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3 가르침 =========================
“매달 한 편씩 단편소설을 쓰세요. 주제는 자유, 삼월은 이제 끝났으니까 사, 오, 유월까지 총 세 편의 단편소설을 쓰게 되실 거에요. 학습평가 및 토론은 매주 화요일, 지금 시간에 여기서 하게 될거에요. 솔직히 어려운 일정은 아니에요. 어렵다면 책을 읽는거겠죠. 비평문을 써오라는 것도 아니고, 감상문을 써오는 것도 아니에요. 간단한 토론 정도만 하면 돼요. 저는 선배를 평가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선배가 그 지식을 습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에서 하는 거에요. 말했듯 시간은 그리 촉박하지 않아요. 피치못할 사정이 있으면 사전에 조율해서 날짜를 조정하거나 하죠.”
속사포처럼 쏴대는 말에 정신을 차릴 틈이 없다. 뭐? 한 달에 한 편씩 단편소설을? 그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이야?
뭐 엄청 열심히 하는 녀석들은 일주일에 한 편씩 써대는 걸 본 적은 있다. 물론 완성도를 떠난 얘기니까.
“천년 전에 구양수라는 사람은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라고 했어요.”
나도 아는 말이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뜻이다. 갑자기 경구 들이밀지 마! 어린애 취급 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나쁘니까.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는 못한다. 솔직히 한정운이 하는 말이 다 일리가 있고, 빼도박도 못 하는 정론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스티븐 킹은 오직 쓰고 읽는 것만이 작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했어요. 그걸 피해갈 수 있는 길은 없어요.”
한정운은 옆에 쌓여있는 책들을 손으로 툭, 하고 내리쳤다. 그리 강하게 친 건 아니지만 무게감이 느껴지는 행동이다.
“많이 읽으세요. 생각하세요.”
그리고 내 앞에 조심스럽게 놓여있는 노트북을 가리킨다.
“그리고 많이 쓰세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이렇게 의미있게 할 수 있는 녀석도 세상에 별로 없을거다.
“그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에요.”
한정운은 강의실 밖을 쳐다본다. 이 시간에 학교에 남아있는 사람은 없다. 문은 항상 열려 있지만 뭐, 술 마시러 가거나 자거나, 집에서 과제를 할거다.
“그 이외의 방식으로 글을 논하는 건 비겁한 짓이에요. 글 쓰는 사람이라는 포즈만 취하려는 같잖은 행동이죠. 현실 타령 하면서 자신의 노력 부족을 부정하고, 글을 포기하는 것이 어른인 양 행동했던 우리들의 수많은 선배들처럼요. 안 그래요?”
한정운은 씨익 웃는다. 멸시하는 듯한 웃음은 명백하게 비웃음이다.
뭐, 그 말에는 나도 동감해. 하지만 한정운이 이렇게 폭력적으로 말하는 걸 나는 처음 봤다. 한정운은 멸시하고 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문학도인 양 허세만 부리던 수많은 선배들을. 그리고 졸업할 때가 되자 글을 포기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봤다. 이상에서 도망치기 위해 그저 핑계가 필요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멸시의 대상에는 당연히 나도 포함된다.
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까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배알이 없는 거겠지. 여기서 싸가지 없다고 뭐라고 해봐야 사과할 성격인 녀석도 아니다.
“너 그러다 등단 못 하면 어쩌려고 그래?”
내가 말하자 한정운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어?”
한정운의 말에 나는 놀란다. 등단이 목표가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말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한정운은 등단 자체가 그다지 고려할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것. 그게 목표가 되어야 해요. 그러니까 우리의 목표에 끝은 없고, 한계도 없어요. 등단이라는 건 어차피 객관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는 심사의 결과물인데. 그런 것에 기뻐하고 슬퍼하는 건 불쌍하지 않아요?”
“불쌍한 놈이라서 미안하네….”
아니, 이제 놈이 아니라 년인가…. 내가 축 늘어지자 한정운은 덧붙인다.
“물론 저도 낙선할 때마다 당연히 기분이 좋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병 주고 약 주냐 이 자식아!”
“흠흠, 논점을 벗어난 이야기는 그만하죠. 제가 제시한 플랜이 마음에 안 들면 하지 않으셔도 돼요,”
한정운은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도 알고 있다. 이걸 해서 나쁠 건 없다. 도움이 되지 않을리가 없다. 한정운이 제멋대로 제시한 거지만 이걸 해서 나에게 손해가 될리가 없잖아. 애초에 많은 독서와 습작은 진부할 정도로 강조되어왔던 사실이다.
고맙다고 절을 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결심과 노력이 부족한 내게, 언제나 필요했던 일이다.
“열심히 해보지 뭐.”
”잘 생각하셨어요.”
한정운은 웃는다. 잘 안 웃는 녀석이 웃는 모습은 신선하고 멋있다.
“쉬엄쉬엄 할 생각은 없으니까 각오하셔야 할 거에요.”
“아…….”
어쩐지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다는 생각도 문득 든다.
오늘은 일단 내가 들고 있는 평론집을 읽는 것으로 정했다. 이 평론집을 다 읽고 다음 주에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몇 페이지 읽지도 않았는데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렵다. 한 페이지에 주석이 기본적으로 두 개씩은 달려있고, 인용구에 적혀있는 책들을 봐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전문가들이란 정말 대단하구나.
이런 생각밖에 안 든다. 한정운은 내 맞은편에서 노트북을 켜고 뭔가 하고 있다.
“너 뭐해?”
내 질문에 학정운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한다.
“과제하죠.”
“너, 네가 한 말이랑 지금 행동이 굉장히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냐?”
소설 쓰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 해도 과제 할 시간은 충분히 난다고 했으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이 자리에서 과제를 하다니!
“모순은 아니죠. 저는 그 책 다 읽었으니까요.”
“너도 소설 써!”
“항상 생각하고, 입학 이후로 매달 한 편씩은 쓰고 있어요.”
“…진짜 재수없어.”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책을 다시 본다. 뭐 저런 놈이 있지?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 저렇게 규칙적으로 사는데다가 심지어 운동까지 한다니. 저건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선준도 저 정도는 아니다.
한정운은 과제를 하고, 나는 책을 본다. 솔직히 과제가 급한 건 아니니까 그리 시간이 촉박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이번에는 급하지 않아도 과제를 전부 해두고 싶었는데….
하지만 뭐, 결국 나에게 중요한 건 과제가 아니라 소설이다.
근성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건 싫지만 피곤한건 피곤한거다. 요즘 거의 일찍 잤더니 이 시간만 되면 졸려온다. 시각은 이제 밤 열 시다. 별로 대화도 안 하고 둘이서 자기 할 일만 하는것도 은근히 고역이다.
나는 한정운을 빤히 바라본다. 글자는 눈에 안 들어오고 피곤하기만하다. 한정운이 집중하는 모습은 무서울 정도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뭔가를 열심히 타이핑하고 옆에 있는 참고서적을 들여다본다. 무슨 과제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은근히 멋지다는 생각도 든다.
“피곤하면 들어가실래요?”
“어? 아…. 그래.”
한정운에게 명령이라도 받는 입장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다. 한정운이 스포츠백에 책들을 다시 넣는다.
“집에 가져다놓고 보세요. 시간이 되면 일 주일에 두 권씩 읽을수도 있을거에요.”
“…….”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보는데요.”
“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이 자식은 정말 배려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다. 나는 스포츠백을 가리키며 말한다.
“너는 이 몸으로 내가 저걸 메고 자취방까지 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책은 무겁다. 수십권이나 되는 책이 들어있는 스포츠백은 드는 것조차 힘들거다. 한정운은 내게 그걸 메고 집까지 가라 말하고 있었다. 이거 진짜 너무하는거 아냐?
“아, 그걸 생각을 못했네요.”
한정운은 커다란 스포츠백을 번쩍 들어올린다. 이건 솔직히 내가 남자였을 때라도 무거울 것 같은데 잘만 들어올린다. 역시 사람은 운동을 해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어, 그…. 고마워.”
“뭐 저도 운동하러 가야 하니까 가는 길이에요.”
한정운이 앞서 걸어간다. 우리는 세미나실 문을 잠그고 경비실에 열쇠를 반납한 뒤 학교를 나온다. 밤거리에는 사람이 많다. 술 마시는 사람들도 많고 이미 취한 사람들도 많다. 사람 많은 거 진짜 싫다.
돈 많이 벌면, 어딘가 한적한 곳에서 살고싶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기에 나는 곧 집에 도착했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집까지 가져다 드릴게요.”
“아냐 됐어. 계단 몇 개 올라가는건데 뭐.”
“그럼 그러세요.”
한정운은 내게 스포츠백을 건넨다. 엄청 무거워서 하마터면 놓칠뻔했다. 방까지 가져다달라고 할까 하다가 결국 혼자 들고 가기로 했다.
집 청소를 안해놔서 엄청 지저분하다. 남자 때였다면 아무렴 어떠랴 싶겠지만 여자가 되고 나니 보여주기 껄끄러운 것들이 좀 있다.
집 앞에서 한정운을 보내고 나는 스포츠백을 받아든 뒤 계단을 낑낑거리며 올라간다. 무식한 자식, 왜 이렇게 많이 가져온거야?
전자식 도어락을 열고 들어가자 난장판이 되어있는 집 꼴이 보인다. 들여보내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속옷은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고, 옷도 마찬가지다. 거실에서는 라면 먹고 치우질 않아서 밥상이 그대로 있다.
이선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리를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라면 냄새가 집안에 배어서 기분이 나쁘다.
“하아….”
나는 낑낑거리며 스포츠백을 가지고 들어와서 책부터 정리한다. 뭐 이렇게 책이 많은거야? 라는 생각을 하다가 역시나 당연하다는 깨달음이 온다.
당연히 책이 많아야 하는거다. 뭐 나도 책이 없는 건 아니지만 거의 다 소설책이고, 이런 인문학 관련 서적은 거의 없다. 애초에 공부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니까.
천재라는 말은 오히려 비난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정운은 노력한 것에 대한 시각과 실력을 얻은거다. 그걸 재능이라는 말로 표현한다는 건 어쩌면 한정운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다.
집을 정리하고 난 뒤에도 좀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리고 여자가 된 뒤에 느낀건데, 담배를 안 피워서 그런 거지만 집에서 여자냄새가 나는 것이 확실히 느껴진다.
여자냄새라는게 대체 뭘까 싶기는 하지만, 진짜로 여자냄새가 난다. 뭐 결국 내 몸에서 나는 냄새겠지만.
나는 향수를 쓰는것도 아니고, 특별히 화장품을 쓰는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나는 냄새가 바뀌었다는 건, 역시나 내 몸에서 여성의 냄새가 난다는 거겠지. 그래도 내 몸에서 나는 냄새를 내가 느낀다고 생각하니까 역시 기분이 이상하다.
괜히 팔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지만 특별한 건 없다. 냄새라는건 어딘가에 머물고 떠났을 때 잔향처럼 남는 것 같다.
이러니까 무슨 페티시라도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아.
“방향제가 없네.”
집에 냄새가 좀 밴 것 같아서 방향제를 뿌리려는데 없었다. 뭐 집 앞 편의점에 가면 파는 거니까 사올 생각으로 다시 집을 나왔다.
돈은 아직 꽤 있다. 정부 지원금이 백여만원 남아있고, 다음 달이면 또 나온다고 하니까 생활 걱정은 별로 없다.
이제 사월이라서 날이 점점 풀리는 것이 느껴진다. 후드티를 입고 있으면 대낮에는 약간 덥다는 느낌도 든다. 그래도 밤에는 여전히 서늘하지만, 예전만큼 춥지는 않다. 계절은 길지만, 환절기는 정말 순식간에 다가온다. 비가 한 번 오나 싶으면 어느 새 계절은 바뀌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니 곧 중간고사도 치러야 한다. 생각해 보니까 끔찍하다. 언제나 시험이라는 건 사람 마음을 괴롭게 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