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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51화 (51/224)

00051 고생길 탄탄대로 =========================

나는 털퍼덕 주저앉은 채 그 여자가 나간 방문만을 쳐다보고 있다.

박헌영이 문을 잠궈놓으라고 했던 이유를, 어쩐지 알 것 같다. 그 녀석은 나를 걱정했던게 아니구나.

조금 뒤에 박헌영이 들어왔을 때, 나는 이미 정신착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내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자 박헌영은 황급하게 달려왔다.

“야! 너 왜그래!”

“미, 미미미미미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나는 박헌영에게 고개를 연거푸 숙였다. 나 때문이다. 분명히 싸우게 된다. 싸우지 않을리가 없다. 남자친구 집에 들어갔는데 어떤 여자가 벗은 옷을 막 입고있는 모습을 보게 됐는데, 복장이 터지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냥 나간게 오히려 양반이다. 당장에 욕을 퍼붓고 머리채를 쥐어잡지 않은 걸 보면 그 여자는 정말 인성이 괜찮은 사람이다.

“내,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 응? 내가 TS발병자고, 너랑 나랑 그냥 친구라고 설명하면 될거야. 삼자대면이라도 하자! 그럼 되겠지? 그럼 되잖아?”

내가 반 미친 사람처럼 말하자 박헌영은 당황했다. 나는 박헌영의 옷을 붙잡고 울먹거리고 있다. 아, 진짜 미안하다.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피해를 줘버렸다. 그것도 엄청난 피해를 줬다. 내가 설명한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진짜로 이해 못할 수도 있는거다.

“후우….”

“정말 미안. 내가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야 하는데 내가 미쳤어 정말로…. 무, 문 잠가놔야 했는데…. 미안해….”

“누구 왔다 갔어? 제대로 설명을 해야 내가 알지.”

나는 혼자 떠드는 통에 정작 중요한 건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박헌영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했다.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고, 나와 눈이 마주친 뒤 엄청 화난 것처럼 나가버렸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박헌영은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정말 심각하게 굳었다. 무서울 정도다.

박헌영의 표정이 무섭다. 나는 주저앉은 채 고개를 숙인다. 박헌영의 눈을 마주보고 싶지 않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문만 잠가놨으면 된건데…. 아니, 내가 집으로 갔어야 하는데…. 네 집에 오는게 아니었는데…. 진짜. 진짜 미안해 나 때문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한다. 사과해야 한다. 박헌영이 오라고 하긴 했지만 결국 내 잘못이다. 박헌영에게 여자친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 못한 내 잘못이다. 이 녀석은 연애 얘기를 안 했다. 그래서 당연히 없는 줄로만 생각했다.

내가 나쁘다. 내가 바보다. 몸이 조금 아프다고 해서 문을 안 잠근 내 잘못이다.

“내가 어떻게든 할게. 내가…. 내가 정말….”

“뭘 어떻게 할 건데?”

박헌영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다. 약간 들뜬 목소리만 들어왔다가 이런 목소리를 들으니까 정말 무섭다. 정말 미안하고 너무 미안해서 아프다는 생각도, 서럽다는 생각도 안 든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만나서 얘기하면….”

“그걸 믿겠냐 솔직히….”

발병자인 걸 믿었다 치자.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여자 방에서 있었던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뭘 했는지에 대해서 믿는 것은 전적으로 그 여자의 몫이다. 믿지 않는다면 그걸로 끝이다.

“막말로 나 헤어지면 네가 대신 나랑 만나줄래?”

이게 무슨 소리야.

하지만 박헌영의 목소리는 진지하다.

“나는…. 나는….”

남의 연애를 망쳐버렸다. 박헌영의 중요한 걸 망쳐버렸다.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주제에 민폐를 끼쳤다. 박헌영이 대체 무슨 의도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건 아까 생각했던 것처럼 그것 뿐이다.

“정말, 정말 네가 그걸 원한다면……”

“원한다면?”

“노, 노력…. 노력해볼게. 미안해. 정말 미안해.”

“노력해본다는게 무슨 뜻이야?”

박헌영은 나를 추궁한다. 엄청 화가 난 것 같다. 남자를 만날 자신은 없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게 그것 뿐이라면, 박헌영이 진짜로 내게 그걸 원한다면

나는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것 뿐이니까. 나는 고개를 든다. 박헌영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박헌영이 손을 내 얼굴 쪽으로 가져온다.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무서워.

“너 이런 것도 무서워하면서 하긴 뭘 해? 웃기고 있네.”

“아, 아냐. 노력하면, 노력하면 될거야. 진짜로…. 사귀는 건, 마음은 어렵더라도…. 참아볼 테니까….”

“그럼 가슴 만져도 돼?”

박헌영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욕망보다는 마치 나를 시험하는 것 같은 말투다. 박헌영은 욕망 보다는 지금 화가 나 있다. 하지도 못할 거면서 말을 막 내뱉는다는 식으로 말하는거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다. 진심으로 박헌영이 그걸 원한다면, 나는 그걸 해줄거다.

도움은 못 될 망정 피해를 입혀버렸으니까.

지금 내가 생각해도 나는 지금 정상이 아니다.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져버린 것 같다. 지금 나는 전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짓을 하고 있다.

박헌영에 여자친구와 헤어진다 해도 내 잘못은 아니다. 실제로 부정을 저지른게 아니니까. 하지만 미안한 마음이 너무 크다. 자괴감이 너무 크다. 애초에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 다른 여자 가슴을 만지고 싶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태도 아니냐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는 이를 악문다.

“마, 만져…. 만져도 돼…..”

눈물이 난다. 울 수는 없어. 잘 한 것도 없으면서 울면 안된다. 박헌영이 손을 천천히 내 쪽으로 움직인다. 진짜로 만진다. 만질거다. 이 다음에 갑자기 나를 덮쳐버릴지도 모른다. 만지는 걸로 간단히 끝날리가 없다. 손이 닿기 직전에, 나는 말한다. 아니, 울먹거리면서 애원한다.

“나, 나, 생리 중이니까…. 정말, 정말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 몸에 안 좋잖아. 너도 기분 나쁠텐데…. 끝나고, 끝나고 하면 안 될까?”

“야, 야……”

박헌영의 말투가 바뀌었다. 어쩐지 슬픈 것 같다.

“야…. 내가 미안하다….”

“왜, 왜 그래? 뭐가 미안해?”

박헌영은 나를 보며 당장에 눈물이라도 떨굴 것 같은 표정이다. 미안해 하는걸까? 이 상황에서도 나를 생각해 주는건가?

“지, 진짜 괜찮아. 마, 만지는 것 정도는…. 참을 수 있어. 미안해하지 마,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으니까 괜찮아!”

“그, 그냥 장난치려고 한 건데…”

박헌영은 후회와 슬픔이 뒤범벅된 표정이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웃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울면서 웃고 있다. 박헌영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든다. 마치 스위치를 잘못 눌러버린 사람 같은 표정이다.

“진짜, 진짜 괜찮으니까…. 참아볼게. 나 진짜 괜찮….”

“그만 말해!”

박헌영이 소리쳐서 나는 말을 잊었다. 박헌영은 내 앞에 무릎을 꿇는다.

“지, 진짜 미안해. 장난 친거야 진짜로.”

뭐지. 이게 무슨 상황이지? 뭔가 고약한 장난에 넘어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박헌영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이 자식 왜 갑자기 울지?

“야, 내가 여자친구 있을리가 없잖아…. 그거 우리 누나야.”

“아?”

“우리 누나라고…. 진짜 미안해. 나는 네가 화낼 줄 알았는데 진지하게 그렇게 말할 줄은….”

하고, 뭔가 머릿속에서 끊어져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거짓말이라고? 누나라고?

어이가 없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너…. 너….”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 진짜….”

눈물이 터져나온다. 찔끔거리며 나오던 것이 갑자기 미친 것처럼 폭발한다. 나는 울부짖는다.

“너 미친…. 미친놈아! 너 진짜… 윽! 흐윽!”

눈물이 쏟아진다. 나는 얼굴을 가리고 운다. 이 기분을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나는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박헌영을 때린다. 주먹으로 때린다. 발로 걷어찬다. 박헌영은 울고 있다. 나는 울다 못해 짐승처럼 울음을 내뱉는다.

“으흐흐흑! 미친놈아 너 제정신이야? 너 진짜 미쳤어? 장난이라니! 장난이라니 이 새끼야아아아!”

나는 박헌영을 걷어차고 때린다. 녀석은 움직임이 없다.

“진짜 미안해! 진짜로. 네가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어. 그냥 화 내고 때릴 줄 알았는데. 진짜 미안하다!”

장난이었다. 그냥 나를 약올려주고 내가 화내면 누나라고 밝힌 뒤 적당히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는거다. 하지만 나는 모든 걸 허락할 것처럼 말했다. 말은 이미 뱉어버렸다.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박헌영은 자신의 장난이 불러일으킨 결과 때문에 이렇게 사과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건 미쳤다. 정말 미쳤어.

“죽어. 죽어버려. 진짜로 죽어버려 미친놈아 어떻게 너 같은, 너 같은게!”

나는 박헌영을 때리다가 허물어진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박헌영은 그 자세로 미동도 하지 않는다. 누나였어? 들어온 사람이 누나였다고? 여자친구가 아니라?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나는 모든 걸 허락하려고 했는데, 박헌영은 장난이었다고 말했다.

“너, 너 어떻게 그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진짜, 진짜 미안…. 미안해.”

박헌영은 내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는 박헌영의 머리를 붙잡는다. 머리칼을 쥐어잡는 것이 아니라 바닥으로 꾹 누른다.

“야아아. 미친새끼야아…. 진짜로. 진짜로 어떻게 그러는데!”

박헌영은 미친 놈이 분명하다.

녀석과 나는 오랜 시간을 같이 지냈다.

녀석이 외동아들이라는 걸 나는 기억하고 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할거라고 생각한 걸까.

박헌영은 누나가 없다.

이 녀석은 내게 거짓말을 했다.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나는 오래 운다.

============================ 작품 후기 ============================

다들 반만 맞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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