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8 기분이 좋은 이유 =========================
대화가 끊기든, 끊기지 않든 좋다.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위로받는다. 이제 이선준이 전역했으니까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다. 누가 욕을 하건, 뒤에서 하건 앞에서 하건 괜찮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셋이나 있는데. 불행할리가 없어.
불행할리가 없잖아.
라고 믿는다. 실현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친구와 스테이크를 먹는 날이 오다니, 어쩐지 출세한 기분도 든다. 심지어 얻어먹는거다.
“별 일 없었냐?”
이선준이 지나가듯 묻는다. 이선준이 전역대기를 하는 그 짧은 새에 많은 일이 있었다. 서혜인이 도움을 요청했고, 정현수를 찼고, 초경을 했고, 정현수를 마주치고, 박헌영의 여자친구를 만나고, 박헌영과 미묘한 일이 있었다.
이것이 모두 금, 토, 일요일에 전부 일어났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절망스럽다.
인생의 밀도가 너무 높잖아. 이렇게 치밀한 서사가 짜여있는 삶도 없을거다.
“하루마다 내가 주인공인 단편소설 하나가 완성되는 느낌이야.”
솔직하게 말하자 이선준은 웃지도 울지도 못한다. 정말 그렇다. 내 하루를 떼어다가 단편소설을 내놔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서사 충분하고, 비극성 충분하고, 감정 충만하다.
“소설가가 되기에 아주 최적의 조건인데?”
이선준의 말에 나는 피식 웃는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거지 소설처럼 살고 싶지는 않거든?”
소설처럼 살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냥 평범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렇게 살면 오래 못 살고 자살할 게 분명해. 나와 이선준은 요리를 다 먹고 나서 미련 없이 일어났다. 그나저나 이 인간, 아직도 군복이다.
나는 전역하고 군복 벗어던지기가 바빴는데 뭐 자랑이라고 이렇게 입고 다니는거지?
“군복 지겹지도 않아?”
내 말에 이선준은 허허롭게 웃는다. 어쩐지 허무한 것 같은 느낌이다.
“내 인생의 한 지점이 영원히 끝나버렸으니까. 그 여운을 느끼는거야.”
“싫지도 않아?”
“싫었어도 내 인생의 한 부분이니까. 소중하게 여겨줘야지. 그러니까 그 여운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군복을 굳이 벗고 싶지가 않네.”
오, 명언이다. 나는 그냥 군복이 짜증나고 엿 같아서 벗어버리려고만 했는데, 이선준은 그래도 자기 인생이었으니까 기억하기 위해서 오늘만큼은 군복을 입고 있겠다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말은 고스란히 나에게도 적용된다. 내 지금이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 내 인생의 한 부분이다. 결국 내 인생이다. 소중하게 여겨줘야 한다. 어쩐지 나 들으라고 한 소리 같기도 하다.
뭐, 과민반응이겠지.
이선준과 나는 레스토랑을 나온다. 시각은 밤이다. 한밤중은 아니고 해가 저문 것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어떡할거야?”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야지.”
“여운을 느낀다며?”
“그건 그거고, 일단 군복은 불편하거든.”
일관적이지 못한 인간 같으니라고, 이선준은 자신의 방으로 향한다. 이선준은 원룸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앞에서 기다린다.
“…뭐 하냐?”
“어? 갈아입고 나와.”
이선준은 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러고 보니 이 상황, 얼마 전에 겪었던 것 같다.
“너 저번에 내가 그랬더니 엄청 화내지 않았냐?”
그러고 보니 그렇다. 그게 아직 저번주에 생겼던 일이라고 생각해보면 놀랍다. 시간이 몇 달은 지나가 버린 것 같은데 아직 저번주에 일어났던 일이라니.
나는 이선준이 나를 따라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엄청 화를 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머뭇거린다. 남자의 방에 들어가는 것이 꺼려진다.
박헌영과의 일도 있었고, 그간 이런저런 경험들이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선준의 어쩐지 부아가 치민 것 같은 표정을 보니 나도 할 말은 없다. 화냈던 주제에 바로 다음주에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니 당연히 이해가 안 되겠지.
그리고 나도 내가 이해가 안 된다. 나는 딱히 의식적으로 피한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문 앞에 멈춰선거다. 이선준은 꼭 화가 난 것처럼 노려본다. 어쩐지 서운하다. 이선준의 성격이라면 내 변화를 알아채고 순순하게 그냥 들어갔다 나올 것 같았는데.
“알았어. 들어가면 되잖아?”
“그래.”
쳇, 이선준 어쩐지 실망이다. 그래도 뭐 방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싫지는 않다.
사실 생리도 안 끝났고, 아직도 좀 아프다. 밖에 돌아다니는 건 싫다.
이선준의 방은 넓다. 이제부터 살기 시작하는 거니까 방에는 특별히 짐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옷장과 침대, 책상, 테이블을 비롯한 물건들이 있고, 누가 옮겨다놨는지 박스가 몇 개 놓여있다. 옷이나 책, 이런 물건들일거다.
이선준은 박스를 열어서 옷을 몇 벌 꺼낸다. 아직 사람 사는 방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야, 온 김에 좀 도와줘.”
“응? 뭘?”
“방 정리좀 하게.”
“에….”
답지않게 방에 들어오라고 종용했던 이유는 이거였냐! 이선준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군복을 갈아입고 나온다. 트레이닝복과 바지가. 이선준은 군복을 세탁기에 넣어놓는다. 군번줄과 고무링 같은 것들을 모아서 옷장 한켠에 놓아둔다.
나는 옷을 벗어놓고 생각날 때 치우는 타입이다. 반면 이선준은 해야 할 일은 그 자리에서 바로 해치운다. 옷을 벗을 때에는 다시 입지 않을 거라면 빨래통에 넣어놓는다. 다시 입을 거라면 개 놓거나 옷걸이에 걸어둔다.
사실 이선준 쪽이 맞는 거지만, 누구나 해야 할 일을 하고 살지는 않잖아. 오히려 내 쪽이 인간적인 거라고. 이선준은 수건 하나를 찢어서 반으로 나눈다. 맨손으로 수건을 찢다니, 저게 가능한가? 이선준의 팔뚝에 힘줄이 불끈거린다. 나 저거 왜 보고 있는거야?
“멀쩡한 수건을 왜 찢어?”
“걸레 있어야 할 거 아냐.”
내 방에는 아직도 걸레가 없는데 이 인간은 정말 청소의 화신이라도 되는건가? 나는 행주를 그냥 걸레 대용으로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안 되는거 알지만….
“그런데 갑자기 걸레는 왜?”
“……사람이 살거면 일단 방부터 닦아야지.”
“그런 거 원래 해주지 않아?”
원룸 입주할 때 청소를 해놓는 걸로 알고있다. 이선준은 무슨 소리 하냐는 듯 반으로 찢은 수건을 싱크대에서 물에 적신다.
“며칠 사이에 먼지 쌓였으니까 닦아내야지. 너 대체 어떻게 사는거야?”
오, 이렇게나 바른생활 사나이라니. 엄마같아. 하지만 뭐 이 인간이 깨끗하게 살겠다는데 내 알바는 아니다. 침대에 앉으려는데 이선준이 내게 꾹 짠 수건(이제 걸레가 될)을 내게 던진다. 뭐야, 이제 걸레가 될거라고 표현하니까 기분 이상해. 평소 내 언어습관이 이렇게나 나빴나?
“어? 왜?”
“밥 내가 사줬지?”
“응.”
“그럼 밥값을 해야겠지?”
이선준이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말한다. 나는 눈앞에 있는 수건을 쳐다본다.
“나는 짐 좀 꺼내고 정리할 테니까 방 닦아.”
“어, 어째서?”
“어째서라니, 내가 너를 굳이 내 방에 데리고 온 이유가 이거 말고 뭐가 있겠냐?”
“…속았다.”
나는 울상을 한 채로 걸레를 든다. 그리고는 방을 닦는다. 원룸이긴 하지만 이선준의 방은 크다. 나는 한숨을 푹 쉰다.
“아 내 인생 가시밭길….”
“이 따위 걸로 무슨 가시밭길이야?”
이선준은 낄낄 웃으며 박스를 뜯는다. 옷만 갈아입는다더니 완전히 속아넘어가버렸다. 이선준은 옷가지와 이불, 책을 꺼내 진열하고 나는 바닥을 닦는다. 나는 방바닥을 닦다보니 결국 이선준의 말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먼지 진짜 많네.”
“당연하지. 너도 방바닥 좀 닦고 살아.”
정말 그래야겠다. 노란색이었던 수건이 회색빛으로 변해간다. 머리카락은 왜 있는거야? 청소 제대로 안 했나보네. 이선준을 책을 정리하다가 방바닥을 닦고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나는 도끼눈을 뜨고 이선준을 노려본다.
“어디 보냐?”
“아, 아니 그냥….”
“이상한 생각했지!”
“뭐, 뭐? 무슨 소리야 이 자식아!”
이선준은 얼굴이 새빨개지며 극구 부정한다. 했네, 했어. 이 원룸은 원룸 주제에 베란다까지 있다. 뭐야, 방 진짜 좋네. 베란다 창에 걸레질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비친다. 충분히 이상한 생각 할만하다. 이거 뭔가….
요염해.
내가 베란다 창문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이선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뭐 이 정도면…. 야한 생각 할 수밖에 없네. 인정한다.”
“안 했다니까!”
이선준이 버럭한다. 근래 들어 이선준의 당황한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허리를 비틀며 이선준을 쳐다본다.
“어때? 뇌쇄적이냐?”
“닥쳐. 어린애같이 생겨가지고.”
이선준은 책꽂이 쪽에 책을 넣는다. 일부러 외면하려는 표정이 역력하다. 쳇, 재미없어.
하긴, 후드티에 청바지 입고 섹시한 척을 해봐야 소용없다. 그런 거라면 슬릿 정도는 입어줘야지. 아슬아슬한 시스루 실크 슬릿을 입고 걸레질을 하는 나를 상상해본다. 오오, 그림 나온다. 내가 남자였다면 정말 코피라도 뿜었겠어. 하지만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역시 그렇다.
무릎 아플 것 같은데.
쳇, 이제는 말 그대로 꼴릴 게 없어져 버렸으니 야한 생각을 해봐도 아무 생각도 안 든다. 내 자신이 그런 모습이라면 매력적이라는 인식은 있지만 흥분된다거나 그러지 않는다.
그럼 이제 내 야한 상상의 대상은 남자라는건가? 그러면 대체 뭘 상상해야 하는걸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건 역시 그거다. 서준영 때의 일이 떠오른다. 야하다면 야한 거지만,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그것밖에 없다.
역겨워.
“욱….”
나는 걸레를 놓치고 잠시 헛구역질을 한다.
“야, 어디 아퍼?”
“아, 아냐….”
이선준이 관심을 보이자 나는 손을 내젓는다. 역시 싫다. 떠올려 봐야 야한 기분은 커녕 기분만 나빠진다. 그럼 조금 더 간접적인 걸로 해보자. 이를테면 그 분위기 같은 것들이다. 떠오르는 건 방금 전 수건을 찢을 때 봤던 이선준의 팔뚝 같은거.
역시 기분나빠.
“으으.”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젓는다. 이번 건 다른 의미에서 기분 나쁘다. 묘하게 내 가슴이 들뜨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근거림이나 설레는 건 아니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뭐랄까, 흐뭇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더 기분나쁘다. 나의 변화가 실감난다.
걸레질을 마치고 나는 침대에 걸터앉는다. 회색빛이 된 수건을 아무렇게나 던져놓는다.
“야, 제대로 정리해 놔야지!”
이선준이 내가 걸레 던지는 폼을 보며 버럭한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선준을 노려본다.
“여기 당신 집이거든요?”
“아, 그러네.”
이선준은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걸레질을 하고 있으니까 잠시 다른 착각이라도 했나보다. 어디까지나 도와주는 입장에서 잔소리를 들어야 할 의무는 없잖아?
“잠깐 같이 사는 거라고 생각해버렸네.”
“같이 살긴 뭘….”
이선준의 말에 나는 흠칫한다. 같이 산다니, 어감이 어쩐지 이상하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같이 사는 건 같이 사는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뭐 동기나 선후배가 방값 아끼려고 같이 사는 것은 왕왕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말을 들으니까 어쩐지….
만약 그런다면 동거잖아.
“도, 도, 동거라니 무슨 그런 망상을! 발칙하잖아?”
“뭐? 동거? 야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잖아!”
“이, 이 변태 저질 싸이코패쓰!”
“야! 변태는 알겠는데 왜 싸이코패쓰가 나오냐?”
“인정했지? 인정한거지?”
“야! 아니라고! 이게 왜 이래 요즘?”
이선준과 나는 한동안 투닥거린다. 나는 주변에 떨어져 있는 것들을 이선준에게 집어던진다. 이선준은 던져지는 것들을 피하거나 쳐낸다. 나는 마구 던진다. 가방에 있는 것도 꺼내서 던진다.
나는 웃으면서 욕하면서 던진다. 어쩐지 웃긴다. 그리고 나는 뭔가를 던지고 나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턱!
이선준이 내가 던진 것을 잡는다. 그냥 반사적인거다.
“어, 어….”
“야 좀 그만! …어?”
이선준은 자신의 손에 잡힌 것을 쳐다본다. ‘좋은느낌’ 이라고 쓰여 있다. 집어던지는 재미에 심취하다 보니 던지면 안 될 것까지 던져버렸다. 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으, 으 내놔!”
나는 이선준에게 달려가 그 손에 들려있는 걸 낚아챈다. 낚아채는 건 성공했지만 황급하게 뛰어가다 보니 걸음이 꼬였다.
“앗!”
균형이 흐트러지고 나는 앞으로 넘어진다. 나는 넘어지면서도 그런 생각을 한다. 이거 정말 말도 안 되게 드라마 같은 장면이네.
포옥
하고, 나는 이선준의 품에 안긴다.
============================ 작품 후기 ============================
인터넷 고장나서 올리는 것도 힘드네 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