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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52화 (52/224)

00052 고생길 탄탄대로 =========================

삼자대면을 한다면 나는 TS발병자라는 사실을 밝혀야 하고, 박헌영과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대체 어떻게 증명한다는 말일까? 오히려 발병자라서 더 쉽게 의심할 수 있다. 흥미적인 부분에서 그런 짓을 할 수도 있는거 아니냐고 하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나는 그 과정에서 상처받게 될거다.

박헌영은 그걸 걱정한거다. 여자친구에게 어떻게 해명할지, 포기할지는 모르겠지만 박헌영은 내게 상처주지 않는 방향을 택했다.

나는 박헌영에게 너는 누나가 없지 않냐고 말할 수 없었다. 그건 배려니까. 나를 위해 한 배려를 내 스스로 걷어차 버릴 수는 없다. 그건 나쁜 짓이다. 거짓말까지 해 가며, 여자친구와의 심각한 트러블을 감수하면서까지 내가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란거다.

그런 식의 배려를 받을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있다. 박헌영은 나갔다. 누나에게 받을 물건이 있어서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믿지 않는다. 여자친구와 이야기를 하러 나간 거겠지.

박헌영의 부모님은 이혼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그러니까 재혼을 해서 없던 누나가 생길 일도 없다. 나는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린다. 명백한 적의와 분노, 그리고 배신감이 보였다. 남동생의 집에 있는 여자를 보고 그런 눈빛을 할 누나가 있을까? 없다.

박헌영은 정말로, 정말로 좋은 녀석이다. 이선준도 그렇고, 박헌영도 그렇고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어째서 박헌영은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숨긴걸까. 충분히 말해줘도 상관없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어째서 그런걸까.

답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본인의 사정이 있을 뿐이라고 짐작한다.

나는 진심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그 죄책감이 너무 심해서 모든 것을 각오했다. 스트레스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도 있었다. 박헌영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소름이 돋는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면서 하겠다고 한 걸까?

무엇보다 그런 말을 해버린 이상 나는 또 변해버린거다. 죄책감이든 다른 무엇 때문이든 나는 ‘그런 걸’ 마음 속에서 받아들이고 해도 된다고 생각해버렸다. 경험도 그렇지만 생각도 그렇다.

처음이 어렵다. 생각하는 것도 처음이 어렵다. 나는 다음 순간에도, 이런 일이 생기려 한다면 심정적으로 허락해버릴지도 모른다. 이건 나쁜건가? 내가 내 안의 나를 버린다는 건 나쁜건가?

나는 내가 뱉은 말을 후회한다. 박헌영이 울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말이 그렇게 받아들여질지 몰랐던거다. 내가 갑자기 허락해 버리니까 내가 내 안에서 어떤 결론을 내렸다는 것을 알아챈거다. 박헌영은 내가 나를 상처입히는 결정을 내려버린 것에 놀란거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한거야. 박헌영도 그런 말을 꺼내기 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었던 거겠지.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진짜로 화가 난 표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나쁜게 아니다. 박헌영은 결과적으로 나를 이해하고 배려했다. 나는 그것에 감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 같은 건 없다.

몸이 무겁다. 잠이 온다.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몸이 안 일어나진다. 눈꺼풀이 무겁고 천천히 눈이 감긴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그냥 잠들고 싶다. 잠만 자고 싶다. 그 이외에는 무엇도 매력적이지 않다.

잠에서 깬 것은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시각은 이미 밤이다. 이때까지 자버린건가?

“어? 안 갔냐?”

박헌영은 막 일어난 나를 보며 말한다. 뭘 하고 온걸까. 바로 집에 가는 게 맞는 거였는데 너무 피곤하고 몸이 아파서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어? 아…. 졸려서 잤어.”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일어난다. 박헌영은 추워 보인다. 손이 빨갛게 얼어있다. 저 손을 잡아주고 싶다. 대체 어디서 뭘 했길래 손과 코끝이 얼어 터질 때까지 있었던 걸까? 박헌영은 검은 봉지 같은 걸 들고 있다.

박헌영은 평소처럼 쾌활한 표정이다.

“누나가 먹을 거 사줬는데, 같이 먹을래?”

박헌영이 검은 봉투를 들고 말한다. 자고 일어나서 배가 고프지는 않지만 기껏 사온 것 같은데, 먹지 않을 수가 없다.

“잠깐 나 화장실 좀.”

“어, 그래.”

화장실에서 생리대를 교환한다. 비위가 약한 건 아니었지만 기분이 이상하다. 비현실적이다. 나는 밑을 씻고 생리대를 교환한 뒤 다시 입는다. 다행히 새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여자라는 건 정말 불편하고 힘들구나.

이 세상 모든 여자는 남자였던 적이 없으니까 이게 불편하고 귀찮은 거라는 생각도 나처럼은 안 들거다.

박헌영은 사온 음식을 테이블을 펴놓고 부려놨다. 족발이다. 윤기가 자르르 도는 게 정말 맛있어 보인다. 소주도 몇 병 있다. 족발에 소주를 안 먹을 수는 없지만, 술 먹는 건 이제 좀 꺼려진다. 어지간해서는 안 먹을 생각이다.

“나는 술 안 마실래.”

“나만 먹을거야.”

박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헌영은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하지만 억지로 밝은 척을 한다. 농담도 하고, 진지한 이야기도 하며 술을 마신다. 한 잔 두 잔 마실 때마다 박헌영은 점점 더 취해갔다. 박헌영은 술을 그렇게 잘 마시지는 않는다. 나나 이선준의 절반 정도다.

“그게 뭐가 웃겨?”

“야, 웃기지 않아? 진짜 페북에 그런 미친년이….”

박헌영은 내게 캡처된 화면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여자가 러브라이븐가 뭔가를 보러 간 오타쿠들을 찍어서 페북에 올린건데, 그걸 계기로 강제로 덕밍아웃 된 사람들 얘기였다. 여자는 자기가 뭘 잘못한지 모르고 네가 오타쿠인 게 잘못된 거라는 둥 이런 헛소리를 지껄이다가 고소를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게 정의구현이지!”

“그런가?”

그보다 좀 지나치게 붙어있다. 나는 핸드폰 화면을 보는 통에 박헌영의 품 속으로 거의 들어와 있는 꼴이다. 척 봐도 지금 박헌영은 많이 취해있다. 이거 위험해.

“야, 너 엄청 좋은 냄새 난다.”

“어? 미친 무슨 사람 냄새를 맡아 변태처럼!”

내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서자 박헌영은 갑자기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들려서 박헌영에게 딸려갔다. 박헌영은 나를 끌어안는다.

“야, 너, 너 뭐 해. 술 취했냐? 놔!”

내가 소리쳐도 박헌영은 나를 붙잡고 있다. 심장이 미친 것처럼 뛴다. 무섭다. 또 이런 일을 당하는 건가 나는? 마음이 혼란스럽다. 하지만 혼란과 배신감을 느끼기도 전에 박헌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잠깐만.”

“야, 너 울…어?”

박헌영은 울고 있다. 나는 박헌영의 품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멈췄다. 우는 걸 들키기 싫은거다. 이건 성욕이나 그런 게 아니다. 단지 너무 슬퍼서 그러는거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 응?”

잘 해결되지 않은건가. 이 녀석은 대체 무슨 말을 했을까. 무슨 대화를 했길래 술을 마시는 걸까. 왜 우는걸까. 왜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걸까.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이 녀석은 계속 신경쓰고 있었던거다. 자기가 그런 상상을 한 것 때문에 내가 더럽다고 한 것에 대해서.

내가 너무나 쉽게 상처받는다는 걸 잘 알고 있는거다. 그래서 내게 말하지 않는다. 내가 받아야 할 상처를 자기가 대신 받았다.

이렇게나 상냥한 녀석이다. 두렵지 않다. 박헌영이니까. 친구니까 두렵지 않다. 이 녀석이 내게 해준 게 있는데, 내가 무섭다고 밀쳐낸다면 그건 이기적인거다. 나는 박헌영의 품에 엉거주춤하게 안겨서 가만히 있는다. 박헌영은 숨을 억누른 채 울고 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건 뭘까. 이 순간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하나밖에 없다. 달래주는 것밖에 없다.

나는 박헌영의 등을 천천히 쓸어준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해도 의미가 없다. 나는 이제 여자다. 여자라면 누구나 이 상황에서 남자를 안아주고, 등을 토닥여줄거다. 나는 박헌영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린다. 울음은 점차 잦아든다.

박헌영이 나를 밀쳐낸다. 눈자위가 빨갛다. 박헌영과 나는 얼굴이 굉장히 가깝다. 녀석은 나를 뚫어질 듯 노려본다.

녀석은 뭔가 참고 있는 것 같다. 뭐야, 이거,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나도 안다. 나도 알고 있다. 이 1초 뒤의 순간을 나는 알고 있다. 얼굴을 빼면 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마치 무언가가 나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몸이 경직되어 버렸다.

“집에 가라. 나 자야겠다.”

박헌영은 그렇게 말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 작품 후기 ============================

말해따 박헌영은 팡갤러라고....

변태같아 보이지만 사실 젠틀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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