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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46화 (46/224)

00046 고생길 탄탄대로 =========================

정현수의 목소리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정현수로 추측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뭔가 소리지르는 것 같다. 잘 들리지는 않는다. 잠결이라 떠오르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은 15학번 엠티날이다. 엠티씩이나 가서 굳이 고학번 선배에게 전화를 하는 이유는 뭐지?

“정말 죄송한데…. 현수랑 통화 한 번만 해주시면 안될까요? 저희가 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핸드폰도 뺏었는데 전화 안 걸어주면 다 엎어버린다고 난리 피우고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 녀석, 김정기라고 했나. 목소리에 죄책감이 뚝뚝 묻어난다. 새내기 주제에 바로 윗 선배도 아니고 네 살 차이나 나는 선배한테 이딴 걸로 전화하기 민망했겠지.

[야 빨리 나 바꾸라고오오오오!]

뭔가 난폭한 것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이 새끼 맛이 갔다. 나는 한숨을 푹 쉰다.

“바꿔줘.”

[아, 네, 감사합니다.]

곧 정현수의 혀 꼬인 목소리가 들린다.

[누나아아아…. 뭐 하세요?]

“자고 있었어. 술 많이 먹었냐?”

안 봐도 비디오다. 술 처먹고 남들 다 있는데 내 이름 부르면서 보고 싶다고, 전화하고 싶다고 징징거렸겠지. 정말 꼴사납고 꼴불견이다. 아마 내일 기억을 하나 못하나에 따라서 아싸가 될지 그냥 살지가 갈릴거다.

나도 그랬다. 정확히 말하면 그랬다고 들었다.

이 녀석이 하는 짓은 지금 내가 새내기 때 했던 짓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미워할 수가 없다. 보답받지 못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슬픈지. 얼마나 괴로운지 나는 너무 잘 안다. 너무 많이 괴로워서 술도 많이 마셨고, 담배도 시작했다.

이 녀석, 담배 안 피웠던가.

[누나아 저랑 영화 봐요 영화아….]

늘어지는 말꼬리가 좀 웃기다. 내가 진짜 여자였다면 당장 전화를 끊어버렸겠지.

하지만 내가 이 녀석을 동정한다고 해서 사귀어 줄 수는 없는거다. 그건 가짜잖아. 아무리 이 녀석이 받을 상처를 안다고 해도 그래서는 안 되는거다. 그런 건 결국 상대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 나는 한숨을 푹 쉰다.

“너 내가 우습냐?”

[네?]

“내가 우습냐고 이 씨팔새끼야.”

이런 말 하고싶지 않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 들으면 누구나 상처받아. 정현수의 늘어진 말투가 점점 원래대로 돌아온다. 내가 욕을 하니까 놀란 것 같다. 나는 이를 악문다. 모질게 하자, 이 녀석에게는 별로 애정도 없어. 관계도 별로 없어.

[누나…. 화났어요?]

“사람 봐가면서 들이대. 너 내가 쉬워보여? 어? 너 내가 무슨 상태인지 알고 이러는거야?”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는 진짜. 진짜 누나를….]

그런 말 하지 마. 그러면 더 부담스러워지니까. 나는 나 스스로를 설득한다. 이 녀석은 내가 남자였으니까 어떻게 한 번 해보기 쉬워보여서 들이대는 수많은 남자들 중 하나다. 웃기잖아. 어떻게 몇 번 만나놓고 나 없으면 죽고 못 사는 그런 녀석이 되는데?

“시끄러워, 니가 날 좋아하든 어쩌든 그건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그런 거 말하는거. 내가 진짜 여자였으면 너는 나한테 차단당했어 알아? 엄청 수치스러워. 너 같은 젖비린내 나는 꼬맹이한테 관심 주기도 싫고 짜증나. 얘기 몇 마디 받아주니까 내가 천사처럼 보이디? 웃기고 있네. 꼭 이렇게 심하게 말해줘야 알아들어? 너 그렇게 멍청해? 그렇게 멍청한 놈이 글을 쓰겠다고? 내가 티를 내면 좀 알아들으라고, 알았어? 모르는 번호로 전화오게 만들면 찾아가서 머리 부숴버릴 거니까 내 이름, 얼굴 다 잊어버리고 살아. 만나도 아는 척 하지 마! 나는 너 같은 부류의 새끼들이 제일 싫어! 못 먹는 감 한 번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들이대는 자식들!”

[누, 누나…. 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심하게 말했다. 정말 심하게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모질다. 나는 과거에 상대방의 올 듯 말 듯하는 그 태도에 고통받았다. 이 녀석에게만큼은 그런 고통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과하게, 심하게 말했다. 잠깐의 상처로, 폭언으로 차라리 나를 욕해. 차라리 나를 미워해.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선준을 팔아먹어 놓고, 욕 먹을 짓을 자처한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다. 나는 녀석을 동정한다. 불쌍하다. 하필이면 왜 나야?

정현수는 치근덕거리거나 그러지 않을거다. 내가 생각보다 거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실망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더욱 모질게 말한거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게 실망하고, 환멸을 느끼길 바라면서.

희망은 애초에 없는 편이 절망도 적다. 당장에는 기분 나빠도 나중에는 희미하게 남겠지. 나처럼 지울 수 없는 거대한 흔적으로 남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자주 가는 장소에서 멍하니 기다린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혼자 먹는다.

그녀를 먼 발치에서라도 보러 주위를 맴돈다.

그녀의 옆에 있는 남자를 미워한다. 질투한다.

그녀가 보고싶다고 했던 영화를 예매한다. 약속이 있다는 말에 상처받는다. 아니면 말조차 꺼내지 못한다.

그녀가 쓴 글을 찾아본다. 그녀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어서.

그녀를 잊어갈 때쯤, 그녀를 미워하게 된다.

그녀를 잊는다.

그 때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어째서 나와 영화를 봤을까. 밥을 먹었을까, 술을 마셨을까. 쇼핑을 했을까. 왜 나에게 웃어줬을까. 왜 상냥하게 대해줬을까. 왜 내게 먼저 연락했을까.

관계의 마지막, 그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나를 좋아한 적이 없다고 했다. 친한 친구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편했다고 했다.

그 말이 슬펐다. 그래도 그녀를 좋아하는 내가 싫었다.

그녀에 대한 감정이 완전히 사그라졌을 때, 나는 그녀를 미워했다. 썅년, 좆 같은 년, 어장관리나 하는 년이라고 욕을 엄청나게 했다. 원래 사랑이라는 건 항상 미움만 남기고 사라진다. 좋아했던 만큼 미워진다. 절박했던 만큼 증오하게 된다.

이번에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다. 그런 경험을 주고 싶지 않다. 나는 정현수에게 카톡을 보낸다.

[나 여자 된거 이제 일주일 조금 지났어.]

손가락이 덜덜 떨린다. 그 말을 쓰면서도 이를 악문다. 단념시키려면 확실한 게 좋아. 그러니까 말한다.

[남자랑 사귄다는 생각 같은 건 안 해.]

서럽다. 이렇게 상처를 줘야만 한다는 사실이 싫다. 어찌되었든 정현수는 상처받을거다. 하지만 나를 좋아한 시간이 짧았던 만큼, 더 빨리 털고 일어날거다. 그 뒤에 다른 여자를 만나 연애를 하든, 무슨 짓을 하든 내 알 바는 아니다. 나로 인해 나와 같은 사람이 생기는 건 싫다. 정말 싫다. 이 세상 누구라도 나와 같은 아픔을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마지막 말을 보낸다.

[나는 아직 여자가 좋아.]

여자는 이제 전혀 좋아하지 않으면서 그런 말을 한다.

침대 구석에 쪼그려 앉는다. 눈물이 난다. 나도 안다. 정현수는 흥미 본위로 나에게 접근한게 아니다. 정말 순수하고 풋풋한 마음으로 나를 좋아했다.

그건 진심이다. 정말 너무나도 진심이고, 너무나도 순수하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대상과는 성적인 욕망이 일지 않는다. 그저 함께 있고 싶은거다. 같이 있으면 좋은거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런 마음을 짓밟아 버렸다. 처참하게 짓이기고 욕을 하고 부숴 버렸다. 나는 이제야 그녀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그녀는 어장관리를 한 게 아니다.

단지 마음이 약했던거다. 거절을 할 용기가 없었던거다. 내가 저를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내 연락에, 내 문자에, 내 데이트 신청을 거절할 용기가 없었던거다. 그냥 마음이 약했던거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랬구나 김유정, 그랬던 거구나.

김유정은 상처입힐 용기가 없어서 나에게 더 큰 상처를 입혔다. 그리고 나로 인해 안 좋은 소리도 많이 들었다. 최악의 결과다.

나는 상처입힐 용기가 있다. 그래서 정현수를 떨쳐낼 수 있다. 더 큰 문제를 만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용기가 있는 만큼 나는 상처입는다. 상처를 주는 건 나에게도 상처가 된다. 정현수가 불쌍하다. 좋아하는 마음에 보답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거짓말까지 하면서 떨쳐내려 해서 미안하다.

핸드폰 배터리를 빼놨다.

나는 쪼그려 앉아서 운다.

아직 울 일이 많이 남았다. 울어야만 할 일이 많다. 나는 왜 이렇게 예민한 걸까. 그냥 싫다고 하면 되는데, 신경 안 써버리면 되는건데. 내 마음이 중요한 만큼 타인의 마음도 중요하다고 생각해버린다. 그래서 힘들다.

내 성격은 내가 생각해도 정말 피곤하다.

나는 오늘도 혼자다.

============================ 작품 후기 ============================

그냥 내 의견이라고 했을뿐 이름을 부르든 안부르든 지역별로, 개인별로 차이가 있는거니까 이 주제는 이제 그만!

설원의 감정선이 난해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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