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4 가르침 =========================
사람은 여전히 많다. 주중이건 주말이건 불금이건 술 마시는 사람들은 항상 있고, 떠들썩하다. 대학생들 뿐 아니라 이 주변이 애초에 번화가이기도 하니까 놀러 나오는 직장인들도 많다. 그래도 원룸촌 쪽에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조금만 걸어가도 번화가다.
왜 꼭, 나쁜 일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나타나는 걸까.
하긴, 그런 말이 있다. 예고된 위기는 위기가 아니라고 하지.
나는 편의점에서 방향제를 사서 나온 뒤, 술집 앞에 운집해 있는 일단의 무리들을 만났다.
아는 얼굴이 몇 있다. 이번 년도에 입학한 새내기들이다. 다들 술이라도 마신건지 몇몇은 담배를 피우고, 몇몇은 얘기를 하고 있다. 2차인지 3차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자리로 이동할 예정인 것 같다. 여자도 남자도 있다.
아는척 해봐야 피곤하니까 그냥 지나치려는데, 누군가가 보였다.
정현수다. 제대로 본 건 아니지만 취한 것 같은 행동거지가 어쩐지 불안하다. 마주치기도 껄끄럽다. 박헌영에게 기대 있던 모습을 보인 이후로 마주칠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든다.
어쩐지 배신을 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든다.
“어어…. 누나아!”
대화하기 싫다. 무슨 얘기가 나와도 긍정적인 이야기는 아닐거다. 그러니까 그냥 지나친다. 그게 나한테 좋은 일이다. 나는 그냥 지나치려 한다. 하지만 정현수는 다시 한 번 소리친다.
“원이 누나!”
“하아….”
술 처먹고 대체 나한테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걸까. 이렇게까지 부르는데 외면할 수는 없다. 나는 멈춰서서 고개를 돌린다. 정현수가 내게 걸어온다. 걷는 폼이 좀 많이 취한 것 같다. 가만히 있던 새내기들의 시선이 내게 꽂힌다. 몇 명은 말리려고 하지만 몇 명은 그런 행동을 제지한다.
왜 막는거야? 술 처먹고 이러면 분명히 실수할 게 뻔한데. 하지만 마찬가지로 다들 술 먹은 상태다. 제대로 된 생각이 되는 녀석이 없겠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재미있겠다는 듯한 표정이다.
진짜 싫다.
“누나아…. 어디 가세요?”
혀 꼬부라진 말투와 시선이 흔들린다. 어쩐지 눈가에 눈물자국이 있다. 울었나? 대체 왜 운거지?
“어? 집에….”
“저랑…. 술 한 잔 안 하실래요?”
“아니 별로. 나 술 안 마셔.”
내가 거절하자 정현수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거절 했으면 그 이유가 어쨌건 나랑은 상관없는거잖아. 모르는 사이로,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면 안 되는건가? 나는 그리고 그 뒤편에 있는 새내기 무리들을 보며 말한다.
“안 친한 사람들 만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하지만 정현수는 그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다.
“그럼 저희 둘이서 다른 데 가서 마셔요. 네?”
“…안 친한 사람들 만나는 것도 싫고, 안 친한 사람 만나는 것도 싫어. 내가 말했잖아.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모르는척 하라고. 나 간다.”
나는 미련없이 몸을 돌려 걸어간다. 하지만 역시나 정현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술이 문제다. 술이 마시면 없던 용기도 생기고, 이상한 자신감도 생긴다.
“앗!”
와락
“진짜 엄청 많이 좋아해요.”
하고, 녀석이 내 팔을 잡아당기는 동시에 끌어안았다.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그거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에 처한 여주인공이 느끼는 감정보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 새끼, 뭐 하는거지?
“놔! 뭐야 너! 꺼져! 미친!”
나는 몸부림친다. 내가 격하게 저항하자 녀석은 손을 푼다. 나는 녀석에게서 몇 걸음 더 물러난다. 몸이 덜덜 떨린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후배이기는 하지만, 나이 차이도 많이 나지만 이 녀석도 남자다. 나보다 키가 크고 힘이 센 건 당연하다.
“이, 이, 미친 새끼! 너. 너 뭐 하는거야!”
“누나 진짜 좋아한단 말이에요…. 어떻게 사람 마음이 그렇게 말 한마디로 바뀌어요? 얘기나 좀 해봐요 정말…. 정말로….”
“꺼져! 내 눈에 띄지 마 미친새끼야!”
내 폭언에 정현수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사태가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새내기 몇이 다가왔다.
“아, 선배님 죄송합니다. 얘가…. 좀 많이 취해서요. 야, 데려가.”
이 녀석 얼굴은 알고있다. 지금 1학년 과대를 하고 있는 녀석이다. 외모는 괜찮고, 피부도 하얗지만 어쩐지 인상도 선해 보이는 녀석이다. 하지만 눈매가 좀 날카롭다. 다른 건 괜찮은데. 성격이 좀 안좋아 보인다.
다른 새내기 두 명이 취한 정현수를 붙잡고 질질 끌고간다. 과대표 녀석, 내가 알기로 15학번 누군가하고 연애 하고 있다고 들었다. 워낙 소문이 빨라서 관심이 없는 나도 이것저것 줏어듣게 된다.
“쟤 술만 마시면 울어요. 선배한테 차였다고요.”
“…그거야 본인 사정이지. 불쌍해서 만나줄수는 없는 거잔항. 애초에 이딴 짓거리 안 하게 주의 좀 시켜. 열받으니까.”
“아 네. 죄송합니다 선배님.”
녀석은 깍듯하게 인사를 한다. 생각보다 성격이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 녀석은 고개를 들더니 나를 쳐다봤다.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 기분나쁘다. 뭐야, 왜 사람을 훑어봐? 미친거 아냐?
“여자친구라도 하나 만드시는게 어때요? 이상한 오해 받는것도 힘드실 것 같은데….”
“그딴 얘길 하는 이유가 뭐야?”
“아니, 여자가 좋다고 하셨잖아요?”
과대표니까 모를리가 없다. 정현수가 차인 것과 차인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모르는 사람이 이상할 정도가 되었을 거다.
“그게 어쨌다는 건데?”
“저희 과야 뭐 동성연애에 개방적이기도 하고, 세상 사람들 인식도 바뀌어 가는데. 취향 맞는 사람 만나면 저렇게 현수 같은 불쌍한 애들이 안 나올 거 아니에요? 뭐 사람들은 레즈비언이라고 보겠지만, 정신적으로 보면 정상적인 연애인 거잖아요?”
이 새끼 뭐야? 나한테 이런 얘길 하는 이유가 뭐지?
“그리고 그러면 선배가 유독 남자 선배들하고 엄청 친하고, 집에도 서로 들락거리는 사이라는 데에서 오는 오해도 풀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아…. 역시나 그런 거였나. 나는 이 녀석이 하는 말의 저의를 어느 정도 알겠다. 내가 걱정되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명백하게 비아냥거리는 거다. 본질적인 비난은 하지 않지만, 그 저의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어서 역겨울 정도다.
“여자라도 한 명 소개시켜 드릴까요? 제가 아는 애들 중에도 한 명….”
“이 씨발새끼가.... 야. 너 이름 뭐냐?”
나는 결국 참지 못했다. 애초에 내 성격에 이런 짜증나는 일들을 지금껏 참고 넘겨 왔던 것이 대단한거다. 내가 갑자기 욕을 하자 녀석의 표정이 변한다.
“김정기요.”
“너 내가 좆같지.”
“네? 아뇨 저는 그냥 선배가 이런저런 소문에 희생되시는 게 안쓰러워서….”
웃기고 있네. 나는 이를 악물고 말한다.
“내가 걱정해달라고 한 적 있어?”
“….”
“없지? 알았으면 대답을 해 씨팔 좆 같은 새끼야. 있어 없어? 하늘 같은 선배가 물어보는데 말을 씹냐?”
“없죠….”
“없는데 왜 간섭이냐?”
“그냥 걱정이….”
“걱정이고 나발이고 왜 남의 인생에 훈계질이야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좆만한 짬찌새끼…. 아니, 짬밥도 못 처먹어본 미필새끼가 어? 내가 씨발 여자가 좋든 남자가 좋든 니 소관에 들어있는 건 단 하나도 없지? 맞아 아니야? 이 좆만한 풋고추 새끼야.”
“….”
“야, 대답 안해? 대답 하라고!”
퍽!
하고, 들고 있던 방향제로 녀석의 머리를 후려갈긴다. 녀석은 나보다 키가 크지만 내 기세에 눌렸다. 구경하고 있던 새내기들의 표정도 굳는다. 녀석이 힘으로 나오면 나야 할 수 있는게 없다. 하지만 여기는 보는 사람이 많다. 나는 선배고, 여자다. 녀석이 힘으로 해결하려 하면 말 그대로 막장 되는건 순식간이다.
“대답 하라고 했다.”
군대에서 후임 갈굴 때나 하던 말을 이 지경이 되어서 다시 꺼낼 줄이야.
“죄송해요….”
“뭐가 죄송한데?”
“네?”
“뭐가 죄송해서 죄송하다고 하냐고.”
“그게….”
“하, 이 새끼 진짜 글러처먹은 새끼네. 야, 씨팔 너는 지금 니가 뭘 잘못한줄도 모르면서 죄송하다고 한거냐? 예의를 국밥에 말아처먹었냐?”
퍽!
다시 한 번 방향제 통으로 녀석의 머리를 때린다. 아픈 건 모르겠지만 기분 더럽겠지. 하지만 그거보다 내 기분이 훨씬 더러웠다. 그딴 얘기를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린 쥐방울만한 자식에게 들어야 하는 내 기분이 훨씬 더러울 수밖에 없다.
“선배님! 말로 하시면 되지 왜 사람을 때려요!”
“너는 뭐 하는 썅년이냐?”
보다못한 누군가가 뛰어와서 나에게 소리친다. 맞다.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었지. 얼굴은 귀엽게 생겼는데 잔뜩 화가 난 표정이다. 아, 술이라도 한 잔 걸쳤으면 오늘 사람이라도 죽였을 것 같다. 열이 확 뻗친다.
“쌰, 썅년이라고요?”
“그래. 선배가 후배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아주고 있는데 왜 끼어들어? 아직 어려서 예의란걸 못 배워처먹었냐? 어?”
“아니 그래도 사람을 때리면….”
“너는 그럼 니가 남자 됐는데 게이 친구 소개해줄까요라는 말 들으면 기분 좋겠냐? 이 대가리에 총맞았냐? 어? 내가 안 열받게 생겼어? 뭘 해도 내가 해! 니들이 무슨 상관이고 왜 지랄이야?”
내 폭언에 여자애도 과대표도 말이 없다. 내가 가만히 있고 모든 논란에 수동적인 자세로 있으니까 내가 호구로 보였을거다. 몸이 바뀌었어도 성격은 남아있다. 수틀리면 개지랄 발광을 하던 예전의 나 자신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야, 뭘 잘못했냐고 묻잖아. 성인이 됐으면 생각은 하고 살아야지. 어? 네가 네 혀로 뱉은 말이잖아 그렇지? 실수를 했으면 인정하고, 다음부터 안 그래야겠지? 빨리 지껄여 봐. 뭐가 잘못됐는지.”
“그…. 제 멋대로…. 생각없이 말하고…. 그래서…. 죄송합니다….”
“아…. 야! 무슨 말이 어떤 부분이 잘못됐는지 말하라고!”
사람 갈구는 건 그리 많은 생각과 사유가 필요 없다. 그냥 추궁하면 된다. 그게 잘 한거냐 못 한거냐? 라는 질문을 하고, 당연히 잘못된 거라는 대답을 하면 된다. 그럼 뭘 잘못했냐고 묻는다. 그리고 또 그것도 대답하면 그걸 왜 했냐고 물으면 된다. 정신적으로 쥐어짜는거다.
군대에서 이걸 당해보기도 했고, 직접 해 보기도 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무한 루프가 완성된다.
그걸 왜 했냐고 했을 때. 이유를 설명하면 그게 잘못된 거냐 잘 한거냐는 물음으로 되돌아간다. 잘못된 거라는 대답이 나오면 그게 왜 잘못된건지 또 묻는다. 미치고 팔짝 뛰는 갈굼이다. 이걸 계속 당하면 울 수밖에 없다.
그럼 왜 우냐? 뭘 잘해서 쳐우냐? 이런 식으로 가면 된다. 이걸 하루에 한 번씩 당하면 자살한다. 물론 이런 극악한 짓거리를 한 적은 없다. 생각만 해봤지.
나는 김정기를 쥐어짠다. 보는 눈이 많아서 분하기는 한데 아무것도 못 한다. 선배에게 화내고 대드는 몰염치한 놈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겠지.
김정기는 내 눈앞에서 거의 십여분을 갈굼당했다. 그걸 왜 했냐는 질문에서 단순히 걱정이 된거니 어쩌니 해서 욕을 또 한 바가지 퍼부어줬다.
이제 그만 하자. 더 갈구면 내 신체적 한계를 시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화가 나서 나를 때려버리면 나도 감당이 안 된다.
“됐으니까 꺼져. 다음부터 눈에 띄지 마, 좆 같은 새끼야.”
“네, 죄송합니다….”
김정기는 자기들 무리로 돌아간다. 뜬금없이 끼어들었던 여자도 돌아간다. 여자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꼰대 티 존나내네 병신 같은 년이….”
“후우….”
꼭 면전에서는 못 하면서 들으라는 듯 말한다. 이걸 가지고 시비를 걸면 분명히 유치하게 나올거다. ‘언니한테 그런 거 아닌데요? 왜요? 찔리세요?’ 이딴 소리나 나올거다. 진짜로 맹세할 수 있다. 너무 속이 보여서 재미있을 지경이다. 아직 어린 탓인지 뭘 해도 제대로 못 한다.
여기에 응수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수단이 있다.
“암내나는 년 냄새나서 코 썩는줄 알았네.”
나는 킥킥 웃는다. 그래. 어차피 다 망했어. 이미 이렇게 해버린 순간 평판 시궁창에 처박히는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눈치 보고 그딴 건 이제 없는거야. 어차피 내 편이 세 명이나 있는데 뭐가 무서워?
“뭐에요? 언니, 저 보고 하신 말이에요?”
뒤통수에 그런 말을 해주자 여자애는 너무나도 손쉽게 반응한다. 자기가 만든 덫에 자기가 걸린 꼴이다.
“어? 너보고 한 말 아닌데? 왜? 찔려?”
웃긴다. 자기가 하려던 걸 그대로 당한 탓인지 그 년의 얼굴이 썩어들어가는 꼴이 볼만하다. 그러고 보니 내 손에는 방향제가 들려있다.
“왜? 나 저기 지나가는 사람보고 한 말인데? 너 냄새나? 이거라도 뿌려줄까?”
칙칙
나는 방향제를 허공에 몇 번 분사한다. 녀석의 표정이 아주 가관이다. 진짜 웃긴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최강의 공격이다. 과대 남자가 여자의 팔을 잡아끈다. 더 분란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진짜…. 하….”
여자가 뭐라고 중얼거리지만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걸어간다. 마음이 무겁다. 이런 짓을 해버렸으니 일단 15학번 사이에 내 입지는 완전히 와장창이다.
그래도 속은 시원하다. 나 자신에게 말해본다.
설원, 잘했어! 그래! 나대로 살아야지!
암내나는 년이 뭐라고 하든 무슨 상관이야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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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 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