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0 칫솔과 이선준과 나 =========================
생필품을 좀 더 사고, 우리는 본래 목적이었던 식품코너로 가셔 식재료를 산다. 오리고기랑 양파, 깐마늘, 팽이버섯, 그리고 김치를 산다. 이선준은 쌀을 한 포대 사려고 한다.
“저기, 다 좋은데 혼자 전부 들고 갈거야?”
“어? 네가 좀 들면….”
이선준은 그렇게 말하다가 작고 가녀린 내 몸을 보더니 쌀포대를 내려놓는다. 뭐 큰 포대는 아니지만…. 지금도 짐이 충분히 많다.
필요한 걸 어느 정도 사고 나자 카트는 거의 포화상태다.
“그러고 보니까 식기도 없지?”
“그건 집에서 좀 가져왔어. 수저는 아마 사야 될텐데.”
이선준과 나는 수저까지만 사고 나가기로 했다. 이미 너무 많다. 이것도 다 챙겨갈 수 있을지 걱정되는 수준이다. 이선준은 수저를 두 벌 산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아줌마 아저씨들, 대한민국의 쓸데없이 오지랖 넓은 아저씨 아줌마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애가 어려 보이는데, 사고라도 쳤나?’
‘그거 아녀 대학생. 학생들 동거하는게 하루이틀인가?’
어쩐지 뒷통수가 간지럽다.
나는 카트 위에 놓여있는 수저 두 벌을 쳐다본다. 이선준은 혼자 산다. 수저는 하나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뭐, 손님이 오는 경우가 있으니까 여분의 수저는 당연히 갖추고들 산다. 그러니까 이상한 게 아니다.
이선준도, 나도 말이 없다.
“아, 칫솔 안 삿다.”
이선준은 그렇게 말하고 치약과 칫솔을 사러 간다. 정말 혼자 살려면 필요한 게 의외로 많다. 자질구레한 것에서부터 큼직한 것들까지. 이선준은 칫솔 진열대 앞에서 잠시 멈춰선다. 치약을 얼른 하나 골랐지만 대체 무슨 고민을 하는걸까?
이선준은 칫솔을 카트에 넣는다.
두 개를 넣는다.
어쩐지 그 행동이 의미심장하다. 수저야 그렇다 치더라도 칫솔을 두 개 사는건 이상하다.
“칫솔을 굳이 두 개를….”
“너 자고 갈수도 있으니까.”
이선준의 대답은 심플하다. 나는 당연한 의문을 표현한다.
“자고 갈 생각도 없지만 하루 자고 가는데 칫솔까지 사냐?”
“그럼 나중에 또 자고 가.”
그 말이 가슴을 푹 찌르고 들어온다. 이상할 건 없는 말이다. 친구 사이에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선준은 남자고, 나는 여자다. 이렇게 생필품을 사고, 장을 보는 이런 행동들이 어떻게 비춰지는지 이선준도 나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지금 막 결혼했거나, 막 같이 살기 시작한 연인처럼 보인다. 수저도 두 개, 칫솔도 두 개다. 두 개의 칫솔이다.
하나는 이선준이 쓰고, 하나는 내가 쓴다. 나중에 또 자고 갈 때에도 나는 그 칫솔을 쓸거다.
이선준은 나를 위한 자리를 이 방에 마련해 놓겠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저도 두 벌이다. 감동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친구를 위해서 자신의 방에 그런 물건들을 준비해 놓는 것은, 충분히 감동해야 할 일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동적이지 않다. 어쩐지 두렵다.
우리의 관계가 점차 변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점점 돌이킬 수 없는 어딘가로 건너가고 있다. 나는 이선준을 쳐다본다. 이선준은 말이 없다. 이선준도 느끼고 있을거다.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걸.
이선준이 싫지 않다. 이런다고 해서 부담스러우니까 멀어져야겠다는 식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두렵다.
한정운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한정운은 결국 상처받게 될 거라고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될까?
이미 우리는 변해가고 있다. 그 변한 관계가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될 때. 과연 우리는 서로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까? 이선준은 칫솔을 카트에 넣는다.
겨우 칫솔 따위에 과민 반응하는 걸수도 있다. 칫솔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칫솔은 대체 나에게, 이선준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
두렵다. 모든 것이.
이선준과 나는 돌아와서 짐을 옮겼다. 이선준이 대부분을 들었지만 그래도 엄청 많아서 택시를 바깥에 세워놓고 두 번이나 오르내려야 했다. 밥 한 번 얻어먹고 이런 노동 착취라니, 노동부에 신고라도 해야 할 판이다.
“이거 진짜 너무하는 거 아냐?”
내가 투덜거려 봤지만 이선준은 웃을 뿐이었다. 짐을 다 옮기고 나자 이선준은 생필품들을 정리하고 쓰레기들을 치운다. 나는 오늘의 안주를 만들기 위해 준비한다. 그나저나 집들이 겸 전역파티라고 봐도 무방하네.
나는 간장과 참기름을 비롯한 조미료들을 찬장에 넣어놓고, 쓸 것만 꺼내 놓는다. 양파를 썰고, 마늘을 얇게 썬다. 재료랄 것도 없다. 그냥 넣고 볶고 간만 맞추면 먹을만하다. 고기는 고기다.
“뭐 도와줄 건 없냐?”
짐 정리를 끝낸 이선준이 주방에 기웃거린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원룸은 굉장히 좁다. 그런 곳에서 누가 기웃거려 봐야 방해만 될 뿐이다.
“방해 되니까 저리 가있어.”
“…그래.”
어쩐지, 이 상황이 너무 익숙하다. 이선준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린다. 나도 마찬가지다.
전 여자친구가 요리를 해줄 때 들었던 말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내 실력은 거의 전 여자친구 덕분에 생긴거나 다름없다. 어설프게 도와주느니 비키는게 낫다고 하면서 말했지
‘방해되니까 저리 가.’
이선준도 그 말을 들어본 기억이 있을거다. 그래서 이런 별 것 아닌 상황에도 당황하는거다.
이 분위기 어색하다.
나는 말없이 야채를 썬다. 오래 걸릴 것도 없다. 이선준을 보고 있지는 않지만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된다. 어색하게 앉아서 괜히 공기나 쳐다보고 있겠지.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말한다.
“매운 거 좋아하지?”
“어.”
이선준은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 캡사이신 소스를 산 이유도 그거겠지. 나도 매운 건 그럭저럭 잘 먹는 편이다.
그러고 보니 더 어색해졌다.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이런 거 이 상황에서 어필해봐야 마이너스라고!
아니, 플러스 요소겠지만 플러스 되는게 좋을 게 없으니까 결국 마이너스라는거다. 내 말이 어려운가?
이십분도 안 되어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 사실 요리랄 것도 없으니까. 하기가 어려운거지 막상 하면 그렇게 어려운 건 별로 없다. 김치 같은 것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물론 맛은 보장 못 하겠지만.
맵고 칼칼한 냄새가 퍼진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찬 공기가 들어온다. 나는 냄비 째로 들고온다.
“어?”
“어….”
그리고 나와 이선준은 문제점을 깨닫는다. 생필품을 사러 간 주제에, 냄비받침을 사오지 않았다. 뭐 당연한거다. 생필품이라는 건 워낙 다양하다 보니까 뭘 사든 항상 안 사온 게 있기 마련이다.
“받칠 거 가져와 빨리.”
“어? 없는….”
“책 받치면 되잖아!”
내가 버럭 소리지르자 이선준은 우물쭈물한다. 책을 냄비받침 따위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정신은 충분히 감복할만 하지만, 이거 무겁다고.
“무겁다고!”
힘이 약해서 양손으로 들고 있기도 힘들다. 이선준은 그제야 허겁지겁 책을 한 권 가져온다. 기욤 뮈소의 ‘그 후에’다. 이 와중에도 제일 덜 소중한 책을 가져오다니 이 인간도 웃긴다. 이선준은 자기도 그게 웃긴지 허허 웃는다.
“빨리 먹자.”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힘도 썼더니 그 새 소화가 다 된건지 배가 고프다. 이선준은 고기에 양파, 버섯을 집고 먹는다.
“맛있는데?”
“어째서 의외라는 듯한 그런 반응이 나오는거지?”
설마 맛이 없기라도 할 줄 알았다는거냐.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다.
“그런데 마트까지 갔는데 비싼 거도 아니고 결국 소주냐.”
푸른 소주병을 보고 말한다. 뭐 스카치 위스키나 보드카가 오리고기와 얼마나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쩐지 아쉽네. 이선준은 내가 술을 안 마신다고 선언한 걸 알기에 혼자서 마신다. 나는 고민한다. 하지만 곧 결론을 내린다.
이런 좋은 날에, 혼자 술을 마시게 하는 건 미안하다.
“나도 먹을래.”
“괜찮겠어?”
“얼씨구, 안 괜찮을 건 뭐야?”
나는 잔을 하나 더 가져와서 내 잔에 따른다. 오늘 정도는 괜찮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나 안 먹는다는 거지. 믿을 수 있는 사람과는 얼마든 마셔도 된다.
============================ 작품 후기 ============================
너무 고생하면 불쌍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