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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4화 (4/224)

00004 시궁창이라도 나만은 내 삶을 사랑해줘야지 =========================

내 눈앞에서 어떤 사람이 떨어졌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몇 있었다. 하늘에서 하얀 형체가 떨어지더니 바로 내 눈앞에서 산산조각이 났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피를 뒤집어쓴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고 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난리가 나고, 구급차가 오고, 경찰차가 오는 등 대소란이 일어났다.

나는 정신도 못 차리고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경찰과 구급대원이 괜찮냐고 묻는 순간 나는 기절했고, 갑자기 온몸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동영상으로 봤으니 나도 알고 있었다. TS바이러스 발작이었다. 그리고 나는 병원에 실려온 것이다.

“야…. 오늘 며칠이야?”

“3월 17일요.”

“어… 뭐?”

뭔가 시간이 지났다. 나는 밤에 쓰러졌고 그 다음 날 일어난 줄로만 알고 있었다. 물론 현대인들은 날짜관념이 희박하고, 나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한정운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어…. 무슨 요일이야 지금?”

“화요일이에요.”

“뭐?”

내가 병원에 실려온지 5일이 넘게 지났다. 나는 줄곧 침대에 자빠져 있었다는 뜻이었다. 녀석은 자신의 은장 손목시계를 바라보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강의가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의사가 제대로 설명해줄 거에요.”

“어, 어…. 그래.”

나는 병신처럼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1인실 문을 열며 말했다.

“자살한 그 사람, TS발병자였던 모양이에요.”

“…….”

녀석은 그 말을 남기고 나갔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온몸이 아파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다. 아까는 너무 놀라서 이곳저곳 만져보기는 했지만, 만질 때마다 아파왔다.

내 눈앞에서 TS발병자가 자살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그 바이러스는 내게 옮겨왔다. 그렇게 받아들여도 되는걸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술 마시고 필름 끊겨서 일어나보니 여자가 되어있었다니,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막장 소설도 이딴 전개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한참동안 고민해도 도저히 무슨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거 하나뿐이었다.

‘가족들한테 뭐라고 말하지?’

엄마, 아빠, 동생을 비롯한 가족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물론 상상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TS바이러스라는 것을 처음 접했을 때,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내가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생각해본적, 당연히 있었다.

그냥 자위나 한 번 해보고, 떡이나 한 번 쳐보고 무슨 느낌인지 알고싶다. 이런 생각만 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자랑 떡친다는 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일이 내게 닥쳐올리 없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딴 상황이 되고 나니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왜, 왜 나인건데….”

눈물이 났다. 이딴 희박한 기적 따위 바란 적도 없고 원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소설을 쓰고 싶었다. 억울했다. 소설도 제대로 못 써서 죽고싶다는 생각, 취직도 당연히 못 하는 인생이라서 안 그래도 시궁창에 빠진 기분으로 매일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제는 지랄 같은 TS라는 이상한 바이러스에 걸려버렸다.

꿈이겠지? 꿈이겠지? 당연히 꿈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깨어나지 않는다. 나는 그대로다. 변한 채로 그대로다. 나는 한참을 울었다. 울다 보니 뭐가 뭔지 모르게 되었다. 내가 지금 TS라는 뭐빠지는 병에 걸려서 이런건지, 아니면 그냥 내 처지가 서러운건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원래 울음이라는 건 그랬다. 울다 보면 결국 운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슬픔의 무게 따위는 눈물을 흘리는 만큼 가벼워진다.

“으윽…. 끅!”

나는 이불을 걷어냈다. 울음의 의미가 희박해지면 자연스럽게 눈물은 멈춘다. 슬프다는 생각만 삼십분 넘게 하는 것은 그 자체로 고역이었다. 울면서도 배가 고프다거나, 화장실 가고 싶다. 담배 피우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게 사람이다. 그런 생각이 드니까.

묘하게 기운이 났다.

“염병할….”

그래도 더러운 기분까지는 없어지지 않았다.

-드르륵

“설원씨, 일어나셨습니까?”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들어왔다. 아마 내가 일어났다는걸 한정운이 말한 모양이었다. 나는 이 병원이 어디에 있는 건지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제복 입고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포심 뭐 그런 비슷한 것이 있었다. 질겁을 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런 사람들 앞에만 서면 괜히 주눅이 들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경찰 앞에만 서면 쪼그라드는 내 새가슴 같은 면을 보면 그렇다. 의사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푸른 옷 입은 외과의사만 보면 해부당할 것 같은 기괴한 공포심마저 들었다.

말했잖아, 나 정상 아니야. 이딴 생각 말고도 병신 같은 면이 수백가지는 더 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 의사를 향해 물었다.

“여기…. 어디에요?”

“진성서울병원입니다. 국내 TS바이러스 발병자들을 위한 병원이죠. 뭐 그래봐야 이 병동 하나뿐입니다만….”

전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기는 했지만, TS환자 자체는 전 세계를 통틀어도 천 명도 안 되는 숫자였다. 뭐든지 느려터진 대한민국에 TS발병자용 전문 병원 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묘하게 날 놀라게 했다.

게다가 서울병원이라고 하니까 정신이 퍼뜩 들었다. 학교는 태원시에 있었다. 태원하고 서울은 못해도 버스로 한 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한정운 그 자식은 아직 개강 중인데 수업을 다 빼먹고 내 옆에 있었던 건가? 4.5이외에는 학점도 아니라는 식으로 학교를 다니던 녀석이?

“제가 왜…. 이렇게 된 거에요?”

“감염된 겁니다.”

“그러니까 왜요?”

“그거야 저도 모르죠.”

그 말에 나는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다. 의사는 나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갑자기 화가 났다.

“전문 병원이라면서요? 그…. TS환자들 전용으로.”

“그거야 그냥 병동만 지원해주는 거죠. TS환자들이 많아봐야 얼마나 많겠어요? 애초에 나라에서 정해준 시설에 의료병동 하나만 신설해놓고 대충 구색만 갖춘 거에요. 그리고 저는 정신과 전문의고 내과나 외과쪽이 아니에요. 에휴, 저도 그냥 여기저기 떠밀리다가 온 거라서 별로 저한테 책임감 같은 걸 기대하지는 말아주세요.”

“…의사 맞아요?”

굉장히 싱겁고 불친절한 태도에 나는 약간 가시돋친 어투로 말했다. 그럼 역시, 불지옥 반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뭐 다 그렇지. 그냥 전시행정이나 다를바없는 것이었다. 군내에 TS환자는 많아봐야 채 열 명도 안 된다.

“그리고 딱히 병원의 도움이 필요가 없어요. 그 TS바이러스라는건. 애초에 바이러스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요양소 같은 역할입니다.”

“적응? 돌아가는 방법 같은 건….”

“없어요.”

당연히 알고 있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말로 확인받으니 뭔가 울컥했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해서 이렇게 쉽게 말하는 의사의 면상을 강판에 갈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되는 것이 죽을만큼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단지 싫었다. 변화라는 것이 싫고, 세상 사람들이 날 쳐다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것이 두려웠다.

올바르고 긍정적으로 살아온 삶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삶이라 해도 멋대로 바뀌어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뭔가 변해서 무언가를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정말로 두려웠다. 돌아가고 싶다. 원래의 삶으로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지금 이 상황이 두려웠다.

내가 병신같다고 욕해도 좋다. 하지만 사람은 변화를 바라지 않아. 모험심 강한 인간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 상황이 불쾌하고 서러웠다. 내가 당장에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 되자 의사는 의자에 걸터앉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TS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신체는 세포 단위부터 재조정됩니다. 근육, 뼈 장기 전부 바뀌어요. 가만히 있는 건 뇌밖에 없어요. 아니, 뇌도 좀 변하던가? 음.... 그건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TS바이러스 자체는 아직 연구조차 시도되지 못하고 있지만 이 과정은 정말로 완전합니다. 인위적으로 뭔가 가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고통도 아마 점차 사라지는 걸 느낄겁니다.”

그 말대로 처음에는 격통이 일었는데, 점차 몸의 기능이 원상태를 회복하는 것 같았다. 의사는 내가 여전히 기운이 없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뭐, 그래도 국가적으로 지원해주는 곳이라서 병원비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다행이죠?”

“다행이긴 뭐가!”

“말씀이 심한 거 아닙니까?”

내가 열받아서 소리치려 하자 병실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큰 키에 다부진 몸, 짧지만 잘 어울리는 스포츠머리를 한 남자였다. 저 얼굴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얼굴은 잘 생긴 편이지만 전체적으로 와일드한 느낌이었다. 딱 보면 마초 중의 상마초 느낌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저런 얼굴을 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형?”

“아, 간병인 분이시군요.”

“지금 이런 일 겪고 마음이 많이 안 좋을텐데 의사라는 사람이 약올리는 겁니까? 다행? 다행이라는 말이 나옵니까 지금?”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단지 아셔야 할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선준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따지고 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불의를 참지 못한다. 한정운과는 다른 의미로 올곧은 사람이었다. 흔히 말하는 것으로 대쪽 같은 성격이었다. 의사는 이선준과 마주한 채로 약간 기가 질린 듯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로서 설원씨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체크하기 위해서 일부러 공격성을 드러내도록 도발 하는 겁니까? 선생님, 저랑 지금 장난하십니까?”

이선준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이런 표정을 지으면 상대방은 왠만하면 꼬리를 내린다. 태도를 보면 무슨 조폭같지만, 사실 이 사람도 결국 우리랑 똑 같은 소설가 지망생이다. 항상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거지만 이 사람은 학과 선택을 잘못했다. 경호학과 같은 걸 갔으면 대통령 경호실까지 단박에 올라갔을법한 위압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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