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62화 (62/224)

00062 가르침 =========================

“빨아서 탈수해줄 테니까 마를 때까지 기다려. 내일 입고 가.”

“내일까지 마를까?”

“뭐, 안 마르면 불편해도 입고 가야지. 옷 가져다줄까?”

박헌영 때와 어쩐지 같은 전개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된거 그냥 자고 가야지. 별 수 없다.

내가 치우겠다고 했지만 이선준은 한사코 자기가 치운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덴 곳이 화끈거리기는 하지만 그렇게 상태가 안 좋지는 않다. 그냥 조금 데인 정도다.

아, 뭘 해도 항상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담배나 피우고 싶은 기분이 간절하다. 이선준이 피우던 담배가 책상에 놓여있다. 이선준은 날 배려하는건지 담배를 피울 때에는 베란다에서 피웠다. 나는 담뱃갑과 라이터를 들고 베란다로 나간다. 창틀이 있어서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내 하의실종 패션을 볼 가능성은 없다.

담배를 하나 꺼내들도 불을 붙인다.

피우지 않고서는 진짜 열이 뻗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한 숨 빨아들이려는 찰나 베란다 문이 열린다.

드르륵

“돈 내고 펴라.”

“어….”

이선준이 내 손에서 담배를 뺏어간다. 몸에 안 좋은 거라니 뭐니 하면 반박할 셈이었는데 돈 내고 피우라니까 할 말이 없다. 이선준은 자기가 담배를 들고 불을 당긴다. 하얀 숨이 훅 하고 뿜어져 나온다.

담배 피우고 싶다.

“하아…. 담배 피우고 싶어.”

“안 받을 때 안 피우는게 답이지.”

“알지만 아는 대로 살 수는 없잖아.”

좀 아슬아슬하기는 하지만 속옷은 안 보인다. 그래서 별다른 생각은 안 든다. 찬바람 때문인지 이 차림으로 있으니 춥네, 한겨울에 치마 입고 다니는 여자들은 춥지도 않나?

내가 계속 빤히 쳐다보자 이선준은 피식 웃으며 피우던 담배를 내민다.

“담배 아깝게 그러지 말고 한 모금 하던가.”

“어? 아….”

어쩐지 순순히 담배를 넘긴다. 예전 같았으면 별 신경 안 썼을텐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다. 나는 담배를 받아들고 한 모금 빤다. 그리고 들이킨다.

뭐, 당연히 기침이 엄청 나온다. 내가 눈물 콧물 빼며 콜록거리자 이선준은 나를 보며 피식 웃는다.

“거 왜 안 되는 걸 자꾸 하려고 해?”

“…어떤 의미에서는 안심이 되네…”

내가 눈물을 닦으며 말하자 이선준은 내 머리에 손을 얹는다. 뒤통수를 슥 쓰다듬는다. 어, 뭐야 이거.

이선준은 자기가 그렇게 해놓고도 놀란 것 같다.

“어….”

“…….”

뭐, 그럴 수도 있지. 깊게 생각하지 말자. 그냥 그럴 수도 있는거다. 그럴 수가 없다는 생각은 들지만 억지로 생각을 구겨넣는다.

그럴 수도 있는거야!

당황하지 말자.

이선준은 세탁기에 내 옷을 넣고 돌린다. 얼룩만 닦아내면 될 것 같은데 빨기까지 하다니, 깔끔한 건지 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지금 영락없이 하의가 없는 차림이다. 앉기도 뭐하고 일어나 있기도 뭐하다. 이선준은 신경 안 쓰는 것 같지만 나를 쳐다볼 때마다 난감한 시선이다. 솔직히 쳐다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라인이기는 하지.

“반바지나 내놔!”

이선준이 거칠게 내 바지를 벗기던 장면이 자꾸 떠오른다. 솔직히 좀 무서웠다. 그런 기세로 덮져온다면 나는 정말 비명을 질러대겠지. 속옷을 보여줬다는 것도 자꾸 짜증난다.

아, 정말 왜 이런 일만 일어나는 걸까.

역시나 나에게 엄청나게 큰 사이즈의 반바지를 입는다. 자고 가는게 확정이라서 나는 침대에 눕는다. 불을 끈다. 이선준은 바닥에 누워있다. 침대에 올라오라고 하고 싶지만 역시나 껄끄럽다.

이선준도, 나도 서로를 시험하게 될거다. 그러니까 싫다.

불을 끄니까 아주 어둡다. 그래도 밤의 잔광 때문에 다른 것들은 식별이 될 법도 한데, 베란다 문을 닫아버린데다가 불빛도 별로 없어서 방 안은 완전한 어둠이다.

나는 눈을 뜨고 있다. 이선준이 누워있는 곳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나는 보고 있다.

어둠 너머에 있을 이선준을 쳐다본다. 자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정말 우리는 시험에 든 걸까? 나는, 너는 시험에 든 걸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이며, 어떤 결과로 가게 될까?

모든 것이 의문이다.

어쩐지, 이선준도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 같다. 서로의 시선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마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선준은 눈을 감고 자고 있을수도 있다.

너는 나를 보고 있나? 나는 너를 보고 있는건가?

하지만 내가 이선준을 보고 있다는 걸, 이선준이 있는 공간을 보고 있다는 걸 들키는 것이 싫다. 갑자기 서로의 시선이 교차한다면, 우리는 그 시선을 어떤 의미로 생각하게 될까?

무섭다. 갑자기 번개라도 쳐서 이 시선이 들켜버릴 것 같다.

나는 눈을 감는다. 술에 들뜬 의식이 점차 가라앉는다.

이선준은 나를 보고 있었을까?

“저기,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는거야….”

이선준이 전역한것도 이제 일 주일이 지났다. 시각은 밤, 나는 비어있는 세미나실에서 뜬금없이 책과 씨름하고 있다.

“나 과제도 해야 하는데….”

“과제가 선배 소설의 질적 향상을 가져오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내 인생의 질적 하락을 불러일으키면서까지 이래야 할 필요가 있냐….”

내가 붙들고 있는 책은 평론집이다. 이것 말고도 책이 엄청나게 쌓여있다. 사르트르를 위시한 니체, 융, 프로이트를 비롯한 유명한 사람들의 저서들이 쌓여 있다.

다 좋다. 인문학적 지식이 문학적 토대가 되는건 부정하지 않는다. 한정운은 어디서 저런 게 났는지 거대한 스포츠백에서 책들을 꺼내고 있다.

“선배의 소설이 좋다고 했지 훌륭하다고 하지는 않았어요. 어디까지나 ‘습작생 수준에서’ 좋다고 한 거에요. 잘 쓰는 습작생으로 남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맞기는 한데 너 너무 가혹하지 않냐….”

한정운에 대한 평가가 나날이 바뀐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를 부르더니 대뜸 ‘소설 잘 쓰고 싶죠?’ 라고 물어왔다. 나야 당연히 그렇다고 했더니 그럼 저녁 먹고 학과 2번세미나실로 오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맞춰진 시간에 왔더니 거대한 스포츠백을 메고 있는 한정운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어디서 열쇠를 받아온건지 잠겨있는 세미나실을 열고 불을 켠 채 이모양이다.

“가혹한 게 아니라 이 정도는 해야죠. 당연한 거 아니에요?”

“도서관도 좋을텐데 뭘 굳이….”

“학습을 할 거에요.”

“학습?”

학습이라니, 그 단어 뜻을 모르지야 않지만 이제와서 학습을 한다는 게 어불성설이다. 너 나를 새내기로 착각하는거 아냐? 나는 사학년이라고! 졸업 예정자야!

“매주 한 권씩 책을 읽을 거에요. 볼륨에 따라서 완급조절을 하는 게 아니라 일주일에 무조건 한 권이에요.”

“야, 너무 가혹하잖아. 인간적으로 그게 가능하겠냐?”

어쩐지 내 목소리 울먹거리고 있어. 군대 후임한테도 안 당했던 가혹행위를 전역한 다음 후배에게 당하고 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내 투덜거림에 한정운은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저 시선 무섭다. 그래, 한정운은 거의 이런 표정이다. 약간 살벌한 듯한 표정이다.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세요?”

“어?”

“지금까지 열심히 하셨어요?”

“아…. 그건 아니지만….”

“열심히 안 한 만큼, 지금이라도 열심히 하세요. 정말 절박하다면, 선배에게 문학이 중요한 거라면 이 정도 노력은 정말. 정말 당연히 해야 하는 거에요.”

원하는 것이 있으면 노력해야 한다. 그건 당연한 말이다. 초등학생도 아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게 마음먹은대로 된다면 이 세상에 가난한 사람은 없고, 저학력자는 없다. 물론 그런 변명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야, 내가 너한테 소설 가르쳐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선배도 알고 있어요.”

“어? 뭘 알아?”

“선배도 선배가 이걸 해서 나쁠게 없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그렇죠? 선배가 학습을 거부하는 이유는 단지 과제 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이 자식 논리는 빈틈이 없다.

“선배는 하루에 몇 시간을 문학을 위해서 할애하고 있어요? 책을 읽거나 소설을 쓴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과제 하느라 시간이 없다는 게 비겁한 변명이라는 건 선배도 잘 알거에요. 남는 시간은 어디에나 있어요. 술 안 먹고, 쓸데없는 짓 안 하면 과제를 아무리 오래 해도 하루에 세 시간은 넘게 남아요. 열두시에 자서 여덟 시간을 잔다고 쳐도.”

맞는 말씀이시다. 반박할 수가 없어. 내가 변명을 하기도 전에 변명할 길을 전부 차단막을 내려놓은 것 같은 날카로움이다.

하지만 이런 강압적인 방식은 싫다. 나는 내가 원해서 하는거지 누가 시켜서 하는 건 정말 싫다.

“다른 것에 신경쓰지 마세요. 오직 하나만 보는 거에요. 선배는 문학을 하러 왔어요. 그 이상의 목적도, 이하의 목적도 없어요.”

그 말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한정운은 나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하는거다. 내 현재에서, 내 슬픔에서, 관계에서 오는 비극에 신경쓸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거고, 띠꺼운 건 띠꺼운거다.

“내 선택의 여지는 없는거냐?”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 앉혀놓고 싶지만, 그래도 이 책들은 전부 읽어볼만한 것들이에요. 뭐, 일단 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니까 커리큘럼을 설명해 보도록 하죠.”

그러면서 녀석은 세미나실에 있는 컴퓨터를 켠다. 컴퓨터가 켜지고, 스크린이 내려온다. 프로젝터가 켜지고 뭔가 나타난다.

“야, 너 설마 피피티까지….”

“뭐든지 본격적인게 좋은 거잖아요. 저도 즉흥적으로 하는게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네요.”

너처럼 열심히 하는 녀석만 있었다면 우리나라는 정말 좋은 나라가 되었을지도 몰라….

피피티는 상당히 짜임새 있게 되어 있었다. 현재 주차에서부터 학습계획을 실행하고, 종강까지 매 주차마다 무슨 책을 읽을지, 무슨 맥락으로 그 책을 선정했는지에 대해서 설명이 이어졌다.

솔직히 어이가 없을 정도이긴 하지만 감동적이다. 내가 뭐라고 날 위해서 이런 섬세한 학습 프로그램까지 만들어?

내 편이 되어준다는 건 절대로 가벼운 의미가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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