“이런 말을 현학적으로 느껴야 하는 자신에게 실망하세요.”
“이미 충분히 실망하고 있거든?”
아, 카톡이 왔다. 나는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이선준 – [어딘데?]
설원 – [그건 왜?]
이선준 – [어딘데]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하게 느껴져서 나는 내 위치를 말해줬다. 한정운과 조금 더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복도에서 울리는 발소리를 들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역시나 이선준이다.
“……안녕하세요.”
한정운이 기묘한 느낌으로 인사한다. 이선준은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고 고개만 끄덕인 채 들어온다. 한정운은 내 맞은편에 앉아있는데, 이선준은 내 옆에 와서 털썩 앉는다.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내가 뭐 잘못한 건 아닐테고,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뭘까?
“무슨 일이세요?”
“그냥, 나도 네가 진행하는 학습에 참여해볼까 하는데. 괜찮지?”
“선배한테는 필요가 없을 텐데요.”
“내 학습의 필요성을 왜 네가 판단해?”
이선준의 말투는 전혀 곱지 않다. 한정운도 원래 까칠하지만 전보다 더 까탈스럽다. 이선준의 말은 나를 겨낭한 것이기도 하다. 타인이 학습이 필요한지 어떤지를 제멋대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 학습의 시작 경위를 이선준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요청으로 시작된 건 아닐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거다. 무서울 정도로 나를 잘 안다.
“세계관이 이미 완성되어 있고, 충분히 내적 논리를 획득한 사람에게 이런 건 복습에 불과하죠. 무의미한 일에 시간을 쏟는 분은 아니시잖아요?”
“칭찬이냐?”
“사실의 적시죠.”
“그럼 설원은 그렇지 않다는거냐?”
“부족한 면이 있죠. 저는 그걸 채워드리려는 거고요.”
한정운은 예의바르지만 명백하게 이선준을 배척하고 있다. 이선준은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
“뭐야, 둘이 왜 그래? 그렇게 말할 거 없잖아 서로.”
결국 내가 끼어든다.
“그냥 들으면 되는거잖아. 한정운, 안 그래?”
“듣고 말고 할 게 있나요. 그냥 책을 읽고 토론하고, 소설 합평하는 자리인데요? 그리고 책은 한 권밖에 없어요.”
한정운은 그 다음에 이선준에게 학습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내가 책을 읽고, 그 다음 주에 만나서 그 책의 내용에 대해 토론하는 아주 간단한 학습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이선준이 책을 한 권 더 구하지 않는 이상 학습 인원을 충원하는 것은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선준이 왜 뜬금없이 나타나서 학습에 끼어든다고 하는지도 모르겠고, 한정운이 저런 태도로 나오는 것도 이유를 모르겠다.
“한 권밖에 없다고 같이 못 한다는게 말이 안 되잖아.”
“따로 주문하시겠다면 말리지는 않아요.”
“뭘 따로 사? 돈 아깝게.”
그러면 어쩌자는거지? 이선준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이선준은 나를 흘끗 바라보더니 말한다.
“같이 보면 되는거지.”
그러면서 이선준은 내게 더 바싹 다가온다. 뭐야 이거, 진짜 이상하잖아. 한정운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앉은 자리에서 같이 볼 수 있을 정도로 볼륨이 작은 책들이 아닌데요.”
“뭐 어때? 집에서 같이 보면 되는거지. 서로 안 볼 때 보면 되는 문제 아냐?”
이선준이 평소답지 않게 유치하다.
자꾸 모른다고 했는데, 모르지 않아. 사실 알고 있다. 이선준은 지금 질투하고 있는거다.
나와 한정운이 같이 있는 것을 질투하고 있다. 그래서 한정운을 도발하고, 나와는 서로 집에도 들락거리는 사이라는 것을 어필하고 있다. 대체 그런 말을 해서 무슨 이득이 된다는거야?
물론 남자들이 다 유치한 종자들이란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한정운은 나를 쳐다본다. 비난하는 것 같은 눈빛이다. 뭐야, 대체 너는 또 왜 그러는거야? 한정운은 이선준의 완고한 표정을 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따.
“…그러면 제 지도를 따라오실 건가요?”
“아니, 나도 설원에게 도움을 주는 입장이었으면 좋겠는데.”
“어어?”
한정운 만으로도 부담스러운데 이선준에게까지 가르침을 받는다니, 절대로 사양이다. 이선준은 한정운보다 더 심하다. 나는 동기니까 상관 없는건데 이선준은 후배들에게 아주 가혹하다. 특히 책 읽고 소설 쓰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심하다.
“애초에 이 학습의 목적이 제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걸 전제로 한 건데요. 그러면 학습의 기본 목적이 사라지는데요?”
“아니지, 너와 내 의견을 전부 듣고 설원이 여러가지로 생각할 거리를 주는게 더 나은 방식 아냐? 너대로의 편향된 지식을 얻게 되는 쪽은 안 좋을 것 같은데.”
맞는 말이다. 이선준의 말은 맞지만 저건 본심이 숨겨져있는 말이다. 이선준은 일부러 한정운을 공격하고 있는거다.
이선준과 한정운은 갑론을박을 벌인다. 드잡이질이라도 할 기세지만 이선준은 그다지 폭력을 좋아하지 않는다. 좀 무서워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 사람 때린 적도 별로 없고…. 뭐 결국 있기는 있다는 소리라서 어쩐지 섬뜩하지만. 실제로 박헌영도 이선준에게 맞은 적이 있으니까.
한정운은 역시나 아직은 잘 모르지만 주먹다짐을 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선배는 여기에 계실 필요가 없는 거에요. 차라리 학습 프로그램을 하나 더 짜서 설원 선배랑 하는 게 낫지 않아요?”
“하나를 해도 제대로 하는게 낫지. 같이 하자는게 그렇게 싫은 이유가 뭐냐? 다 설원한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야 똑 같은 거잖아?”
점점 언행이 격해진다. 결국 내가 끼어들 수밖에 없다.
“지금 둘 다 엄청 짜증나거든? 그러니까 좀 닥쳐.”
내 말에 이선준과 한정운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애초에 두 사람 다 나를 무슨 어린애 취급하면서 가르쳐 주느니 뭐니 하는데, 나는 애초에 니들보다 내가 딸린다는 생각 안 하거든? 책 몇 줄 더 봤다고 소설 더 잘 쓰는거 아니고, 생각 깊어지는 것도 아냐. 나는 그냥 내가 좋아서, 내가 필요해서 하는거라고!”
“아….”
둘 다 나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이 서로 언쟁해봐야 결국 상처받는건 나잖아. 이 나이 먹고 아직도 가르침이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취급당하면 기분 안 나쁠 사람이 어딧어? 후배한테 학습받고 있는 것도 자존심 엄청 상하는데.
============================ 작품 후기 ============================
요즘 어디 가있어서 연재를 못했다.
미안하고, 앞으로는 일일연재를 하도록 노력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