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7 고생길 탄탄대로 =========================
토요일 아침에 일어난 나는 기지개를 켠다.
어젯밤 꿈에 설원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얀 늑대도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같은 꿈을 계속 꾸는 것은 어떤 계시인걸까? 아니면 단순히 그냥 정신적인 작용인걸까?
꿈의 세계는 잘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내가 제대로 아는 건 별로 없다.
꿈은 진짜로 더 몰라.
핸드폰을 켜니까 전화가 몇 통 와 있다. 어제 심란해서 늦게 잔 통에 시각은 열 시가 조금 넘었다. 아침에 정현수에게 카톡이 몇 개 와 있다. 죄송하다는 내용이다. 그런 마음이신 줄은 몰랐다는 사과가 이어졌다.
어제 일은 기억이 안 난다는 말도 덧붙였다. 실례를 했으면 정말 죄송하다는 말도 있다. 필름 끊길 게 뻔하니까 카톡으로 확인사살을 한거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으면 된거다. 나는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녀석을 위해서.
카톡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와 있다. 언제 저장했는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온 게임 초대 메시지와 박헌영의 망가추천이 있다.
박헌영 – [야 이거 개쩜]
박언영 – [옆집 초등생과 금단의 외출!](표지 삽화가 있다.)
박헌영 – [별 다섯개짜리임]
설원 – [진짜 신고한다 미친새끼야. 진짜 너는 전자발찌 차야돼!]
박헌영 – [ㅋㅋㅋㅋㅋㅋ]
아침부터 이딴걸 보내는 이유는 대체 뭐야? 아침부터 그거 한다고 광고라도 하는건가? 애초에 보지도 않았는데 잘도 이런 걸 보낸다. 내가 보기에 박헌영은 극도의 M이다. 나나 이선준에게 언어폭력을 당하면서 느낄지도 몰라. 나는 진짜로 그런 생각이 든다.
설원 – [너 진짜 심각하게 M아니냐.]
이런 말도 사실 박헌영에게서 들은거다. 내 인생, 순결하지는 않지만 깨끗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데, 근묵자흑이라더니 이런 친구 때문에 별별 용어도 다 사용해 보는구나.
박헌영 – [사실 내 꿈의 하나는 이미 이뤄졌어.]
설원 – [뭔데?]
어쩐지 이 자식 태도 불안해.
박헌영 – [미소녀한테 언어폭력 당하면서 쓰레기 취급 받는거! 이 정도면 죽어도 좋아! 직접 만나서 해줘! 헠헠]
이 미친 또라이, 어떻게 이런 꿈이 있을 수 있지? 물론 내가 처음에는 꿈을 직업화하는 세상의 태도가 짜증난다고 욕을 했다.
하지만 이건 꿈이라는 말로 포장할 수 없는 변태적인 욕망이잖아. 어떻게 욕을 먹으면서 이딴 개소리를 할 수 있는거지?
설원 – [너 진짜 구제불능의 핵폐기물이네, 이러면 좋다고? 변태냐?]
박헌영 – [변태인 거 이제 알았냐? 그리고 개좋으니까 더 해줘 ㄱㄱ]
“허허허….”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는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지? 이제 박헌영이 이런 소리를 하면 화 낼 생각도 안 든다. 그냥 어이가 없을 뿐이다. 원래도 미친 자식이라는 생각은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박헌영 – [뭘 이 정도로 놀라냐? 사실 진짜로 원하는 건 따로 있다고.]
설원 – [알고 싶지 않으니까 말하지 마.]
내 말에도 박헌영은 자기 할 말을 해댄다. 나도 그냥 안 보면 그만인데 이 자식이 얼마나 더 개또라이 같은 소리를 해댈지 궁금해서 계속 보게된다. 이거 위험해. 중독성 있어.
박헌영 – [네가 검은색 고스로리 옷 입고 한 손에는 흰색 토끼 봉제인형을 드는거야.]
시작부터 이상하다.
박헌영 – [그리고 검은 스타킹에 가터벨트(별 다섯개) 차고 나를 넘어뜨린 뒤에 네가 신고 있는 검은색 에나멜 구두 뒷굽으로 나를 자근자근 밟으면서 말하는거지.]
박헌영 – [너 - 너 같은 변태돼지한테 내 고귀한 구두가 닿고 있잖아. 빨리 사과해 내 구두한테!]
박헌영 – [나 - 죄송합니다 주인님!]
박헌영 – [너 - 어때 기분좋지? 꿀꿀 하고 울어봐. 너 같은 건 차라리 갈아서 똥오줌이랑 같이 썩힌 다음에 비료로 뿌려야 할 텐데. ]
박헌영 – [나 – 꿀꿀! 꿀꿀!]
으아, 뭐야. 진짜 이상해! 이 새끼 항상 상상 이상으로 변태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는 감탄스럽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전혀 모르고 있었잖아, 게다가 왜 주어가 나야? 엄청 기분나빠!
박헌영 – [그리고 각도가 중요해, 나는 언제든 고개를 들면 네 팬티가 보이지만 네가 내 머리를 밟고 있어서 나는 네 검은 옷과는 대조되는 하얀색 귀여운 곰돌이 팬티를 못 보는거야. 나는 최대한 곁눈질을 해서 그 팬티를 훔쳐보고 행복한 괴롭힘을 당한다는거지. 너는 나를 학대하면서 우월감을 즐기지만, 사실은 팬티를 보고 있는 내 쪽이 이득인거지!]
설원 – [너 진짜 자살해. 그 쪽이 더 세상을 위해 좋을 것 같아.]
박헌영 – [좋으니까 더 해줘!]
“윽….”
M에게 비난은 연료를 들이붓는 것과 같다는 걸 깨닫는다. 박헌영급의 변태는 내 비난을 들으면서 점점 더 활력을 되찾는다. 진짜 미친놈! 욕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니. 이 녀석이 이런 놈이라는건 정말 처음 알았다.
하지만 박헌영은 오히려 가상세계에서 텐션이 더 올라간다고 해야하나 그렇다. 직접 만나도 제정신은 아니지만, 카톡이나 게임에서 만나면 진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날뛴다. 그 쪽에서 태어났다고 봐도 좋다.
박헌영 – [네가 도S였다면 우리는 정말 환상의 콤비가 됐을텐데.]
설원 –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내가 진짜 S였으면 네 머리 전기톱으로 갈아버렸어.]
박헌영 – [더! 더! 주인님 조금만 더 세게!]
면역 주문이라도 건 것처럼, 아니다. 반대로 먹히고 있다. 지금 내가 하는 공격들이 전부 무효화되고 녀석에게 힘을 불어넣고 있다. 이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선준이 있었다면 한 대 때려줬을 텐데.
이 녀석은 폭언이 좋은 게 아니라 ‘미소녀’에게 듣는 폭언이 좋은거다. 이선준의 욕설이라면 효과가 있겠지.
컨셉 진짜 더럽게 잡는다. 컨셉이라고 믿고 싶다. 진심으로 혐오하고 싶어졌어.
내가 계속 맞춰주니까 박헌영은 백 만원 줄 테니까 한 번만 밟아달라고 했다. 의상은 전부 준비할 테니까 몸만 와서 한 번 해주면 된다는거다. 진심인 것 같아서 정색하고 뭐라고 했다. 으으 미친놈.
뭐, 그렇게 기분 나쁘지는 않다. 그냥 웃긴다. 은근하게 그런 말을 하면 엄청 기분 나쁘지만, 이렇게 대놓고 미친 척을 하면 그냥 너무 병신같아서 웃긴다.
박헌영 – [주말인데 롤할래?]
설원 – [변태는 싫어.]
박헌영 – [나를 자꾸 자극해서 좋을 게 없을텐데.]
자꾸 비난해서 M의 욕망을 자극하지 말라는 뜻이다. 으으 싫다.
뭐 할 것도 없으니까 나가자. 일단은 씻어야겠다.
샤워를 한다. 머리도 감는다. 머리 감는거 진짜 귀찮다. 이제 여자들이 삼일에 한 번, 심하면 일주일동안 안 감는걸 이해할 수 있다. 감는 건 둘째치고 말리는게 너무 귀찮다.
좁은 화장실에서 머리도 감고, 몸도 닦는다. 더운 김 뿌옇게 올라오는 샤워실 안에서 물줄기를 맞는다. 거울에 김이 서려있다. 김을 손바닥으로 닦아낸다. 내 얼굴이 보인다. 아직도 내 얼굴은 낯설다.
누구나 자신의 얼굴은 낯설거다. 나는 가끔 거울을 봤다. 내 외모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였다.
얼굴이라는 것이 하나의 이미지라면, 계속 보다보면 얼굴이라는 건 사라진다. 피부, 코, 눈, 눈썹 눈두덩, 입술, 콧잔등, 턱 이마.
하나하나씩 분해되고 해체되서 얼굴이라는 감각은 없어진다. 그러다 보면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다.
나를 나로 만드는 건 대체 뭐지?
거기에 답이 있을리가 없다. 부분을 합해서 나라는 실체가 있다. 하지만 부분들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전체는 부분의 총합이다.
나는 내 얼굴을 빤히 본다. 원래도 낯설었지만 이제는 남의 것처럼 느껴지는 얼굴이다. 하얀 피부, 잡티 하나 없고, 뾰루지나 두드러기, 기미 같은 건 정말 하나도 없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피부다. 매끈하다. 나는 내 몸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린다. 목에서부터 가슴, 배, 아래의 거뭇한 털까지 만져본다.
내 몸은 아름답다. 그야말로 흠 잡을 곳이 없다. 이상성욕자나 특별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아닌 이상, 키가 조금 작다는 걸 빼면 완벽하다.
그게 그다지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전히 나는 나다. 변한 나는 변해가는 나로 존재하고 있다.
인간은 매 순간 변화한다. 그 변화의 폭이 지나치게 넓어졌을 뿐이다.
라는 말로 설득될리가 없지. 그냥 적응이 안 된다는 단순한 말로 표현하자.
나는 거울을 보고 표정을 연습해본다. 혼자니까 뭐 어때. 누가 보는 것도 아니잖아. 남자였을 때처럼 인상도 써보고, 포즈도 잡아보고, 피식 웃어도 본다. 원래는 멋졌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냥 안 어울리는 흉내나 내는 것 같다. 그냥 귀엽다.
이번에는 내가 알고 있는 여성적인 포즈를 취해본다. 뽀뽀, 윙크, 애교, 화난 표정. 평범하게 웃기, 이런 것들을 해본다.
매력적이다. 조금 놀랄 정도로. 나는 이런 표정을 짓고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던 건가?
이거, 진짜 사람들이 반해버려도 어쩔 수 없잖아. 이렇게 예쁜데.
나는 내 생각이 웃겨서 킥킥 웃는다. 김연주처럼 연예인이나 할까? 내 마음이 진짜 그 쪽으로 돌아서게 되고, 소설에 더 이상 미련이 없어지거나 한계를 느끼면 나는 결국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나는 별다른 재능도, 장기도, 노력도 안 했다.
이왕이면 편하게 먹고사는게 좋잖아. 그러니까 연예인?
이런 것도 그냥 망상. TS발병자이자 연예인인 김연주는 우리 나라에서 안티팬이 가장 많기로도 유명하다. 맨정신에 할 건 못 되겠지. 게이나 레즈비언들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을 혐오하는 이들도 정말 많다. TS발병자가 받는 혐오는 어쩌면 당연한거다.
인간은 자신과 같지 않은 존재를 싫어한다. 일반적이지 않은 것을 배척한다. 당연한거다.
나는 당연히 배척받는다.
그런 생각이 들자 우울해진다. 하지만 반대의 생각도 해본다. 게이든, 레즈비언이든 얼마든지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인권과 사랑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람도 굉장히 많다.
TS발병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인권과 생각, 사랑을 존중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도 많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만큼, 나를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니까 그렇게 슬퍼할 필요 없다.
이선준과 박헌영, 한정운이 내 편이다. 박헌영은 좀 또라이 같기는 하지만 자꾸 그런 얘기를 하면서 나를 웃기고 싶어한다. 조금 과한 면이 있지만 나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심각하게 여기는 건 그것이 정말 그들의 숨기고 싶은 ‘진심’일 경우다. 묘한 어투와 행동으로 나에게 스킨십을 하려고 한다거나, 나에게 술을 먹이려 한다거나. 그런 것이 싫다.
숨기려고 해도 사실 뻔히 보인다고, 너희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는 남자였어. 남자가 하는 생각 모를리가 없잖아. 행동 하나하나에서 검은 의도가 포착된다고.
나는 철벽을 칠 거면 세상 어떤 여자보다 더 큰 철벽을 칠 수 있다. 그건 나만 가질 수 있는 능력이라고 봐도 된다.
나는 마저 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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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얘기 나왔는데
그려준다면 나야 당연히 발그림이든 뭐든간에 일단 좋지.
그리고 박헌영은 판갤러가 모티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