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61화 (61/224)

00061 칫솔과 이선준과 나 =========================

고기가 상당히 양이 많아서 안주가 부족할 일은 없었다. 이선준은 햇반까지 데워서 밥이랑 먹었다. 잘 먹어주니까 좋네.

술을 먹기는 하지만 나는 많이 먹지는 않는다. 이선준이 세 잔 마실 때 나는 한 잔 정도 마신다. 그런 템포다. 빈 소주병이 세 병이 되어가고 있다. 이선준과 나는 이야기를 한다. 많은 이야기다. 어쩌면 인간은 이야기하기 위해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쉬지도 않고 할 수 있을리가 없다.

어쩌면 그렇게 할 이야기가 많은지 숨이 찰 정도다. 문학에 대해서, 관계에 내해서, 나에 대해서, 이선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한다.

“솔직히 고민이 많았다.”

“어떤 고민?”

이선준은 술을 한 잔 들이키며 말한다.

“글을 계속 써도 되는가에 대해서.”

“왜?”

“내가 작가가 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부정하지는 않아. 나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고,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오, 대단한 자신감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선준은 소설 잘 쓰니까 그거에 대해서 이견을 내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이 방면에서 자신감이란 필수적이다. 자신감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 스스로가 나를 믿지 않는데, 누가 내 글을 믿고 본다는걸까? 그러니까 자신감이 필요하다. 오만할 정도의 자신감이 필요해.

그런데 뭐가 고민이라는거지?

“그게 내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솔직히 글 써서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이고.”

이선준이 먹고 사는 얘기를 꺼내다니, 글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태도를 보여준 이선준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너무나 믿기 힘든 이야기다.

“결국 살려면 일을 해야 하고, 내 생활을 내가 책임질 수 있어야 하잖아.”

“그렇지.”

“글이라는 것이 내 인생에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너무 크다.”

많이 팔리는 작가는 꽤 많다. 하지만 그건 정말 일부분이다. 어느 분야든 거기서 성공한 사람은 많이 번다. 그건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다. 이선준은 자신이 그런 작가가 될 자신은 없는거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이선준은 한 번 맡은 일은 정말 끝까지 책임지는 성격이다. 다른 직장을 가지고, 그걸 하면서 동시에 글도 쓴다는 건 말로는 쉽다. 하지만 동시에 두 가지에 열정을 쏟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결코 쉽지 않다.

이선준의 고민은 누구나 하는 생각이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이 사학년이 되어서 학교생활을 열심히 하려는 것도 같은 이유다.

취업을 완전히 저버리지 못한다. 말로는 글이 중요하다고 해도, 내 생활이 그것으로 해결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들 취업을 외면하는 척 하면서 학점을 열심히 받는다. 토익 공부를 한다.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온전히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말에 공감한다.

이선준도 전역이 다가오면서 계속 고민했을거다. 고민하고 고민했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계속 문학을 해야 하는건지. 이 길로 가야만 하는지.

하지만 힘들다.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글을 쓰는게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던 날들을 지나왔다. 그것들을 외면하고 갑자기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것은 단순히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일을 넘어 괴로운 일이다.

그건 과거의 자신과 완전히 결별하는 일이다. 병행은 불가하다. 허울 좋은 소리에 불과하다.

과거 때문에 계속 글을 쓴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과거를 거쳐서 만들어진 지금의 나를 완전히 부정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슬픈 일이다.

나는 다른 차원에서 그런 일을 겪었다. 이선준은 세계관과 신념이지만, 나는 육체를 비롯한 그 모든 것이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변해버렸다. 이선준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사실 저번에 휴가 나왔을 때, 그 말 하려고 했다.”

“무슨 말?”

“소설 그만 쓰려고 했거든. 취업해서 취미로 쓰려고 했어.”

“아아….”

포기했던 걸까. 실망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로의 삶을 책임질 수 없다. 온전히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그것을 강제할 이유도, 근거도 없다. 이선준이 그걸 선택했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는 정도로 충분하다.

이선준은 포기한거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쩐지 슬프네.

하지만 이선준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온다.

“그런데 네가 그런 일이 생기고…. 나도 생각이 바뀌었다.”

나와 무슨 상관이라는거지? 이선준은 나를 쳐다본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나는 내 삶을 긍정하기로 했다. 나로 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도 소설 쓰지 않는 나는 전혀 상상이 안 되니까.’

그런 말 했었지, 떠올리니까 엄청 부끄럽네. 나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만약 그 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래도 이 길을 선택할까?

이제는 모르겠다.

“그 말 듣고 나니까 내 고민이 우스워지더라고.”

“뭐가 우스워?”

“너는 나처럼 현실적인 고민이 아니라, 그런 엄청난 일을 겪었는데도 불구하고 소설을 쓰겠다고 했잖아. 솔직히 존경스러웠다. 그 말이 하고 싶었어. 나는…. 말로만 소설을 사랑했던 건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고. 잘 포장된 말과 신념, 논리 같은 것이 중요한게 아니었던거야. 마음 깊은 곳에서, 너는 나보다 소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던거지. 나는 단지 현실적 논리에 흔들렸던 것뿐이고.”

이 아저씨 취했나보다. 눈앞에서 이런 말을 늘어놓으면 누구라도 당황하고, 누구라도 부끄럽다.

얼굴이 빨개지는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선준은 계속 말한다.

“내 고민은 하찮은거야. 너 정도로 진지하게 여기고 있지 않았으면서 그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포장하려고 했던 것에 불과한거야. 내 안에서 소설의 가치를 격하시키면서, 나는 포기해야 할 이유를 찾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선준은 나를 본다. 어쩐지 그 눈빛은 마주할 수밖에 없다. 빛나고 있다고 표현해도 좋다.

“계속 써야겠다고 생각했어. 너를 보고 나서.”

고백은 아니겠지. 태도와 분위기가 딱 그 꼴인데, 말하는 건 소설 얘기라서 굉장히 뜨악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다행이다. 글을 쓴다는 사람이 점점 없어지는 건 슬프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동지가 줄어드는 기분이다.

“너와 글 얘기를 했다면, 그 정도는 해야 너에 대한 예의고, 내 글에 대한 예의겠지.”

글쎄, 예의 때문에 글을 쓰는게 맞는걸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아까 말했던 것처럼, 결국 선택이라는 것은 본인의 몫이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그게 이선준의 선택이라면,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무슨 선택을 내렸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건 하나밖에 없다.

“그래, 잘 생각했어.”

무엇을 선택해도 나는 이 말을 해줬을거다. 이선준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다른 길로 갔어도 나는 그 말을 했을거지만, 솔직한 기분은 그렇다.

역시 기쁘다. 계속 글을 쓴다고 해서.

“수고했어.”

나는 이선준의 잔에 술을 따라준다. 그리고 말한다.

“전역 축하해.”

나는 입을 우물거린다. 그래도 약속한 게 있으니까. 둘이 있을 때는 그렇게 불러주기로 했지만 역시나 입이 안 떨어져서 못 했던 말을 한다. 장난치듯 하려면 할 수 있겠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하려니까 어렵다. 하지만 뭐, 이게 상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선준은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해본다.

“오….빠….”

이선준은 심장이 내려앉은 것 같은 표정이다. 게다가 입이 안 떨어져서 어쩐지 수줍게 말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효과가 이렇게 좋을 줄이야.

“야…. 그거…. 진짜 하지 마.”

“왜? 짜증나? 역겨워?”

내가 장난치듯 묻자 이선준은 고개를 젓는다. 이선준은 내가 따라준 잔을 단번에 들이킨다. 얼굴이 붉다. 술에 취해서 그런건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아니.”

이선준은 그렇게 말하고 혼자 소주를 한 잔 더 따라서 마신다.

“안 짜증나고 안 역겨워.”

이선준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술이 좀 올라오는 모양이다. 이선준은 낮은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말한다.

“그래서 하지 말라는거야…….”

그래, 안 해야겠다.

내 장난이 이선준을 흔들고 있다면, 나는 정말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거였구나. 나는 말한다.

“미안해.”

“그럴 건 없고….”

이래서야 이선준이 나에게 나쁜 짓을 해도 나는 변명할 말이 없잖아. 정말로 조심해야겠다.

술을 좀 더 마시다가 이선준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갈거면 가고… 잘거면 침대에서 자라….”

목소리가 늘어진다. 다른 사람들과 먹을 때에는 항상 각을 잡고 있는데, 나나 박헌영과 먹을 때에는 취하게 먹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이선준이다. 나는 오리고기 남은 걸 다시 끓이고 뚜껑을 덮어놓는다. 테이블도 치운다.

뭐 오늘은 돈 한 푼 안 썼으니까 이 정도는 해줘야지. 이선준은 잠들어 있다. 술에 취하기도 한데다가 머리가 어디에 닿기만 하면 잠드는 성격이기도 하다.

여기서 잘 생각은 없다. 집에 갈거다. 나는 냄비를 인덕션에서 내려놓으려다가 손을 삐끗한다.

“으, 으앗!”

-와당탕!

“아앗! 뜨거워!”

“뭐, 뭐야!”

이선준이 비명소리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로 온다. 엄청 뜨겁다. 달궈진 오리고기가 내 청바지에 튀었다. 행주로 바지를 훔쳐서 괜찮아지기는 했지만 오리고기가 질펀하게 엎어졌다.

“야, 괜찮아? 안 데었어?”

후드티에는 안 튀었지만 허벅지 부분에 튀었다. 조금 튄 것도 아니고 어마어마하게 튀었다. 엄청 뜨겁다. 살이 익는 것 같다.

“야, 빨리 벗어!”

이선준이 내게 벗으라고 말한 주제에 자기가 내 바지를 벗긴다. 아무 생각도 안 든다. 엄청 뜨겁다.

손짓 몇 번에 바지가 훌렁 벗겨진다. 나는 데인 부분을 손으로 꾹 누른다.

“아….. 엄청 뜨거워.”

“괜찮냐?”

그래도 국물 같은 것이 아니라서 화상을 입지는 않은 것 같다.

“미안해….”

주방이 엉망이다. 냄비의 내용물이 전부 쏟아져 버렸다. 이선준은 그건 아무래도 괜찮다는 듯 행주를 적셔서 내 허벅지에 대고 꾹 누른다.

“괜찮아. 괜찮아 별로 안 뎄어.”

“야 물집 생기면 어쩌려고…. 그냥 놔두지….”

이선준의 힐난하는 것 같은 말에 나는 고개를 푹 숙인다. 그냥 도와주려고 한 건데 왜 하는 일마다 이모양이지?

나는 다리를 살짝 벌리고 있다. 벗긴 바지는 내팽개쳐져 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후드티 하나에 팬티만 입고 있는 꼴로 다리를 벌리고 있다. 이선준이 내 허벅지에 행주를 갖다대고 있다.

이거 굉장히 야한 자세다. 이선준은 아주 잠깐, 멍하니 내 속옷을 쳐다본다. 아직 생리가 끝난 게 아니라 생리대를 차고 있다. 그러니까 좀…. 많이 심하게 부끄럽다. 한 대 때리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든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달려왔는데 욕을 할 수는 없다.

“보, 보지 마….”

나는 다리를 좁힌다. 후드티 자락을 내려서 속옷이 보이지 않게 가린다.

“어, 미, 미안.”

이선준은 화들짝 놀란 것처럼 일어난다. 나는 후드티 자락을 꾹 잡고 일어난다.

“내, 내가 치울 테니까 자….”

“너 바지는…. 어떡하려고.”

“아….”

바지 빨아야겠다. 어째 내 청바지는 계속 수난이다. 피가 묻질 않나, 고기 양념을 뒤집어쓰질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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