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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45화 (45/224)

00045 고생길 탄탄대로 =========================

내가 좀 삐뚤어진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지 몰라. 서혜인이 이걸 알고 한 제안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진퇴양난이다. 거절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거절하고, 네가 알아서 해라는 식으로 나오면 나는 의심받게 된다.

하, 정말 어이가 없다.

남자 쪽에서는 남자였기 때문에 나를 쉬운 여자로 취급한다. 여자 쪽에서는 나를 남자였기 때문에 여자로 취급하지 않는다. 막말로 내가 이선준과 섹스를 하든, 뭘 하든 내 마음이다. 하지만 여자들 사이에서는 내가 남자였기 때문에 욕을 처먹어야 할 이유가 된다.

여기도 저기도 지뢰밭이다. 어디로도 갈 수 없다.

나는 안다. 나는 서혜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거다.

만약 생각하고 한 거라면 서혜인은 정말 여우가 아니라 구미호 수준이다. 여자들이란 무섭네. 이선준을 팔아넘기는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이선준은 여자친구 같은 건 안 만들겠지. 내가 대체 뭘 도와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이성관계에서 최우선시되는건 결국 본인의 의사다

“내가 귀찮으면 안 할거야. 쉬운 것만 말해.”

내 말에 서혜인은 표정이 대번에 밝아진다.

“언니, 정말 고마워요. 고마워요! 제가 나중에 밥 한 번 살게요.”

필요 없으니까 나를 주제로 한 기분나쁜 음담패설이나 잠재워 주세요. 부탁입니다. 그런데 대체 남의 연애사를 도와주는건 뭘 해야 되는거지?

“그냥 별 거 없어요. 그냥 저에 대해서 좋은 얘기 해 주시고, 저랑 약속 같은거 할 때 고민하는 눈치면 그냥 가도 돼.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거? 그런 거에요.”

내 의문에 서혜인이 답한다.

“그리고 같이 있으면 저희 둘만 있게 자리 양보해주시는 거라거나….”

마지막 말이 조금 걸린다. 하지만 그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거다.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선준과 나는 친구니까. 서로의 연애 같은 것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나는 오히려 이선준이 서혜인과 사귀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다. 요즘의 나는 이상하다. 자꾸만 이선준에게 기대려 하고, 안 하던 짓을 한다. 그건 여러모로 좋지 않다. 내가 너무 빠르게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아서 두렵다.

이선준과 조금 멀어질 필요가 있어. 한정운의 말이 떠오른다. 이대로 있으면 상처받게 될 거라는 말이었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해. 이선준과 나는 지금 친구지만, 점점 뭔가 선을 넘으려 하고 있다. 이선준 쪽에서도, 내 쪽에서도 그런 것이 느껴진다.

생각하니까 내려야 할 결론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서혜인과 이선준이 사귀도록 하자. 그리고 이상하게 변해가는 나 자신에게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

“도와줄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니까 그 정도는.”

“고마워요 언니.”

서혜인이 웃는다. 이런 미소를 보고 설레던 적이 있었지. 지금은 아무 생각도 안 든다.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생각만 맴돈다. 이게 정말 잘 하고 있는 일일까? 서혜인은 조금 마음이 편해졌는지 밝게 웃으며 말한다.

“솔직히 이상하잖아요. 동성애자였던 것도 아닌데 변하자마자 남자랑 그러는거, 저도 그 얘기 들으면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하…. 그렇지.”

“솔직히 좀 더럽지 않아요?”

뭐가 더럽다는 걸까. 그런 소문을 만들어내고 상상하는 무리들이? 아니면 TS발작을 일으키고 자신의 본래 성별의 대상을 사랑하는 일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해?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좋아해야 해? 하긴, 사랑은 결국 의식주는 아니다. 없어도 문제는 없다.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다. 뺨이라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 네가 뭘 알아. 이렇게 변하고, 내 감정이, 내 정신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모르는데 너는 어떻게 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서혜인이 TS바이러스 발작이라도 일으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서혜인은 내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챘는지 말을 바꾼다.

“아, 언니가 더럽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런 짓 하는 사람들이 더럽다는 거에요.”

“아, 그래….”

여기서 이 여자한테 성질을 부려봐야 소용없다. 상황만 나빠질 뿐이다. 그냥 모르는 사람이, 겪지 못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짧은 생각이다. 그저 그뿐이다. 여기 더 있으면 안되겠다. 나도 내 감정이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지 모르니까.

“나 할 게 있어서 이만…. 가볼게.”

“네, 응원해주시는거죠?”

“노력해볼게.”

입꼬리가 잘 안 올라가지만 웃어본다. 제대로 웃고 있는건가? 내가 일어나자 서혜인이 내 뒤통수에 대고 말한다.

“언니 진짜 예뻐요. 잘 꾸미고 다니면 좋을 것 같아요.”

나는 못 들은 척 카페를 나온다. 누구를 보여주기 위해 꾸미고 다니라는 얘기지? 방금은 그런 게 더럽다고 한 주제에 내가 치마라도 입고, 화장도 하고 남자들의 우상이라도 되는 걸 바라는 건가?

서혜인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서혜인은 여우거나, 더럽게 멍청한 년이다.

차라리 여우였으면 좋겠다. 여우라면 여자들 사이에서 퍼진 내 악담에 가까운 소문들은 무마시켜줄 수 있을거니까. 멍청한 년이라면 그게 안 되겠지. 이선준과의 관계에 있어서 나를 설득하는 것은 상당히 주효한 일이다.

학교에서 나와 박헌영은 이선준과 항상 같이 다닌다. 나를 포섭해 놓는다면 서혜인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이선준에게 많이 해줄 수 있다. 둘만의 시간을 가져보도록 설득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나에게

‘허튼 생각 하지 마라. 너에 대한 소문이 지금도 이런데 내 도움이 없으면 사람 소리 듣고 학교 다니기 힘들걸?’

이런 식으로 말한것과 다름없다. 협박을 당한 것 같다. 물론 내가 과민하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여성들은 필요할 때 한해서 본심을 말하지 않는다. 너 살 많이 빠졌다. 네가 더 예쁘다. 이런 아주 일상적인 부분에서 하는 말들만 봐도 그렇다.

여자의 진심을 보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몇 마디 말로 진의를 추측해보는 것 밖에는 없다.

서혜인은 나를 부름으로 인해서 몇 가지 이득을 얻은거다. 나와 거래 아닌 거래를 통해서 내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나에게 이선준에게 이상한 마음을 먹으면 속된말로 내 평판이 진짜 쓰레기처럼 변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암시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단단히 못 박아뒀다.

그래, 나는 여자가 아니다.

집으로 걸어간다. 내일은 주말이다. 주말에는 뭘 할까.

나는 사람들의 평판을 그렇게나 신경쓰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남들이 나에 대해서 험담을 하고, 욕을 한다 해서 떳떳하게 잘 지낼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남들의 멸시, 경멸, 그런 것들을 나는 참을 수 없다. 아니, 참을 수 없다기보다.

두렵다.

타인의 시선이 그릇된 것이든 옳은 것이든 일단 그것이 내게 향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두렵다. 거짓일 것이 분명하지만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괴롭다. 그래서 나는 서혜인의 말을 받아들인거다. 엿같지만 현실이 그래,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적이 되고도 태연하게 학교를 다닐 자신이 없어. 지금 받아내는 시선과 관심마저도 힘들어.

집으로 돌아가서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다. 브래지어 끈을 풀고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꺼내버린다.

“하아….”

답답하다. 브래지어 하고 있는거 생각보다 엄청 신경쓰이고 짜증난다. 그래서 집에 혼자 있을때는 벗는 게 습관이 되었다. 브래지어 안 하면 가슴 처진다는 얘기도 있는데, 막상 알아보니 그냥 속설이었다.

…….

그래, 찾아봤다. 인터넷에 검색해서 혹시 처지는지 안 처지는지 검색해봤다! 그래도 내 몸이야. 내가 소중하게 여겨주겠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냐? 사회적 시선이 그렇다고 해서 내 몸을 아무렇게나 막 굴려도 좋으란 법은 없어!

나는 침대에 누워있다. 아무 생각도 없다.

정현수 – [누나 뭐하세요? 저는 지금 엠티와서 고기 먹고 있어요.]

정현수에게서 연락이 온다. 등신이 엠티를 갔으면 적당한 새내기 꼬셔서 어떻게 해볼 생각을 해야지 하필이면 하고 많은 사람중에 왜 나냐? 응? 왜 나야?

왜 하필이면 남자랑 사귀면 더럽다는 얘기나 들을게 뻔한 나야? 나는 너 누군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아. 좋아하지도 않아. 그런데 왜 나야?

남한테 상처주는거 싫다. 거절이 주는 아픔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 녀석이 꿈꾸는 캠퍼스의 로망 같은거 나는 채워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게 좌절되었을 때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지도 안다.

희망이 길어질수록 절망 또한 깊다. 상처주지 않으려 하다가 더욱 큰 상처를 주게 될 수도 있다.

그래, 그렇다는 걸 나는 잘 알아. 그러니까 끝내야돼. 이 녀석이 혼자만의 망상으로 나에 대한 마음을 더 크게 가지기 전에.

엠티에서 돌아오면 정현수를 만나야겠다. 그 녀석이 나에게 고백한 건 아니지만,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는 걸 확실히 해야겠다.

그게 최선의 선택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어장관리 한다는 소리 들을지도 모른다. 왜 이렇게 신경써야 할게 많은걸까. 나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었을 뿐인데, 진짜로 가만히 있고 싶을 뿐인데.

그나마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아서 다행이다. 적어도 올해만 지나가면 졸업을 하게 된다. 이 시련이 그리 길지 않다는게 다행이다. 졸려, 잠이나 자야지.

-우우우웅

잠들었다가 전화 소리에 깼다. 한밤중이다.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이 나한테 있었나? 술 먹자는 전화면 진작에 왔을거다. 해봐야 가지도 않았겠지만. 모르는 번호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받는다.

“여보세요?”

[아, 저, 혹시 설원 선배님이신가요?]

전화기 너머가 시끄럽다. 왁자지껄한 소리에 누군가 소리를 막 지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누구세요?”

[아, 저 15학번 김정기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아, 그래…. 그런데 왜?”

[현수 아시죠?]

“응, 그런데 왜?”

============================ 작품 후기 ============================

설원이 머리 쓰담쓰담 해주고 싶다. 얼굴 붉히면서 버럭하는거 보고싶다....

그리고 왜 서술에서 성까지 전부 서술되냐고 질문이 들어왔는데. 성 하나 붙여서 글자수 늘리려는게 아니라 원래 사나이들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이선준과 박헌영이 서로를

"선준아."

"헌영아"

이렇게 부르면 어쩐지 이상하지 않냐?

안 그런 경우도 있지만 이건 나의 논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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