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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48화 (48/224)

00048 고생길 탄탄대로 =========================

“야, 뭐 하고 오는데 두 판 하니까 와?”

피씨방에서 박헌영을 찾자마자 볼멘소리가 들려온다. 한 시간이 넘게 걸린 부분, 인정한다. 나는 박헌영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한다.

“꼬우면 여자 해.”

“뭐, 여자면 안 부리던 늑장이 절로 부려지냐?”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아.”

머리도 말리고, 로션도 바르고 온거다. 진짜 최대한 빨리 온 건데 긴 머리 생각보다 안 마른다. 그리고 다 말리지도 못했다.

“야, 밥 먹으러 가자.”

피씨방보다도 밥 먹으러 나온거다. 요리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밖에서 먹자는 주의다. 요리를 하면 일단 요리하는 시간, 설거지 등등 시간적 효율이 굉장히 떨어진다. 어지간하면 밖에서 먹는게 낫다.

박헌영도 밥을 안 먹었는지 순순히 계산을 하고 나온다. 피씨방 카운터, 높아…. 이상한 부분에서 실감이 온다.

근처의 일식집에서 밥을 먹는다. 나는 가츠동, 박헌영은 안심까스다. 나는 박헌영을 바라보며 말한다.

“작가님, 초밥은 안 사주시나요?”

내가 최대한 애처롭게 바라보며 말하자 박헌영은 나를 보며 눈을 부라린다.

“얼어죽을, 갑자기 애교는?”

박헌영이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꽤 있다. 나는 짐짓 인상을 찌푸리고 말한다.

“멍청한 돼지새끼, 나에게 빨리 초밥을 바쳐! 그게 너 같은 저열한 동물이 내게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 아냐?”

“너, 너 이 미친!”

“왜, 네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했잖아?”

박헌영은 얼굴이 새빨개진다. 뭐, 뭐야 이거. 그린라이트였냐?

라기보다 당황한거다. 말했듯 이 자식은 컨셉질이다. 오타쿠는 맞지만 온라인에서나 까불고 다니는거다. 물론 현실에서도 까불기는 한다.

“내, 내가…. 너를 얕봤다 설원. 나를 여기서조차 기쁘게 해줄 줄이야.”

“어?”

당황시키려고 한 건데, 녀석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다. 녀석은 초밥 한 세트를 시켰다. 지, 진짜로 그린라이트였을 줄이야….

박헌영, 너는 어디까지 타락해버린거냐?

“주인님, 이 미천한 돼지의 조공이 마음에 들길 바랍니다!”

박헌영은 숨죽인 채 내게 속삭인다. 나는 흠칫해서 뒤로 물러났다. 이선준에게는 장난이 잘 통하지만, 박헌영은 진짜 아니다. 뭘 하든 항상 상상 이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 번 더 할까 하다가 역시 그만둔다. 더 하면 진짜 후회할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어쩐지 놈이 보내줬던 망가 하나가 떠오른다.

[개쩔지 않냐?]

라면서 보내줬던거다. 갑자기 기억났다. 검은 스타킹 신은 오만한 표정의 여자가 스타킹 신은 발로 남자의 거시기를 마구…. 밟으면서 괴롭히는 장면이었다. 그걸 짓밟으며 마구 문질문질(?) 해대는 여자의 발이 매우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장난이 아니다. 이 자식은 진짜 그 쪽 취향이다. 거짓말이 아니었어! 이 녀석은 진짜 진성M에다가 작은 여자아이에게 밟히는 걸 망상하는 극악한 변태다.

진심으로 박헌영과 절교를 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다. 이 녀석이라면 언젠가 내게 검은 스타킹이나 오버니삭스를 신고 밟아달라고(?) 말할 것 같다. 그 상황이 되면 정말 이 자식을 죽여버릴 것 같다.

그래도…. 정도를 지키는 녀석이니까. 괜찮겠지?

“너 그런데 옷 항상 후드티에 청바지만 입고다니면 좀 그렇지 않냐?”

기모 후드티에 청바지, 운동화. 그게 내 패션이다. 항상 고정적이다. 색깔만 바뀐다. 나도 그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럴 건 뭐야? 수수할수록 좋아. 신경쓰고 다녀봐야 시선만 끌지.”

“그래도 뭔가 인간적인 부분에 대해서 포기하는 것 같은데.”

“내 존엄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거든?”

박헌영과 짧은 실랑이를 한다. 옷 입히기 게임이 아냐. 나는 내 자신을 최대한 숨기고 가릴 필요가 있다. 항상 같은 패션을 고수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나는 나 자신을 꾸미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어요. 나는 이런 나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아요. 이런 말을 하는 거다. TS되자마자 옷 엄청 신경쓰고 다니네? 좋은 거 아냐? 이런 말을 듣지 않기 위함이다. 너 같은건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이런 말을 듣자 박헌영은 잠시 생각에 빠진다.

“너무 신경쓰고 사는거 아냐?”

“신경쓰지 않고 살 수는 없어.”

“너무 신경써봐야 네 인생만 피곤해. 이것만큼은 명심해라. 남들의 시선은 결국 너 자신을 바꾸지 않아. 너를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네 몫이야.”

내가 과민하다는 건 인정한다. 지나치게 신경쓴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 일단 내가 안정감을 얻은 다음에 뭘 해도 하는 거니까. 나는 박헌영을 본다. 내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다. 내가 나답기 위해서 한 선택인데, 남들의 시선을 너무 의식해버리면 결국 본말전도가 되어버리니까.

“고마워.”

“그러실 것 까지야.”

이런 말에 얼굴 붉히지 말라고 이 멍청이.

밥을 먹고 나와서 박헌영은 담배를 한 대 피운다.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까 남 담배 피우는 시간이 굉장히 지루하다. 담배를 다시 피우면 이틀만 지나도 제대로 익숙해질 수 있다. 하지만 절대로 안 할거다. 담배를 안 피우니까 돈이 아껴지는게 진짜 실감이 난다.

피씨방에 가기 위해 걸어간다. 박헌영은 커피라도 하나 살까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젓는다. 카페 바깥에서 커피를 마시지는 않는다. 돈 아깝다. 차라리 캔커피를 마시고 말지. 그리고 애초에 나는 커피 그렇게 안 좋아하니까.

그러고 보니까 갑자기 단 게 땡긴다. 눈앞에는 설빙이 있다. 겨울에도 파나?

“야, 설빙 먹자.”

“뭐? 무슨 이 날씨에 설빙이야?”

“밥 먹으니까 단거 먹고싶어.”

“너 단 거 싫어하잖아.”

나도 놀란 부분이다. 한정운과 카페에 간 이후로 나는 내 몸이 단맛을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이 변하니까 식성이 변하다니, TS바이러스란 참 이상해. 박헌영은 투덜거리면서도 나를 따라왔다. 겨울이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꽤 있다. 커플들이나 여자들끼리 앉아있다.

팥설빙을 먹는다. 겨울이라 그런지 뭔가 너무 차갑다. 그래도 단 음식이라 그런지 입에 붙는다.

“식성도 변하냐?”

“그런가봐, 요즘 땡기네. 담배 안 피우는 반작용인가?”

“그럴 수도 있겠네.”

박헌영은 몇 술 뜨더니 안 먹는다. 하긴, 내 주변에 단 거 좋아하는 인간은 없다. 이선준도 그렇고 박헌영도 그렇다. 이선준은 요리는 못 하는 주제에 입맛은 까다롭다. 박헌영은 매운 거 빼고는 적당히 잘 먹는다. 단 것은 싫어하지는 않지만 좋아하지도 않는 편.

나는 기름진 걸 좋아했다. 요즘은 그닥 생각이 안 난다. 속이 좁아져서 많이 못 먹으니까 먹다 보면 항상 남기게 된다.

나는 설빙을 거의 다 먹었다. 뭐야, 단 건 잘만 들어가네 다 못 먹을 줄 알았는데. 박헌영은 거의 안 먹었으니 사실상 내가 다 먹은거다.

“여자란 참….”

“그러게.”

박헌영의 이번 말은 전혀 상처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도 신기하니까. 그냥 킥킥 웃는다.

사실 게임이나 하자고 나온건데 정작 나온지 두 시간이 넘을 때까지 나와 박헌영은 그냥 평범하게 이야기나 했다. 설빙 가게를 나와서도 나와 박헌영은 거리를 돌아다녔다.

“어, 저거….”

지나가다 옷가게를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저걸 내가 입으면 어떨까? 그냥 평범한 생각이다. 예전에는 남성복을 보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여성복이다. 이제 내가 남성복을 보면서 입은 나의 모습을 상상할 수는 없잖아.

살 생각은 없다. 말했듯 패션에 신경쓰는건 지금 내 처지에 사치다.

이제 곧 봄이다. 날씨도 점점 풀릴거다. 아직 입김이 나오는 날씨기는 하지만 점점 따뜻해질 테니까.

“나 정현수한테 말했어.”

“뭘?”

“관심 없으니까 꺼지라고.”

내 말에 박헌영은 킥킥 웃는다.

“잘 했어.”

“잘 한 일이겠지?”

“그럼, 네가 한 일 중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잘 한 것 같은데?”

“뭐?”

아직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큰 상처든 작은 상처든 결국 상처는 상처다. 지금 당장에는 큰 상처일거다. 정현수는 어떨까. 울었을까?

안 울었을거다. 정현수와 나는 처음 만난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목매고 좋아할 만큼의 시간이 없다. 그렇게 심하게 말했는데 다시 다가올리가 없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지 몸이 안 좋은 것 같기도 하다. 몸이 무겁고, 어쩐지 몸살이 걸린 것처럼 무기력하다.

“으….”

“왜?”

아프다는 것을 인지하자 갑자기 몸상태가 확 안 좋아진 걸 느낀다. 박헌영이 걱정스러운 듯 말한다.

“야, 너 어디 아파?”

“배…. 아파.…“

“야, 이 한겨울에 찬 거 먹으니까 당연히 탈이 나지.”

설빙을 먹은 탓인가. 아랫배가 욱신거린다. 아냐, 나는 안다. 이건 그렇게 아픈게 아니다. 그런 것 때문에 탈이 나서 아픈게 아니다.

이건 정말 생소하고, 낯선 고통이다. 처음 겪는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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