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7 기분이 좋은 이유 =========================
이선준은 숟가락을 소리나게 탁 내려놓으면서 말한다.
“너는 지금 설원이 겪고 있는 일이 흥미 본위의 태도로 접근해도 되는 문제라고 보이냐?”
“네? 아 그게….”
“네가 하는 그 말들이 얘한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어쩌라고? 남자가 좋든 여자가 좋든 그건 얘 문제잖아?”
“아뇨, 그게 아니라 언니가 직접 여자가 좋다고 말했다고 하셔서.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에요….”
“그 단순한 궁금즘에 대한 해답을 얻는다고 해서 달라지는게 뭐야? 너는 얘를 후벼파서 무슨 말이 하고싶은건데? 원래 남자였던 사람이 여자가 되었는데, 그래도 여자를 좋다고 하면 그게 웃겨? 재미있어? 너 뭐냐?”
“그, 그냥 신기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이선준이 화를 낸다. 나는 이선준이 화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혜인에게 그렇게 해봐야 결국 나쁜 건 내가 된다. 하지만 서혜인의 그 말은 이선준을 더욱 화나게 했다.
“신기해? 너한테는 단순히 신기한 일이라도 설원한테는 엄청 큰 문제라는걸 모르냐? 신기해서 어쩔건데? 네가 신기해하면 원이 기분이 나아져? 그냥 네 흥미와 호기심이 다른 사람한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안 해?”
이선준이 몰아치자 서혜인은 말이 없어진다.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이선준은 계속 화를 낸다.
“서혜인, 인간적으로 실망이다. 너는 좀 생각이 트인 애라고 생각했는데….”
“그만 해.”
“….”
내가 말하자 이선준은 입을 다문다.
“괜찮아. 그렇게 기분 안 나쁘니까 그럴 필요 없어.”
거짓말이다. 기분 엄청 나빴다. 하지만 서혜인을 계속 몰아세워 봐야 나에게 좋을 게 없다. 그러니까 말리는거다. 솔직히 속 시원하다. 이선준에게 고맙다.
“신기할 수도 있는거지. 그런 거 하나하나에 상처받아봐야 나만 힘들어. 괜찮으니까….”
“흑…. 흐윽!”
서혜인이 운다. 식당에서 밥 먹다가 갑자기 운다. 이거 뭐야…. 진짜 난감하다. 난감하고 짜증난다. 서혜인은 울먹거린다. 나는 이미 서혜인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져 버렸다.
이 눈물도 가짜라는 생각이 든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자신의 실수를 동정으로 덮어버리기 위해서 터뜨리는 울음처럼 느껴진다.
물론 서럽겠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으니 서운하고 슬프고 억울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편의를 위해 우는 건 다르다. 이 녀석은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하고, 자신이 슬퍼하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억울하다는 걸 알리기 위해 우는거다.
“언니, 죄송해요 저는 언니가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줄은 모르고…. 그냥 여쭤본건데…. 정말 죄송해요….”
웃기는 년이네. 그래, 나는 서혜인과 거래를 했다. 이 여자는 그냥 자기가 하기로 한 것만 똑바로 하면 된다. 도와줄게, 니가 이선준과 사귀기 위해서 나를 까내리든 뭘 하든 이해해줄게, 그냥 나에 대한 소문들만 바로잡아주면 되는거야.
역겨운 년, 서혜인을 보며 생각한다.
서혜인은 울고, 나는 서혜인을 달랜다. 이선준은 당황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정말 무섭다. 이선준은 쐐기를 박듯 말한다.
“심하게 말한 건 미안하다. 하지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울지 마라.”
이선준은 밖으로 나가서 담배를 피운다. 뭐야, 진짜 무서워. 그래도 우는 앤데 그렇게 독살스럽게 말할 건 없잖아. 박헌영은 허허 웃는다. 나는 우는 서혜인을 달랜다.
개판이다 정말. 너는 왜 저런 피도 눈물도 없는 것 같은 남자가 왜 좋냐?
아, 저런 모습이 좋은건가?
서혜인도 만만찮은 변태일지 모른다.
서혜인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할 일이 있다며 가버렸다. 누가 봐도 도망치는거다. 우리는 묵묵히 밥을 먹는다. 전보다 더 어색해진 분위기에 말이 없다.
점심을 먹고, 다음 강의를 듣는다. 이선준과 같은 강의다. 이선준은 시간이 없는 탓에 군복도 갈아입지 않고 강의를 듣는다. 정말 강심장이다. 사람들이 쳐다보고, 교수도 쳐다본다. 뭐 얼굴이야 다 아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대단하다.
덩달아 옆에 앉아있는 나에게도 시선이 집중된다. 부담스럽다 정말로.
강의가 끝난다.
“어떡할래? 전역주 해야지?”
내가 술잔 기울이는 시늉을 까딱까딱 해보이자 이선준은 뭐가 웃긴지 실실거리며 웃는다. 뭐야, 뭐가 웃긴거야?
“뭐야,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이게 웃기냐?”
내가 다시 시늉을 해보이자 이선준은 바보같이 웃는다. 웃는 모습이 어쩐지 웃기다. 그래서 나도 웃는다.
“아니, 예전에는 그냥 봤는데, 그 모습으로 그러니까 새롭네.”
“왜, 귀엽냐?”
“입이라도 가만히 있으면 밉지나 않지.”
이선준의 말에 나는 피식 웃는다. 이선준과 나는 이야기하면서 걷는다. 어쩐지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이선준과 있으면 즐겁다. 그것은 이렇게 되어도 변하지 않은 몇 가지들 중 하나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웃고 얘기하는 통에 서혜인이 눈앞에 있는것도 모르고 있었다. 눈이 좀 부어있는 서혜인은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 가버린다. 지나치는 서혜인과 잠깐 눈이 마주쳤다.
나를 좋게 보지 않는 시선이다. 괜히 마음이 울적해진다. 이선준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봤으니 기분이 좋을리가 없다. 내가 경쟁상대가 아닌 걸 알면서도 대체 왜 그러는걸까.
아니 뭐, 불안할테니까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러면 나보고 어쩌라는거야? 네 연애 사업에 도움을 줘야 하니까 나는 이선준과 아예 절교라도 하라는거야?
그딴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마. 기분나빠. 내가 표정이 굳은 걸 본 이선준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
“신경쓰지….”
손이 닿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며 몸을 옆으로 뺐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몸이 닿으면 이렇게 놀라는 것이 당연해져 버렸다. 수업 중에 손끝만 닿아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선준은 나를 보며 말한다.
“아, 미안.”
“아, 아냐. 괜찮아.”
단지 어깨에 손을 올린 정도로 이렇게 되다니, 내가 이상해졌다는 건 나도 잘 안다. 저번에 박헌영 때에는 어쩐지 분위기에 취해서 그렇게 된 거지만, 평상시에는 몸이 닿는 것이 극도로 싫다. 온몸의 솜털이 쭈뼜 곤두서는 느낌이다.
“박헌영 불러서 술이나 마실까?”
내가 억지로 밝은 척 하며 말하자 이선준은 빙긋 웃는다. 쳇, 남자답게 생긴 주제에 부드럽게 웃지 말라고 안 어울리니까.
사실은 잘 어울린다. 그래서 짜증난다. 나한테 그런 웃음 보여줘서 어쩔건데?
이선준은 입을 연다.
“됐어. 둘이 마시자.”
“왜?”
“그냥, 둘이 먹고 싶을 때도 있는거지.”
뭐야 뜬금없이. 이선준의 그 말이 어쩐지 묘하게 다가온다. 어쩐지 당황스러워서 눈을 샐쭉하니 뜨고 이선준을 노려본다.
“유혹하냐?”
“너 자꾸 끼 부리는데 후회한다니까?”
이선준은 피식 웃으며 덧붙인다.
“그리고 여자 좋다는 녀석 꼬셔서 뭐해?”
“아….”
내가 한 말이다. 이선준은 그렇게 말한 뒤 앞서 걸어간다. 내가 한 말이니까 이선준이 그걸 믿는다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쩐지 그 말이 상처가 된다.
그 말에 상처받는 내 자신이 싫다.
이선준과 나는 근처의 패밀리 레스토랑에 왔다. 내가 가자고 한 게 아니라 이선준이 간거다. 나는 자리를 차자 앉으며 말했다.
“뭐야, 전역날이라서 맛있는 거 먹고 싶었던거야?”
“그냥, 안 와본지도 오래됐으니까.”
애초에 패밀리 레스토랑 갈 일이 있으면 얼마나 있을까. 그럴 돈이 있으면 술을 사마시는 탓에 이런 곳에서 먹는건 언제나 낯선 일이다. 이럴거면 아까 서혜인에게 면박 아닌 면박을 줬던 것이 무색해진다.
“뭘 먹느냐보다는 누구랑 먹느냐가 중요하다며?”
내가 은근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이선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누구랑 뭘 먹느냐도 중요한거지.”
“에?”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된다. 하지만 이선준이 서혜인에게 한 말과 지금 한 말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말이다.
뭘 먹든 누구랑 먹느냐가 중요한 거다. 하지만 누군가와 먹을 때에는 그 먹는 것도 중요한거다. 어쩐지 이율배반적이지만 결국 이선준이 하고자 하는 말은 하나다.
나와 먹는 거니까 먹는 것도 중요하다는거다. 어쩐지 묘한 말이다. 기분이 이상하다. 이선준과 나는 스테이크와 필라프를 시킨다. 이선준이 산다고 말한다. 그럼 나야 좋지.
“샐러드바는?”
“지금 시킨 것도 다 못 먹을 것 같은데.”
내 말에 이선준은 웃는다.
“예전 같았으면 어마어마하게 먹었을 텐데.”
“그러게, 먹는 재미가 사라진 점에서도 좀 아쉬워. 조그만 먹어도 배부르다니까.”
입에 왕창 넣어서 먹는 그 맛이 그립다. 입도 작고 속도 좁아서 뭘 먹어도 많이 못 먹는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요리 세 개에 샐러드바도 엄청나게 먹어댔겠지.
요리가 나오는 동안 이선준과 나는 빵을 먹었다. 맛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맛이 있는. 이상한 빵이다.
사실 나나 이선준이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은 잘 안 먹기도 하지만 애초에 안 좋아한다. 가격은 비싸고, 양은 적고 맛은 천편일률적이다. CF에 나오는 것들은 맛있어 보이지만 실제로 먹으면 그다지 특별하달 것도 없다.
이선준과 나는 차라리 이런 걸 먹으려 하면 전문점에 가서 먹는다. 물론 나와 이선준이 그런 곳에 가서 먹은 적은 없다. 연애 하면서나 따로 가봤지. 그러고 보니 이선준과 패밀리 레스토랑에 온 건 처음이네.
여기 온 이유는 단순하다. 그냥 가까우니까 온거다.
이선준과 나는 스테이크를 썬다. 필라프도 먹는다. 음, 사실 싫네 마네 했지만 결국 맛있다. 맛이 없을 수가 없다. 기업형 레스토랑이 연구하는건 결국 맛이다. 자본의 논리에 따르면 그들은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스스로를 혁신한다. 그 혁신의 과정에서 원재료의 단가 후려치기 같은 사악한 행위나, 독점, 과점 등등 문제점은 셀 수 없이 많고, 불량식품을 만들어내는 등 기상천외한 범죄들도 일어난다. 하지만 결국 대원칙은 그거다.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 맛있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평범하게 맛있다. 고기는 맛없기가 힘들잖아.
미디엄레어 스테이크는 질긴 듯 하지만 맛있다. 나는 세 조각 먹고 나서 잠시 숨을 고른다.
“뭐 하냐?”
이선준이 내가 가만히 있자 묻는다. 나는 턱을 매만지며 말한다.
“턱 아파.”
자꾸 질겅질겅 씹어대니까 턱이 피곤하다.
“안 약해진 구석이 없네.”
“멘탈은 강해졌을지도 몰라….”
“슬프게 들리는데.”
“울라고 한 소리야.”
내 말에 이선준은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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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자일리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