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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50화 (50/224)

00050 고생길 탄탄대로 =========================

아파, 아파, 아파, 신경쓰이고 아파. 박헌영은 컴퓨터 의자에 앉아서 나를 쳐다본다. 박헌영과 눈이 마주친다. 솔직히 도움을 받았다. 배려도 해줬다. 생리대도 사오고, 당연하다는 듯 속옷까지 사온데다가 생리대 사이즈까지 세심하게 골라왔다.

“고마워.”

“뭘.”

박헌영은 그렇게 말하고 컴퓨터를 켠다. 나는 그런 박헌영을 바라보며 얼굴을 베게에 묻은 뒤 말한다.

“나 부탁 하나면 더 하면 안될까?”

“뭔데?”

“내 방 가서 옷 좀 가져다줘….”

고무줄이 약해서 흘러내리는 바지를 입고 집에 갈 수는 없다. 박헌영에게 정말로 미안하다. 미안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이 이 녀석밖에 없다. 자꾸 이런 도움들을 당연하다 여기는 것 같아서 정말로 미안하다.

“비밀번호 그대로냐?”

“어.”

“바지만 가져다줘?”

“응….”

"갔다 올 테니까 문 잠궈놔"

박헌영은 별 말 없이 나갔다.

비난하지 말아야지. 욕하지 말아야지. 평상시에는 이상하지만 필요할 때에는 이렇게나 믿음직하다니, 솔직히 놀랐다. 좋은 녀석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 도움이 되니까 다르게 보인다.

너무 무시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이선준 만큼이나 친하고, 오래 지낸 녀석이다. 당연히 나를 위해준다.

갑자기 서글퍼진다. 이선준도, 박헌영도 내게 아주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미 두 번이나 배신당한 나다. 그런 나를 믿어주고, 도와주고 있다. 서로를 신뢰한다는 건 정말 중요한거다.

하지만 나는 이선준이나 박헌영에게 줄 수 있는게 없다. 두 사람이 도움이 필요한 처지는 아니지만, 나중에 혹시 무엇으로든 도움을 청해온다면 나는 도와줄 수 있을까? 아니, 두 사람은 이미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받기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도움을 받고, 조언을 받고, 보살핌을 받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받기만 하는 건 불공평하다. 이 관계는 오직 나에게만 유리하다. 친구들에게 도움만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서럽다. 이 불공정한 관계에 박헌영과 이선준이 싫증을 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도 내게 뭔가 원하지 않을까? 이 만큼의 도움을 줬으니, 어떤 것을 바라지 않을까? 내가 줄 수 있는 거라고는….

이 몸밖에 없다.

진짜 그것뿐이다. 내가 가진 것 중에서 박헌영이나, 이선준이 원하는 것은 생각해보면 그것밖에 없다. 원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 그 둘은 남자고 나는 여자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뿐이다. 내가 보답할 수 있는 거라면 그 이외에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미친 척 내 몸을 허락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애초에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내 쪽에서 갑자기 그런 말을 할리가 없잖아. 그런 생각을 하니 자연히 따라오는 생각도 있다.

만약 그들이 원한다면?

이선준이 내게 어느 날 갑자기 나와의 관계를 요구해오면 어떻게 될까?

서준영 때처럼, 설훈의 경우처럼 나는 발악하고 싫다고 몸부림칠까? 그러면 관계는 끝나는거다.

나는 지금 벼랑 끝에 몰려있다. 이선준과 박헌영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것과 마찬가지다. 한정운도 있지만 한정운은 아직 알 수 없다. 어떤 녀석인지 잘 모르겠다. 오랜 시간 함께 있었던 쪽이 당연히 마음이 더 간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는다. 눈물이 난다.

그런 걸 요구당한다면, 나는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그런 일이 오지 않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 둘을 버리고 떠나간다면, 그런 상황을 겪는다면 내가 선택해야 할 건 하나다.

나는 허락할 수밖에 없다.

그 이외에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혼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박헌영과 이선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다. 언젠가 그런 일들이, 그런 말이, 그런 요구가, 그런 필요가 발생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관계라는 건 어떻게 되는걸까.

생각해본다. 나와 이선준이, 나와 박헌영이 그런 관계를 가지고 과연 친구처럼 지낼 수 있을까?

그럴리가 없잖아.

아, 생각이란 건 정말 걷잡을 수 없다. 이런 상상 전부 쓸데없다.

“아아악!”

나는 괜히 소리를 지른다. 머리를 비우기 위해서다. 생리 하면 괜히 짜증난다는데 이런건가? 원래도 예민한데 더 예민해져서 정신병에라도 걸린 것 같다.

생리하는 여자한테 생리하니까 신경질 나냐고 하는거, 내가 정말 싫어하는 태도였다. 그건 사람을 본질적으로 차별하고, 모욕하는 태도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어느 정도 알 것 같기도 하다. 너무 우울하다. 이런 고통을 왜 내가 받아야 하나 싶다. 화가 나는 것에는 이제 지쳐버렸다.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맥이 빠진다. 차라리 이대로 끈 떨어진 인형처럼 무너져버리고 싶다.

피부가 따끔거린다. 온 몸의 감각이 엄청 예민해져서 공기의 흐름마저도 알아버릴 것 같은 그런 예민함이다. 피부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마치 전기라도 흐르는 것처럼 피부가 따끔거리고, 뭔가에 닿기만 해도 찢어질 것 같다.

나는 생리통, 스트레스가 심한 타입이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내 배를 짓누르는 감각, 내 안을 아래로 누르고, 쿵! 쿵! 하면서 치는 것 같다. 진짜 아파, 엄청 아파,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나는 배를 부여잡고 몸을 새우처럼 동그랗게 만다. 왜 이렇게 아픈거야? 왜 아파야만 하는거야? 아이를 낳는다는 건, 낳는 것 뿐만이 아니라 낳는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은 이렇게 아파도 되는거야?

아이를 낳으니까. 오히려 아프지 않아도 되는거잖아.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도 힘든 일일텐데, 평생을 이렇게 아파해야 해? 아이를 낳을 때도 아프고, 낳지 않을 때에도 아파야 한다는 건 너무 슬프잖아. 가엾잖아.

여자라는 건 왜 이렇게 불쌍한걸까.

폭력에 쉽게 노출되고, 성적인 도구로 취급당하고, 생리를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

생물학적인 불리함은 모두 여자가 가지고 있다. 생리를 하면서, 누군가 내 배를 걷어차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나는 깨닫는다. 여자라는 건 불쌍하다. 여자라는 건 비합리적이다. 여자라는 건 슬프다.

여자가 되어서 슬프다.

식은땀을 뻘뻘 흘린다. 생리통은 점차 괜찮아진다. 여전히 아프긴 아프지만 덜 아픈 정도다.

-삑삑삑삑

박헌영이 돌아왔나보다. 그래도 내 방까지 다녀온건데 누워 있는건 실례겠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난다. 일어나려고 하는데 바지가 흘러내린다. 후드티가 길어서 속옷이 보이지는 않지만 이런 꼴 보일 수는 없다. 다시 추겨올리려고 하는데 문이 이미 열린다.

“아….”

“…….”

눈이 마주쳤다. 나는 지금 꼭 벗은 바지를 입으려는 것 같은 애매한 포즈다. 눈앞에는 누군가 날 바라보고 있다.

박헌영이 아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친 상태다.

여자다.

뭐지? 다른 집을 착각하고 들어왔나? 아니, 그러면 애초에 비밀번호를 모르니까 문을 열 수가 없다. 당연히 모르겠지. 이 여자는 박헌영의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여자다. 얼굴은 처음 본다.

“…….”

“…….”

그 여자와 나는 서로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나는 벗은 바지를 지금 막 입으려는 것 같은, 어쩐지 전후가 뒤바뀐 것 같은 자세로, 그 여자는 현관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맥이 빠져서 바지를 입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옆으로 기울어져 털썩 쓰러진다. 남자의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여자. 처음 보는 여자. 당연히 누군지 짐작이 간다.

박헌영의 여자친구인가?

-쾅!

문이 거칠게 닫힌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있다.

어쩐지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 같다. 나는 털퍼덕 주저앉은 채 그 여자가 나간 방문만을 쳐다보고 있다.

============================ 작품 후기 ============================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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