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55화 (55/224)

00055 기분이 좋은 이유 =========================

그래서 소설을 시처럼 써야한다. 나를 위해서, 인간을 위해서. 누군가를 가르치는게 아니라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써야 한다. 한정운의 말은 맞다.

“선배는 신기해요.”

“뭐가?”

“말하는 걸 보면 실천문학이라도 할 것 같은데, 사실 선배가 쓰는 소설은 제 세계관하고 닿아 있잖아요?”

맞는 말이다. 내 글은 정념적이고 서사구조가 빈약하다. 애초에 서사라는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솔직히 나는 한정운의 말대로 소설을 써왔고, 그렇게 쓰고 있다.

“세계관과 문학관은 다를 수 있는거야.”

“그럴 수가 있나 싶지만, 선배는 흉내내는 건 아니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대단하네요.”

실천적 세계관을 가진 주제에 본질적 문학을 한다. 말로 하니까 멋있어 보이지만 그냥 생각 따로 손 따로 논다는 얘기다. 나도 내가 웃기다. 나는 문학으로 현실을 개혁할 생각은 없다.

다만 세상을 인식할 때에는 그런 생각을 한다. 이 세상은 뭔가 잘못되어 있다고, 우리는 불만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입체적이다. 하나의 관념과 사상만으로 존재하는 인간은 없다. 나는 많은 생각을 한다. 한정운도 나와 비슷할거다.

그나저나 한정운이 나보고 대단하다고 한건가?

“뭐야 너, 칭찬도 할 줄 알아?”

“평범하게 할 줄 알아요.”

“자주 좀 해 그럼!”

“타인의 평가에 자신의 가치를 매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너 입바른 소리만 하는거 엄청 짜증나는거 아냐?”

“그러라고 하는건데요.”

이 자식 정말 재수없다.

“내 편이라며? 응?”

“선배는 자극을 줘야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니까 그러는 거에요. 칭찬이 잦으면 나태해지잖아요.”

“…….”

뭐야, 무섭다.

“너…. 나 좋아해? 아니, 좋아했어?”

내가 칭찬에 약하다는 건 며칠 만나서는 모른다. 비난에도 약하지만 칭찬에는 더 약하다. 비난당하면 며칠간 우울하고 화가 나지만 열이 뻗쳐서 열심히 한다. 하지만 칭찬을 들으면 나는 잘하니까! 라는 이상한 생각에 빠져서 놀고먹는다.

이런 나를 알려면 내가 남자였을 때부터 나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 관찰하는게 취미에요.”

“거짓말, 너 뭐야. 진짜….”

“게이는 아니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안심할리가 없잖아. 한정운은 나를 담담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한다.

“선배 소설은 좋아요. 정제되지 않았지만 사람에 대해 항상 생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게 느껴져요. 부럽다는 생각도 들어요. 선배는 제가 가지 못한 곳에 이미 가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니까요.”

“뭐야, 이제와서 나한테 아부해서 달라질 게 뭐라고 그런 소리를 하냐?”

내 말에 한정운은 고개를 젓는다.

“아부를 왜 해요 제가.”

“뭐야…. 그런데 갑자기 왜.”

“지금 선배에게 필요한 게 제 진심이니까요.”

“…….”

“선배는 소설 잘 써요. 잘 쓴다는건 지금까지 구성되어왔던 서사적 글쓰기의 틀에서 벗어나 있고, 낯설고 거칠기 때문에 받아들여지기 힘든 거에요. 무의미하지 않아요. 아직 부족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어요. 어느 방향으로 돋아날지 모르기 때문이에요.”

정형화 되어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다.

여자가 되기 전에 한정운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했던 것과 같다. 이 녀석은 정말로 진지하게 내 소설을 봤다. 그리고 내 소설을 아주 진지하게 평가했다.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쓴다.

지금 듣고 싶었던 말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껏 듣고 싶었던 말이다.

나는 입을 열 수 없다. 어쩐지 나의 소설이, 나의 생각이 인정받은 것 같아서 그렇다.

칭찬을 안 들어본 건 아니다. 하지만 한정운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게 신기하다.

한정운을 특별한 인간이라고 생각해왔다. 후배지만 나보다 높은 단계에 도달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래왔다.

그런 한정운이 내 소설이 자신도 가보지 못한 영역에 도달해 있다고 말한다.

타인의 평가에 자신의 가치를 매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결국 타인과 살아갈 수밖에 없다. 타인의 평가는 때로 절대적이다. 지금 내가 사람들과의 관계에 무진 신경쓰고 사는 것처럼.

나는 내 글이 긍정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린다.

무엇보다 한정운에게. 그토록 싫어하면서 동경해왔던 후배에게 그런 말을 들은 것이 좋다. 솔직히 기쁘다. 바보같다는 걸 알면서도 입가에 웃음이 나온다.

진심을 말해줬으니까 나도 진심을 말해야겠다.

“솔직히 나는 너가 엄청 부러워.”

“뭐가요?”

“머리도 좋고, 열심히 살고, 소설도 잘 쓰잖아. 자기 할 일 제대로 하면서 학교 다니는 애들 별로 없잖아.”

“그렇긴 하죠.”

“네가 특별하다고, 대단하다고 생각해왔어. 하지만 질투하고 엄청 싫어했어. 네가 내 소설을 엄청 비난했을 때. 너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어.”

“그럴 수 있어요.”

한정운과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계속 걷고 있다.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걸까? 학교는 이미 예전에 벗어났다. 나는 한정운을 쳐다보지 않은 채 말한다. 솔직히 이런 말 하는거 부끄럽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알고 있었어. 그 자리의 어떤 누구도 너만큼 내 소설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는 걸. 그렇게 읽은 녀석이 욕하니까 엄청 싫었던 것도 사실이야.”

“지적했던 부분은 사실이에요. 고쳐야 할 부분이죠. 없는 말을 하지는 않아요. 말을 고르고 배제한 것 정도에요.”

“끝까지 미운 자식. 내 말 끝까지 들어.”

나는 한정운의 옷자락을 잡아 세운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한정운에게 고개를 숙인다.

“소설 잘 봐줘서 고마워. 칭찬해줘서 고마워. 솔직히, 너처럼 특별한 사람이 내 소설을 좋다고 하니까 기분 좋아. 엄청나게. 그리고….”

나는 고개를 든다. 울지 않는다. 이건 울만한 일이 아니라, 그저 평범하게 기쁜 일이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네.”

나는 다시 걷는다. 한정운이 따라오며 말한다.

“다르다는 말과 특별하다는 말에 대해서 한 가지 더 할 말이 있어요.”

“뭔데?”

“다르다는 말은 곧 모든 인간을 몰개성화하는 말이죠. 특별하다는 것은 인간을 계급화시켜서 열등과 우열로 나누고요. 제가 다르다는 말을 고집하는 이유는 하나에요.”

이 주제에 대해서 아직 할 말이 더 있을까?

“다르다는 말로 모든 사람들을 같은 시선에서 바라보게 된다면, 모두가 몰개성하게 느껴져요. 모두가 그 다르다는 말 아래에서 하나로 묶여요. 하지만 아주, 아주 역설적인 건….”

나는 고개를 돌려 한정운을 바라본다. 한정운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모든 사람이 같다면, 결국 그 모든 사람이 특별하다는 말과 의미가 같아져요.”

모두 같기 때문에, 모두가 특별하다는 논리다. 내가 부족한 건지 나는 한정운의 논리를 못 따라가겠다. 진짜 선배면서 너무 이해력이 부족한가 싶다.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몇몇의 특별함을 배제하고, 조건과 환경, 사회적 지위를 단순히 다름으로 받아들인다. 그럼 모두는 그저 본질적으로는 같고, 단지 환경의 차이에 의해 달라져버린 사람이 된다. 능동적으로 달라진 것이 아니라. 피동적으로 달라져버린 것이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그 달라짐은 그 자체로 모두를 다시 특별하게 만들어버린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모두의 환경이, 모두의 과거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별함에서 다름의 인정으로, 몰개성화에서 다시 개성화로 넘어가는거다.

하지만 그 특별함은 우열이 아니다. 단지 존재 자체의 유일성을 나타내는 말로 변한다. 나는 한정운을 바라본다.

이 녀석은 대체 어디까지 생각하며 살고 있는걸까. 한정운은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특별한 사람이에요.”

“응.”

나는 그 자아도취에 빠진 것 같은 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한정운은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나는 문득 놀란다. 한정운은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그리고 선배도 특별한 사람이에요.”

논리는 조금 어려웠지만,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같다. 너무나 진부하고, 너무나 많이 나온 얘기다.

인간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은 우열이 없습니다. 다름이 존재할 뿐입니다. 모두가 평등합니다. 모두가 특별합니다.

사람은 평등하다. 같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항상 모두가 특별한 존재라는 말과 같이 쓰인다. 모두가 같다. 모두가 평등하다. 그리고 모두가 특별하다.

너무 뻔해서 설명하는 것조차도 부끄러운 말이다. 모두 이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 넘긴다. 하지만 한정운은 이 모두가 특별하다는 말을,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과 같은 선상에 놓기 위해서 얼마나 고민했던 걸까.

한정운은 모두가 특별하다는 뻔한 말을 하기 위해 긴 사고의 과정을 거친다. 그냥 평범하게 사람은 소중하니까 특별한거야! 이런 논리가 아니다.

당연한 것조차 의심한다. 의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당연한거다. 하지만 그 당연한 것을 하는 사람이 이제는 없다.

그렇게 긴 사고의 끝에 나온 결론을 내게 들려준다. 나와 한정운만 특별한게 아니라, 다른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전부 특별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정운이 특별하다고 말을 건넨 것은 나다. 어쩐지 감동이다.

그래,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언제나 뻔한 말들이다.

기운 내, 힘 내, 잘 할 수 있어. 수고했어. 나는 네 편이야. 필요하면 불러, 무슨 일 있으면 말 해. 아프면 좀 쉬어. 또 보자. 나중에 봐. 재미있었어. 즐거웠어.

뻔한 말들도 전부 생각해보면 뻔한 말이 아니다. 뻔하기 때문에 오히려 감사하고 오히려 더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웃는다.

“알거든?”

낯 간지러운 말은 하루에 두 번 이상 안 한다. 나는 웃으며 말한다.

“밥이나 먹자.”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간다. 왕만두와 분식을 파는 곳이다. 저녁 먹으면서 얘기나 조금 더 해 볼 생각이다. 들어가려는 찰나 한정운이 말을 걸었다.

“저 만두 안 좋아해요.”

“너 역시 짜증나.”

괜히 좋은 기분에 초 치는 걸 보면 역시 한정운은 한정운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한다.

“어른스러운 척은 다 하더니 편식이냐? 따라와!”

내가 팔을 잡아끌자 한정운은 마지못해 끌려오며 말한다.

“기호의 차이를 편식이라는 말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못한 마타도어로 보이는데요.”

“개소리 할래?”

-퍽!

“엇….”

내가 걷어차자 한정운은 벙찐 표정이 되었다. 나는 억지로 한정운을 만두가게에 앉혔다.

“김치랑 고기만두 하나랑 어묵이요!”

주문을 한다. 한정운은 한숨을 푹 쉰다.

“폭력적이시네요.”

“네가 한 말이잖아?”

한정운은 내 소설이 폭력적이라고 욕했다. 뭐 이제 그 감정은 전부 날아갔다. 한정운은 피식 웃는다.

“쪼잔하시네요.”

“보태준 거 있냐?”

나는 실실 웃는다. 한정운도 좋은 놈이다.

“그러고 보니까 결국 기분은 왜 좋았던 거에요?”

아, 그러고 보니 이 주제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지갑에서 뭔가를 꺼내서 보여줬다.

“신분증이 왜요?”

“야 멍청아. 신분증 새로 나온게 도착했다고! 지금까지 신분증 없어서 뭘 사도 가슴 졸였는지 모르지?”

오늘 우편으로 도착한 신분증은 내가 메일로 전송했던 사진이 그대로 입혀져 있다. 어쩐지 얼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아서 이상하지만, 그래도 내 신분증이 생긴거다. 본래의 주민등록 번호 뒷자리가 1이 아니라 2로 시작하니까 어쩐지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 숫자 빼고는 모든 것이 그대로다.

솔직히 이제 술 안 먹는다고는 했지만, 그건 역시 다른 사람이랑 먹을 때 얘기다.

혼자 치킨 먹으면서 맥주 정도는 마셔도 되는거고, 혼자 소주 마시면 된다. 나 혼자 술 먹는 것도 좋아해.

하지만 편의점 갈때마다 이 놈의 어린 외모 덕분에 항상 신분증 검사를 요구받았다. 대학가에서 이래도 되는거냐! 싶지만 트러블 일으키기 싫어서 눈물만 훔쳤던 나날들이 있었다.

이제는 신분증이 있으니까 누가 뭐래도 상관없다!

“그런고로 이 신분증을 내가 얼마나 기대해왔는지 너는 알아야 돼.”

“술 마시고 담배 피울 수 있어서 그렇게 기분이 좋으신 거에요?”

“담배는 아니지만 뭐 그렇지.”

한정운은 얼빠진 표정으로 웃는다. 은근히 귀여운 면이 있다니까.

“오늘은 맥주 마셔야지!”

한정운은 한숨을 푹 쉰다. 뭐 어쩌라고 이 자식아!

============================ 작품 후기 ============================

답은 [신분증]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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