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9 기분이 좋은 이유 =========================
의자에 앉아있던 이선준에게 뛰어가서 안겨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이선준은 나를 엉거주춤하게 받아들고 있다. 어떤 감촉이 느껴진다. 가슴 쪽에서, 뭔가가 내 그것을 움켜쥐고 있는 아주 기묘한 느낌이다.
나는 잠깐 영혼이 이 세계를 떠난 것 같다. 나 자신이 객관화된다. 뭐야 이거, 대체 어디에 있는 러브 코미디냐? 엄청 유치하잖아!
“으, 으,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악!”
이선준과 나 둘 다 비명을 지르며 서로 떨어진다. 나는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로 물러난다. 그리고 양팔로 가슴께를 가린다.
“어, 어어어어어딜만져어어어어!”
“미, 미, 미친소리야 무슨! 만지긴 뭘! 내가 뭘 만져!”
“마마만졌잖아! 만졌어 분명! 만졌다고!”
“내, 내가 니껄 왜 만져? 미, 미친 거 아냐? 착각도 정도가 있지!”
이선준의 현실부정과 나의 매도가 오간다. 나는 진짜로 느꼈다. 단순히 닿은 수준이 아니라 진짜 만졌다. 만지고 떨어질 때 어쩐지 틀어쥐는 것 같은 감각도 느꼈다.
“마, 만져도 그냥 닿은거지!”
“거짓말! 분명 만졌거든! 움켜쥐었거든! 거짓말 할거야?”
이선준은 내가 계속 비난하자 고개를 푹 숙인다.
“야, 그건 그냥…. 잠깐 닿은 거잖아….”
“야나 꾹 잡았다고 분명히 느꼈어. 내가 너, 넘어진 건 사고지만 굉장히 고의로 만졌어!”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선준의 오른손이 움찔거리고 있다. 이선준을 믿고 신뢰하는 건 맞지만 이건 분명히 거짓말이다.
“가, 감촉 음미하지 마!”
“무슨! 나는 전혀!”
“닥쳣!”
결국 내가 던진 책의 모서리가 이선준의 이마에 꽂힌다. 나는 내가 던져놓고도 놀란다. 그냥 책이 아니라 양장본이다.
“컥!”
“! 미, 미안! 괜찮아?”
“어…. 윽….”
이선준이 풀썩 쓰러진다. 이거 잘못 맞으면 진짜 큰일나는건데, 감정이 격해져서 나도 모르게 큰일을 낼뻔했다. 이선준은 이마를 싸쥔 채 자빠져 있다. 나는 이선준에게 다가가서 살펴본다. 상처라도 생겼으면 어떡하지?
“괜찮아? 다쳤어?”
“어…. 으으….”
이선준이 골골거린다. 내가 상처를 살펴보려 하자. 갑자기 이선준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내게 손을 뻗는다. 그 손이 나의 어딘가를 확 덮쳐든다.
물컹
“이런 게 만지는거지! 방금은 실수라고!”
미, 미친 놈…. 무슨 말을 하는거야? 이선준은 내 가슴을 한 번 만지더니 손을 뺀다. 나는 머리가 하얗게 표백되어서 꼭 정신이라도 나간 것처럼 된다.
이선준은 내가 넋이 나가 있자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든다.
“야, 야 왜 이래?”
“너, 너, 이…. 이….”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린다. 나는 인상을 확 쓰며 외친다.
“이 미친새끼야아아아!”
짝!
이선준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선준은 장장 삼십분이 넘게 내 앞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나는 열이 엄청나게 받기는 했지만 이선준을 용서했다. 뭐 용서하고 자시고 하는게 웃기긴 했지만, 나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분명히 엄청나게 화가 나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화나지 않는다. 마음은 결국 마음의 문제다. 다른 사람이 했더라면 진짜 죽이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웠을거다. 하지만 머리로는 화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어이가 없다.
그냥 그런 느낌이다. 어이가 없네 이 자식! 그냥 이 정도로 끝나는게 웃기다.
이선준과 나는 다시 방 정리를 한다. 침대 시트도 깔고, 노트북 선도 연결해놓는다. 그리고 가장 놀란 것 카펫이었다.
“대체 원룸에 카펫은 왜 가져온거야?”
얇은 카펫을 밟는 뭐랄까, 폭신한 느낌은 나도 좋아한다지만 원룸에 카펫을 깔아놓는 건 진짜 처음 본다. 이선준은 카펫에 앉아보더니 말한다.
“술 마실 때 좋으라고.”
“에?”
확실히 장판은 좀 피부가 달라붙는 기분도 들고 그래서 싫다. 하지만 그래서 카펫을 준비했다니, 그 이유도 술 때문이라니. 이 인간 정말 술 좋아한다. 술을 좋아하지만 그 환경을 위해서 귀찮게 카펫까지 가져올 줄이야.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선준씨.”
“이 정도 쯤이야.”
이선준과 나는 방을 다 치워놓고 정리한 채 조금 쉬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생리대를 주워서 가방에 넣었다. 이선준은 못 본 척 하지만 못 봤을리가 없다.
“그나저나 너….”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줄래?”
내가 말하자 이선준은 입을 다문다. 정말 짜증난다. 이렇게 부끄러운 일일 줄이야. 생리가 나쁜 건 아니다.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게 내 일이 되니까 어쩐지 부끄럽고 화난다. 무슨 느낌이냐고 물어볼까봐 심장이 벌렁거린다. 이런 거 설명해주고 싶지 않다. 이선준은 내 표정을 보더니 외투를 입는다.
“술이나 한잔 할까?”
“나가서 먹게?”
“아니, 기껏 카펫까지 가져왔는데 여기서 먹지 뭐.”
“그럼 뭐 만들어먹자. 내가 해줄게. 물론 재료비는 본인부담이고.”
“뭘 만들어먹게?”
“일단 가봐야지.”
이선준과 나는 방을 나온다. 박헌영네 집과는 다르지만 이 방도 주방이 꽤 괜찮다. 박헌영네 집처럼 가스레인지가 아닌 건 아쉽지만 그래도 인덕션이 두 개나 있다. 뭘 만들어 먹어도 어지간한 건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선준과 나는 원룸을 나온다. 나는 짐짓 헛기침을 하며 말한다.
“뭐 먹고싶은 거 있어? 내가 할 수 있는거면 할게.”
“묵은지 김치찜?”
“……애초에 불가능한 걸 일부러 생각해서 말한 것 같은데?”
묵은지가 없는데 묵은지 김치찜이 가능할리가 없잖아! 이선준은 잠시 고민하더니 다른 안을 꺼낸다.
“보쌈?”
“못 한다고 말하길 바라는 모양인데, 네 시간 뒤에 먹고 싶으면 해 줄 수도 있겠는걸?”
된장 풀어서 삼겹살 삶으면 나오는게 보쌈이다.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다. 무엇보다 보쌈은 수육도 중요하지만 김치가 더 중요하다. 어디가 꼬여가지고 일부러 안 되는 것만 말하는거야?
“족발?”
“…그냥 사먹으러 가자 이 비뚤어진 자식.”
“아, 알았어. 알았어 뭘 그러냐?”
내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화내자 이선준은 나를 달랜다.
“고기나 볶아먹자.”
자주 먹던거다. 양파와 김치, 마늘에 팽이버섯 넣고 삼겹살 볶아서 먹는거다. 박헌영이 아무렇게나 만들어서 줬던 걸 우리가 먹고는 아주 좋아했던 맛이었지. 고기야 뭐 어디에 넣어도 맛있는거다. 하지만 그거야 이따금 먹던거고
“그럼 오리고기 넣어서 먹자.”
“오리고기?”
“오리고기도 맛있어. 어때?”
“그러지 뭐.”
이선준과 나는 택시를 타고 인근의 대형 할인마트로 왔다. 나ㅡ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어차피 이선준이 택시비를 내는 거니까 그다지 상관하지 않는다. 홈플러스에 들어간다. 이선준이 카트를 끌고 나는 옆에서 걷는다.
“그런데 먹을 거 살거면 정육점이나 농협마트에서 사지 홈플러스까지 올 필요가 있나?”
“생필품 사야할거 아냐.”
오, 그렇다. 방금 생활을 시작한 판국이니 샴푸나 린스, 비누, 바디워시와 같은 물건들이 있을리가 없다.
“군대에서 안 가져왔어?”
“귀찮게 뭘 가져와? 다 내버리고 왔지.”
쿨가이, 돈 아까운 줄 모르는 이 성격만큼은 정말 닮지 말아야겠다. 우리는 생활용품 코너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고른다. 어쩐지 술 마시려고 식재료 사러 왔다가 생필품을 사게 된다. 뭐 사람 일이란 정말 모르는 거니까.
나는 카트에 달려있는 그것을 빤히 쳐다본다. 앞으로 당기면 어린애를 태울 수 있는 그거다. 내가 이선준을 쳐다보며 말한다.
“나 이거….”
“네가 아무리 작아도 못 타니까 그만 쳐다봐.”
“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니. 가끔은 두렵기도 하다.
“샴푸 없지?”
“어.”
나는 샴푸를 아무거나 골라서 집어넣는다. 이선준이나 나나 샴푸고 뭐고 브랜드 따져서 사지 않는다.
“린스는?”
“잘 안 쓰는데.”
“그래도 해야지. 안 그래도 안 좋은거 푸석푸석해지기까지 하면 어쩌려구?”
내 말투 어쩐지 엄마같아. 비누도 사고, 린스도 산다.
“고무장갑 사야돼.”
내가 고무장갑을 찾아서 넣으려고 하자 이선준이 내 손을 제지한다.
“안 돼. 그거 흰색이잖아.”
“뭐 어때?”
“물들면 지저분해보여.”
그러면서 이선준은 빨간색 고무장갑을 두 개 산다. 어쩐지 청결에 관한 것만큼은 진짜 철저하다. 결벽증이 있는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생각해보니 저 흰색 고무장갑, 사는 사람이 있기는 하려나?
“이거 필요하지.”
내가 잡은 건 재떨이다. 친절하게 옆에 방향제도 있다.
“방 안에서 담배 피우면 냄새 나.”
이제는 안 피우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페트병을 담배꽁초로 채우며 살았던 나다. 그 광경이 주는 혐오스러움을 잘 알고 있기에 언젠가 재떨이를 사야지 하면서도 귀찮아서 안 사고 있었다. 그리고 재떨이에서는 그 특유의 담배 쩌든 냄새가 나는데, 그게 얼마나 사람 기분을 잡치게 하는지 잘 알고 있다. 휴지통처럼 생긴 재떨이는 재를 털고, 담배꽁초를 보관하면서 뚜껑을 닫으면 냄새가 안 빠져나오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뭐 필요할텐데 잘 됐네.”
“어지간하면 끊지 그래? 돈도 아끼고 건강도 챙기고.”
나는 이미 끊은 자의 위엄을 담아 말한다. 이선준은 나를 보며 기분나쁘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아주 이때다 싶어서 말하는구만.”
“담배 하나 못 끊어서야 근성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
몸이 바뀌니까 담배 끊는 건 의외로 쉬웠다. 어려웠던 건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었는데, 그 습관도 니코틴을 몸이 요구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정신적인 부분은 워낙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지 담배를 피울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습관이라는 걸 끊는 건 어렵지만 어이없게 사라지기도 하는 법이다. 나는 이선준을 보며 말한다.
“진심으로 말하는거야.”
“뭐가?”
“건강 나빠져서 좋을 거 없잖아.”
“건강 챙길거면 애초에 술부터 안 마시지.”
맞는 말이다. 그래도 나는 한 번 더 말한다.
“그러다 덜컥 죽어버리면 나는 어떡해.”
이선준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진심이다. 이선준이 건강이 나빠져서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정말 슬플거다.
많이 슬플거다. 이런 분위기를 바란 건 아닌데 어쩐지 어색해졌다.
“생각해볼게.”
이선준은 그렇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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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표지를 받았다..... 지죤...... 개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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