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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56화 (56/224)

00056 기분이 좋은 이유 =========================

이선준이 전역했다. 이선준은 화요일 열두시 즈음에 태원으로 왔다. 군복을 입은 채 왔다. 왼쪽 가슴 위에 예비군 마크가 오버로크 되어 있고, 베레모를 쓰고있다.

“으악 냄새!”

“너 맞을래?”

내가 짬냄새 난다며 코를 싸쥐어도 이선준은 웃는다. 전역날이다. 이 날만큼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기뻐해도 되는 날이다. 박헌영도 옆에 있다.

“근데 전역모는 안 받았어?”

군복이 디지털화되어도 군대의 전역모 문화는 사라지지 않은걸로 기억한다. 후임들이 한푼 두푼 보태서 만든 전역모를 쓰고 나오는거다.

“그까짓 거에 돈 쓸 필요 없어. 가뜩이나 돈도 없는 것들인데.”

이선준은 그렇게 말한다. 이선준 성격에 후임들과 사이가 나빴을리는 없다. 한사코 해준다는데 거절한 모양이다.

이선준은 그런 사람이다. 이선준은 기분이 아주 좋아보인다. 우리는 셋이서 점심을 먹으러 간다.

“오빠!”

멀리서 누군가가 이선준을 알아보고 달려온다. 서혜인이다. 서혜인은 같이 잇던 친구들에게 어떤 신호를 보낸다. 아마 그냥 가라는 뜻일거다.

“전역하신거죠?”

“어, 그렇지.”

“축하드려요! 진짜 고생 많이 하셨어요.”

“고맙다.”

“어디 가시는 거에요?”

“밥 먹으러.”

이선준은 뭔가 엄청 무뚝뚝하다. 특히 여자들에게 더 그렇다. 예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연애 하기 싫다는 분위기를 풀풀 풍겨댄다. 뭐 나는 애초에 그런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좀 예외로 치자. 서혜인은 어쩐지 곤란한 표정이다. 서혜인과 내 눈이 마주친다.

마주친다기보다는 서혜인이 나를 쳐다본다.

맞다. 나는 도와주기로 했다.

“아직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래?”

“아, 저 일이 있긴 한데….”

뭐야 이거, 이 말을 기다렸던 것 치고는 어쩐지 뜨뜻미지근한 대답이다. 서혜인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이선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면 나중에 먹자.”

이선준이 지나가려 하자 서혜인은 당황하며 말한다.

“그, 그래도 밥 먹을 시간은 있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럼 가자.”

너무나도 담백한 대답이다. 나는 서혜인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를 쳐다본 건 분명히 내게 도움의 요청을 보낸거다. 밥 같이 먹자는 말을 꺼내달라는 뜻이다. 본인 쪽에서 같이 먹으러 가면 안 돼요? 라고 말하는건 너무 들이대는 것 같으니까.

그래서 말을 꺼냈더니 튕긴다. 내가 보기에는 전혀 안 바쁘고 시간이 널널해 보인다. 그런데 굳이 일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바쁜데 시간을 내는 것임을 어필하려 한다. 진짜 이해할 수 없다. 여자란 때로 이상한 곳에서 자존심을 세운다. 그것이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건가?

여자가 되는 길은 정말 멀고도 험하구나. 나는 저런 심리를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우리는 근처의 백반집으로 향했다. 평범하게 제육볶음, 김치찌개, 된장찌개와 같은 것들을 파는 평범한 식당이었다. 우리는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와 박헌영이 같이 앉았고, 이선준의 옆에 서혜인이 앉았다.

“그래도 제대날인데 근사한 거 드셔야 하는거 아니에요?”

“근사한거?”

“스테이크나 그런거요.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데 가서요. 요 앞에 아웃백 있잖아요.”

이선준이나 나나 박헌영이나 남자들끼리 그런 데 가는 성격은 아니다.

“뭘 먹느냐보다는 누구랑 먹느냐가 중요한거지.”

“아, 네….”

이선준은 은근히 아저씨 같은 면이 있다. 서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혜인은 이선준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박헌영은 애초에 낯을 좀 가리는 성격이고, 나는 어쩐지 불편해서 말이 없다. 이선준은 애초에 과묵하다. 서혜인만 이선준에게 신나서 이것저것 물어댔다.

“일단은 소설 써야지.”

“전역하면 다들 취직 하려고 하던데 오빠는 다르시네요.”

“수업 잘 듣는 정도로 충분해.”

나는 이선준의 태도가 뭘 의미하는지 안다. 이선준은 서혜인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없다. 애초에 무뚝뚝하긴 하지만 서혜인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무뚝뚝하다.

서혜인은 이선준을 왜 좋아하는걸까? 그런 의문이 문득 들었다. 이선준은 딱히 서혜인에게 잘 대해주는 것도 아니다. 둘이 애초에 어떤 친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서혜인은 이선준을 좋아한다.

나는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하게 인기가 있으니까 그런 줄 알았지, 이렇게까지 적극적일 이유가 있나?

하지만 뭐, 그걸 안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는건 없다. 중요한 건 하나다. 서혜인은 이선준을 좋아한다. 내가 보기에 이선준은 서혜인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주문한 메뉴들이 나오고, 우리는 밥을 먹는다.

이선준이 계속 대충 대답하자 서혜인은 말이 없어졌다. 나를 흘끗 쳐다보지만 내가 뭘 해줄 수 있는 게 있겠어. 자기 앞길은 스스로 개척해야지 내가 전부 해결해주길 바란거라면 오산이다.

서혜인은 말이 없다. 표정을 보아하니 화젯거리라도 찾는 것 같다.

그리고 서혜인은 나를 쳐다보더니 입을 연다.

“언니, 현수 찼다면서요?”

“어? 아….”

갑자기 화제가 나에게 넘어온다. 어쩐지 불안하다. 박헌영은 그걸 알고 있었고, 이선준은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어차피 당연한 결과였으니 당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서혜인의 말은 우리 모두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여자가 좋다고 하셨다면서요? 그거 진짜에요?”

“어?”

박헌영도, 이선준도 말이 없어진다. 나는 당황한다. 뭐야 그거…. 그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뭐야?

그 새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퍼졌나 싶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지금 서혜인이 꺼내는 저의도 궁금하다.

어쩌라는거야?

“그래도 몸만 바뀌고 마음은 안 바뀌나봐요?”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거짓말이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걸까? 정현수는 나에게 기만당했다고 생각할거다. 이미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박헌영과 있는 모습을 보여버렸으니까. 하지만 새내기 엠티 때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일학년 사이에 퍼졌을거다.

나는 대체 뭘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서혜인은 나를 보며 웃고있다. 이선준과 박헌영도 나를 쳐다본다. 그 시선이 괴롭다.

어떻게 하라는거야?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내가 여자를 좋아하면 안 되는거야? 여자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좋다고 해봐야 달라질 건 없다. 그리고 애초에 나는 남자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심리적으로 거부감이 든다. 나는 여자도, 남자도 좋아하지 않아. 지금은 그래. 서혜인은 나를 보며 말한다.

“신기하네요. 몸이 바뀌어도 여자가 좋다니, 남자랑 사귈 가능성은 없는거죠?”

서혜인이 이 말을 왜 하는지 알겠다. 나는 알겠다. 서혜인은 방금 본심을 드러내 버렸다. 이 녀석은 지금 불안한거다. 혹시나 내가 이선준과 그런 관계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이선준과 나는 친하다. 이 상태가 되어서도 친하니까 불안할거다. 그래서 쐐기를 박으려는거다. 나는 정신적으로 남자라는 걸, 그리고 여자가 좋다고 말했다는 걸 이선준에게 알려주고 싶은거다.

이선준이 나에게 혹시나 그런 감정을 가질까봐 애초에 단념시키려고 이런 말을 하는거다. 가증스럽고 짜증난다. 역겹다. 서혜인은 내 편이 되어주겠다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서혜인에게 나는 그냥 경쟁자일 뿐이다. 자신보다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는 경쟁자다.

하지만 나는 서혜인에게 마음대로 욕을 하거나 화낼 수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나는 더 힘들어진다.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나는 이미 노출되어 있어서 더 그렇다. 내 평판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나만큼 평판이 나빠지기 쉬운 사람은 없을거다.

그리고 그 거짓말을 유지하는 편이 좋다.

박헌영이, 이선준이 나를 여자로 보는 상황은 싫다. 이 둘 말고도 다른 후배들에게도 그런 소문이 나면 내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접근해오는 사람은 없을거다.

그러니까 부정하는 건 여러모로 나에게 좋지 않다. 차라리 이런 소문이 퍼지면 나에게는 귀찮은 일이 하나 줄어들게 된다. 내가 그렇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남자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접을 테니까. 나는 더 안전해지고, 나는 더 편하게 지낼 수 있다. 이선준이나 박헌영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 쪽의 기대를 아예 안 하게 만들어 버린다면 나로써는 좋은 일이니까.

하지만 어쩐지 인정하기 싫다.

서혜인의 마음대로 놀아나는 것이 분하다.

그래도 내가 선택해야 할 건 하나밖에 없다. 서혜인은 내가 말이 없자 내게 다시 묻는다.

“어때요 언니? 시간이 지나면 바뀌려나?”

“야.”

이선준이 서혜인을 부른다. 서혜인은 이선준을 쳐다본다. 귀엽고 예쁘다. 서혜인은 솔직히 외모는 정말 괜찮다. 서혜인은 이선준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와 박헌영은 알 수 있다.

이선준은 지금 화가 나 있다.

“재미있냐?”

“네? 뭐가…요?”

서혜인은 그제야 이선준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는다.

============================ 작품 후기 ============================

설원이 술을 안마시는건 남들이랑 있을때지 술 자체에 트라우마가 생긴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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