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5 시궁창이라도 나만은 내 삶을 사랑해줘야지 =========================
“아, 그게….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미안하면 나가주시죠.”
“아, 예 그럼….”
의사는 도망치듯 병실을 나갔다. 의사가 궁시렁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속이 다 시원했다. 이 사람이 화내는 방식은 나도 좀 닮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화가 나면 소리지르고 얼굴이 빨개져서 헛소리만 지껄이는데, 침착한 표정으로 노려보면서 조용히 말하면 그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서 나오는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잡아뜯어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천천히 논리적으로 말하면 어느 누구라도 기가 죽게 되어 있었다.
“한정운한테 일어났다고 들었다.”
한정운이 말했다 해도 태원시에서 여기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짧은 시간에 올 수 있을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나는 그제야 1인실 캐비닛에서 그가 외투를 벗어 걸어놓는 것을 봤다. 거기에는 군복이 걸려있었다.
“계속 여기 있었어?”
통증이 완화되어가고 있어서 나는 평범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어, 토요일에 왔다.”
내가 금요일 자정에 실려왔을 테니 바로 다음 날 왔다는 얘기였다. 말년휴가가 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내 옆을 계속 지키고 있었다니 뭔가 감동적이었다. 하긴, 이 사람은 원래 그랬다. 한창 집회가 있었을 무렵, 전경들의 체포 속에서 끝까지 학우들을 지켜내려고 맨몸으로 전경들을 막아선 전력이 있었다. 의리와 우정, 이 사람한테 그건 문학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복귀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금요일.”
“전역은?”
“그 다음 주 화요일.”
얼마 안 남았으니까 이럴 수도 있겠지만 피 같은 말년휴가를 나를 위해 썼다고 하니 솔직히 감동이었다. 사나이들의 우정은 이렇게 갑자기 감동적일 때가 있다.
자세한 사정은 이미 들었을 터였다. 물론 나는 아무것도 기억을 못하니 해줄 이야기가 없었다. 오히려 그쪽에서 나에게 알아본 것들을 가르쳐 줬다. 이곳 병원 의사들에게 이것저것 질문해보거나 인터넷 검색을 하고, 심지어는 해외 학술지도 찾아본 모양이었다. 솔직히 주눅들었다. 영문으로 된 학술지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이 인간은 능력자였다. 생각해보면 한정운이나 이선준이나 문학 안 해도 다른거 하면 어디가서 한자리씩은 할법한 인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의학적인 거하고는 별 상관이 없다더라.”
편의상 TS바이러스라고 명명했을 뿐, TS환자에게서 바이러스가 검출되거나 이상한 세균이 검출되는 경우는 없었다. 당연히 전염되는 이유도, 발병하는 이유도 불명이었다. 확실한 것은 단 하나였다. ‘TS발병자에게 다가가거나 신체접촉을 한다고 해서 감염되지는 않는다.’ 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되는 전염방식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생이었다. 발병자가 죽게 되면 그 바이러스는 새로운 숙주를 찾아간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발병자가 죽으면 그 근방에서 다른 발병자가 하나 더 나타났다. 하지만 기생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기생설도 하나의 가설일 뿐 정확히 증명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자 나는 알 것 같았다. 내 앞에서 자살한 TS발병자, 그리고 갑자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는 나를 생각해보면 알 것 같았다. 그 발병자가 죽고, 바이러스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나에게 전이된 것이었다. 이선준은 한숨을 푹 쉬었다.
“재수가…. 없었던 거지.”
“….”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재수가 없었다. 정말 지독할 정도로 없었다. 술에 취해서 날뛰다가 하필이면 TS발병자의 자살 현장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니, 그래서 감염이 되었다니. 누가 들으면 믿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버렸다.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TS발병자는 한 명밖에 없어야 했다. 하지만 TS바이러스는 단지 그것만이 원인이 아닐 터였다. 어디선가 TS바이러스는 계속 감염자를 늘려가고 있었다. 실체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남자다. 하지만 여자가 되었다. 전 지구상에서 몇 명 있지도 않은 발병자들 중에 하나가 나였다. 정말 더럽게도 재수가 없었다.
“하, 인생 참…. 진짜 더럽네…. 대체 나한테 왜 이래?”
이선준은 나에게 힘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건 세상에서 가장 폭력적인 단어였다. 타인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이선준이 항상 해오던 말이었다. 안다는 듯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로 위로하지 않는다. 그저 충고하고, 조언할 뿐이었다.
“담배 있어?”
이 엿 같은 기분 속에서 담배라도 피우지 않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병원 전 구역은 금연구역이다. 따라서 흡연같은건 할 수 없다. 하지만 세상 어디든 그런 법규가 잘 지켜지는 곳은 의외로 없는 법이었다. 우리는 병동 옥상으로 올라갔다. 애초에 이 TS환자용 병동은 시설 자체는 괜찮았지만 병실 자체는 텅텅 비어 있었다. 간호사도 단 한 명 뿐이었다. 내키면 그냥 병실에서 담배를 피워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대한민국이 뭐 그렇지, 겉보기에는 번지르르하지만 안으로 파고들면 막상 별 것 없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온몸에 쑤셨지만 통증은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아픈 것보다도 일단 담배라도 한 대 태우면서 마음을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이것저것 꼬여서 지금 내 정신은 지금 내가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었다. 옆에 누군가 없다면 당장 건물에서 몸을 날려 자살할 것 같았다.
“나 키 작아졌지.”
내가 말하자 이선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에 누워 있을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일어나보니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나는 원래 평균키 이상이었다. 물론 이선준의 키가 크기는 했지만 이렇게 올라다봐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충 가늠해보건대 내 키는 지금 160이하다. 얼굴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잘 기억나지는 않았다. 별로 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계단을 몇 걸음 올라가다가 잠시 쉬어야 했다.
“힘드냐?”
“어…. 아퍼….”
“후우….”
그는 안쓰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한 걸음씩 올라갔다. 고작 한 플로어만 올라가면 되는데 온몸이 아리고 쑤셔서 견딜수가 없었다. 보다못했는지 그가 손을 뻗어 날 부축하려고 했다.
“아냐! 됐어! 내가 올라갈게.”
나는 왠지 꺼려져서 거부했다. 이선준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뭐 알아서 하라는 듯 가만히 있었다. 남자끼리도 충분히 부축은 해준다. 서로 술에 취해서 어깨동무를 하고 자취방까지 흐느적거리며 갔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게 꺼려졌다. 내 기분을 나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나는 덜덜 떨며 계단을 올랐다. 정말 힘들다. 하지만 지금은 담배 한 대가 정말 고팠다. 사실 금단증상이니 뭐니 하는 것보다. 습관 때문이었다. 생각을 할 때에는 항상 담배를 피웠다. 딱히 담배가 사고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습관은 무서운 법이었다.
-덜컹
건물 옥상에서 이선준이 내미는 담배를 한 대 받았다.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았다.
당연히 혹시나 하던 내 예상대로였다.
“켁! 켈룩! 켈룩! 켁!”
“….안 받냐?”
“콜록! 콜록!”
맵다. 맵다기보다 목구멍을 칼로 쑤시는 것 같이 아팠다. 담배를 처음 피웠을 때의 그 기분이었다. 아, 담배도 못 피우는 몸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 세포 단위의 육체 변환이라고 아까 그 싸가지 없는 의사가 설명했다. 당연히 내 폐는 지금 담배를 피우기 전의 폐로 재탄생된 채일 것이다. 그러니 담배가 받을리가 없었다.
나는 한참동안 기침을 했다. 얼마나 기침을 했는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괜찮냐?”
“으으으….”
속이 뒤집어지고 담배연기를 한 모금 들이킨 것만으로도 머리가 핑 돌았다. 환자복만 입고 나왔더니 초봄의 날씨가 춥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흐흐…. 여자 되니까 좋은거 하나 있네.”
“뭐?”
“이제 담배 끊을 수 있겠다! 돈 굳었다! 하하하!”
나는 미친놈. 아니 미친년처럼 건물 옥상에서 세상이 떠나가라 웃었다. 내가 정말 실성한 것처럼 처웃자 이선준은 우울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웃는게 웃는게 아니다. 웃는데 눈물이 난다.
“인생이 강간당한 기분이야….”
이선준은 아무런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위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