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54화 (54/224)

00054 기분이 좋은 이유 =========================

그래도 오늘은 기분이 좋다.

“자, 오늘 수업은 이걸로 마치고, 다음 주 발제자들은 준비 잘 할 수 있도록.”

한정운의 발제가 끝나고 얼마 뒤 수업이 끝난다. 오늘도 해방이다!

솔직히 이것저것 다 챙겨가며 하려니까 힘들다. 고등학생 때보다 힘든 것 같다. 그 때는 거의 감금되어서 있었지만. 지금은 자유가 있어서 더 힘들다. 하기 싫으면 안 해버리면 되니까 정신적으로 더 고통스럽다고 해야하나.

나는 가방을 챙기고 강의실을 나선다. 한정운이 따라온다.

“기분 좋아보이네요.”

“좋은 일이 있는데 기뻐하지 않을 수가 있나.”

나는 웃으며 말한다. 나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킥킥거린다. 물어봐 줘, 물어봐 달라고! 내가 뭐가 기쁜건지 물어봐!

“…….”

한정운은 말이 없다. 이 녀석, 진짜 사교성 없다. 누가 기분 좋은 일이 있다고 하면 당연히 물어봐 주는게 사람 된 도리 아닌가? 내가 시무룩해져 있자 한정운은 말한다.

“무슨 일이길래 기분이 좋죠?”

“너 그렇게 국어책 읽듯 말하면 내 기분이 나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하냐?”

물어봐 준다는 티 팍팍 내니까 더 짜증난다. 한정운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말한다. 이 녀석은 내게 생긴 좋은 일이 뭔지 다 알고 있다는 태도다. 한정운은 정말 이상하게 아는 게 많다. 마치 마음이라도 읽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일 이선준 선배 전역하는 것 때문에 그러겠죠.”

어? 그게 무슨 소리야?

“뭐야? 무슨 소리야?”

“…아니면 말구요.”

한정운은 고개를 돌린다. 뭐야 이 자식, 내가 기분 좋은게 이선준이 내일 전역하기 때문인걸로 생각하고 있었다니.

“뭐야 너, 나를 무슨 식으로 오해하는거야?”

“아니 뭐, 충분히 기쁜 일일 수 있잖아요? 선배한테 중요한 사람이기도 하고, 일단 제일 친한 친구이기도 하니까 충분히 기뻐할수도 있는거고, 오늘 수업 중에도 계속 웃고 있을 정도의 좋은 일이라봐야….”

이 자식, 지금 변명하고 있다. 한정운이 이렇게 횡설수설 하는 건 처음본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엽다. 이 녀석도 결국 평범한 사람이구나, 전자식 두뇌에 생체 단말을 연결해서 만든 안드로이드인줄 알았다.

어, 이상하게 SF쪽 지식이 나오네.

이것도 역시 박헌영 때문이다. 그 녀석이 추천해준 소설들은 외설물인 경우가 많았지만, 심심찮게 재미있는 것들도 많았다.

“어쩐지 기분나쁜 시선이네요 선배.”

“아니, 그냥 너도 평범하구나 해서. 나는 너가 엄청 특별한 놈으로 보였거든.”

내 말에 한정운은 무뚝뚝하게 답한다.

“특별한 사람은 없어요.”

“네가 그런 말 할줄은 몰랐는데. 너는 선민사상 신봉자처럼 보였거든.”

“다른 조건이 있을 뿐이에요.”

“그거랑 그거랑 대체 뭐가 다른데?”

말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다른 조건이랑 특별함이랑 뭐가 다르다는거야? 결국 의미가 같은데.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가지는 개념 자체가 다른거죠.”

“...무슨 소리야?”

“특별하다는 말 자체는 우월성이 내포되어 있어요. 타인과 나를 특별함과 특별하지 않음, 결국 우열로 나누는 시선은 글 쓰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위험한 방식이에요.”

“…...무슨 말 하는지는 알겠어.”

특별하다는 말은 다르다는 말의 하위 개념이다. 하위 개념이기는 하지만 특별이라는 것은 곧 우월성을 뜻한다. 세상에 특별한 것은 없다. 단지 다른 것이 있을 뿐이다.

나도 그 말을 믿는다. 머리로는 믿는다. 하지만 이 주제에 관해서는 내 마음이 좀 안좋다. 그런 건 사실 허울 좋은 개소리일 뿐이잖아.

“하지만 세상에는 상하적 가치가 분명히 정해져 있어. 외모적 상하관계, 금전적 상하관계, 사회적 상하관계가 정해져 있잖아. 남들보다 더 높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단지 다르다고 표현하는건 이상해. 명백한 우열이 정해져 있는데, 단순히 언어를 ‘특별’ 과 ‘다름’으로 사용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 어떻게 보면 그건 패배주의의 다른 말이야.”

“그렇죠.”

한정운은 순순하게 인정한다.

나보다 외모, 자산, 지위가 명백하게 높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과 나는 다른걸까? 단지 ‘다르다’ 라는 말로 해결되는 문제일까? 그 사람이 특별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만큼은 명백하다.

한정운은 내 말을 인정했다. 하지만 자신이 할 말은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선이 있어야만 해요. 타인과 나를 동등한 가치로 바라봐야만 그 사람의 본질을 직시할 수 있는거에요. 조건은 단지 변수일 뿐이에요. 저는 타인과 나를 우열관계로 경계짓는 태도는 편협한 세계관으로 가게 될 위험성이 있다고 봐요.”

“글쎄, 나는 생각이 달라.”

어떤 면에서는 한정운도 순수주의자다. 하지만 정 반대다. 나와는 거의 대극점이라 할 수 있다.

“특별하다는 개념은 필요한거야. 나와 다른 사람, 나보다 특별하게 태어난 사람, 자란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왜곡된 시선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지? 그게 나쁜걸까? 우리는 다름에 대해서 이해하면 안돼. 다름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모든 이 세상의 부조리를 납득해야만 한다는 거라고. 너와 나는 ‘다르니까’ 그 다름에 이의가 없다는 뜻이잖아? 누군가는 나보다 존귀하고, 나보다 돈이 많고, 나보다 행복해. 나는 당연히 이런 것에 불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왔어. 세상을 발전시키는 건 항상 불만이었고, 문학을 발전시키는 것은 항상 허울 좋은 말이 아니라 불편한 현실의 직시라고.”

“선배 말도 맞네요.”

“나는 네 말이 틀리다고 생각해.”

한정운은 맞다고 하지만 전혀 듣고 있지 않다. 한정운이 맞다고 한건 그냥 그런 뜻이다. ‘너의 세계관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런거다. 이 녀석은 다름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생각이 다른 사람을 설득할 생각이 없다. 이 녀석이 저번에 날 설득하려 했던 건 정말 신기한 일이다.

“글공부하는 사람이 타인의 ‘다름’을 ‘틀림’으로 표현하면 안돼죠.”

“왜 안 돼? 내가 틀리다고 생각하면 틀린거지.”

“저와 선배는 세계관이 전혀 달라요. 이런 이야기를 해 봐야 서로 설득할 수는 없어요.”

“나도 그건 알아. 그냥 짜증나는거야.”

대극점을 보면 짜증난다. 너무 닮은 사람을 봐도 짜증나는 건 마찬가지지만 정반대에 있는 가치관을 좋아할 수 있을리가 없다. 이 나라에서 머리 제일 잘 돌아가는 사람들도 좌우로 나뉘어서 유치원생도 안 하는 드잡이질 하잖아. 나라고 뭐 다를까.

“어쨌든 나는 특별함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는 전제 하에서 그 말을 사용하는게 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봐. 아니, 더더욱 사용되어야 하지. 계급적 사고방식을 위해서.”

“저도 딱히 그 의견에 반발하지는 않아요. 다만 문학에 있어서는 달리 여길 뿐이에요.”

말하지 않아도 대충 알 것 같다.

“인간은 관계와 환경 없이 설명할 수 없는 존재에요. 그래서 그 관계 속에서 인간의 역할, 인간의 슬픔에 대해서 조명하는 문학도 많죠. 하지만 결국 우리가 기억하는 문학은 조금 더 본질에 가까운 거에요.”

한정운은 나를 쳐다본다. 이상하다는 듯한 시선이다.

“시대와 인간, 사회와 인간, 정치와 인간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어요. 그런 것들이 인간을 구성하니까요. 하지만 결국 그런 환경적 요인들을 고려해서 소설을 쓰면, 결국 그 특색을 가진 ‘개인’ 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거에요. 그건 단지 하나의 담론에 지나지 않아요. 의미가 확장되기 어렵죠.”

나도 안다.

“쳇, 너 나 너무 무시하는거 아냐? 결국 네가 하고싶은 말은 그거잖아. 결국 인간의 존재를 탐구하는 쪽이 더 문학의 본질에 가깝다는 거잖아. 내가 말한 건 인간보다는 사회를 조명하는거고. 유명한 고전 작가들은 시대적인 것보다 조금 더 인간에 가까운, 인간에 집중한 소설을 썻고, 그런 것들이 기억된다는 거잖아.”

“세상을 계몽하기 위해 소설을 쓰던 시대는 지났어요. 소설은 이제 목소리가 없어요. 보여주기 위한 글쓰기는 이제 불가능하고, 우리는 시처럼 소설을 써야 해요.”

매스미디어의 출현. 만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

컨텐츠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소설이라는 장르를 누가 얼마나 볼까. 근대소설이 출현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언어적 장르로써의 소설을 제일 역사가 짧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소설을 보지 않는다.

누구에게 물어도 소설을 모른다.

학교 사람들 이외에 내 주변의 어느 누구도 책을 읽지 않는다.

한정운의 말이 허황된 것 같지만, 사실 내 말이 제일 허황된거다. 계급적 사고를 바탕으로 실천문학을 해 봐야 대체 누가 볼까. 그런 걸 보는 사람들은 굳이 실천문학을 보지 않아도 그것들을 이미 알고 있다. 관심이 있을 테니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소설은 목소리가 없다. 닫힌 방에서 혼자 방 안에 떠도는 메아리를 들을 뿐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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