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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44화 (44/224)

00044 고생길 탄탄대로 =========================

나는 카페를 자주 가는 편은 아니다. 글이든 과제든 뭐든 방에서 하는 주의다. 그래서 이렇게 카페에 또 온 것은 뭐랄까. 특이한 일이다. 사람이 적당히 있지만 그리 많지는 않은 카페다. 서혜인이 커피를 사온다. 자기가 불러냈으니 커피는 자기가 산다. 뭐 당연한거다.

하지만 당연한 걸 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지.

그런 면에서 보면 서혜인은 개념있는 여자라고 불러도 될거다. 구김살 없고, 얼굴 예쁘고, 성격도 좋다. 솔직히 내가 남자였을 때라면 서혜인 같은 애가 사귀자고 하면 단박에 사귀었을거다. 이선준이 밍기적거리는 거 솔직히 이해 안 된다.

뭐 물론 이 시기에 연애를 하면 인생 폭망테크 탈 수도 있는거니까 마음도 이해는 한다만….

그나저나 얘가 나한테 볼 일이란 뭘까. 안면은 있지만 친하지 않다. 당장 떠오르는 건 이선준에 관한 것밖에 없다.

“저…. 오빠… 라고 부를까요 언니라고 부를까요?”

서혜인은 머뭇거리며 물어온다. 지금까지는 제멋대로 다들 불러댔다. 솔직히 이거 물어보는거 니가 처음이야. 나는 조금 감동했다. 좋은 애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 배려할 줄 아는 애구나. 나는 웃으며 말한다.

“너 좋을 대로 해. 그냥 선배라고 하던가.”

“그, 그럼 언니라고 부를게요.”

“어, 응.”

호칭 따위야 솔직히 아무래도 좋은거다. 지금은 아직 간질간질한 느낌이 있지만 어차피 익숙해져야 할 문제다. 호칭보다 중요한 건 얼마나 상대를 배려하는가다. 배려하지 않는 사람하고는 만나고 싶지 않다. 솔직히 나는 남들을 꽤 배려하는 편이다. 매너가 좋지는 않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항상 생각한다.

내가 감정적인 이유는 싸이코라서 그런게 아냐. 그런 지점을 너무 잘 짚어내서 그러는 거라고.

서혜인이 가져온 것은 아메리카노 두 잔이다. 커피야 뭐 그냥저냥 먹지만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 나는 커피보다는 자리를 사러 카페에 오는거니까.

서혜인은 뜨거운 커피잔을 만지작거린다.

“선준 오빠는 가셨어요?”

“어 방금.”

뭐 이 녀석은 전에도 나에게 이선준에 관련된 질문을 몇 번 한 적이 있다. 같은 맥락으로 물어볼거면 그냥 카톡으로 하지 직접 부른 이유는 뭘까.

녀석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우물쭈물 하고있다.

“저, 이런 말 엄청, 엄청 실례인 건 알지만요….”

“뭔데?”

“진짜 죄송해요. 그런데 너무 불안하고 그래서….”

조금만 놔두면 진짜 자살할 것 같은 표정이다 뭐야? 내가 꼭 울리려고 한 것 같잖아? 왜 이래?

“뭔데, 말해봐.”

“선준 오빠랑 사귀시는 거 아니죠?”

“뭣?!”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크게 움찔했다. 뭐, 뭐라는거야 얘 미쳤나? 아니 밑도끝도 없이 무슨 사귀냐는 소리가 나오지?

“뭐, 대체 무슨 소리야 그게….”

“진짜 원래도 같이 다니셨던 건 아는데…. 정말 친한 것도 알구요. 그런게 그냥 뭐랄까. 같이 다니시는 거 보면 정말 사귀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아닌 거 같은데 하면서도 보면 정말로…. 뭐랄까…. 진짜 죄송해요!”

이선준과 같은 수업도 많고, 같이 앉는 경우가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복학생은 다 그래, 귀여운 여자 후배들이 같이 앉아줄리도 없고 친하지도 않으니까 복학생은 복학생끼리 뭉치는 거잖아.

그래서 같이 다니고, 밥도 먹고 그랬던 건 맞다. 하지만 박헌영이랑 먹을 때도 있었고, 한정운이랑 먹을 때도 있었다고.

“실제로 사귄다는 말도 들리고, 자취방에 같이 들어가는 거 봤다는 사람도 있고….”

저번에 그 때인 모양이다. 결국 누군가 같이 들어가는 걸 본건가. 없는 말 지어내는 건 정말 알아줘야 한다. 세상 어디든 소문이라는 건 정말 무섭다. 뜬소문에 살이 붙어서 점점 진실보다 더한 진실이 된다. 화가 난다. 속상하다.

세상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세상 일은 너무나 생각한 대로 되는 바람에 더 열받을 때도 있다.

“아니죠? 아닌거죠?”

“아니지 그럼! 그런 소문 퍼뜨리는 새끼들 누구야? 다 찾아서 아가리를 찢어버릴거야!”

“아…. 다행이다.”

“애초에 외모만 바뀐거지 예전에 했던 거랑 바뀐 거 하나도 없거든? 같이 수업 듣고 밥 먹고 자취방 가서 라면 끓여먹는게 뭐 잘못이야? 내가 바뀌었다고 그딴 망상 하는 새끼들 진짜 다 죽으라고 해! 대가리에 똥만 든 머저리 새끼들!”

나는 분에 차서 소리친다. 역겨워 진짜로. 내가 분노하자 서혜인은 겁 먹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하긴, 말로 아무리 지껄여봐야 이 상태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서혜인조차 나를 힘으로 제압하는건 쉬울거다.

“그거 물어보려고 그런거야?”

나는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서혜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차라리 물어보는 이 쪽이 매너가 있고 생각이 있는거다. 사실 소문을 퍼뜨리는 쪽에서는 진실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그저 자극적인 사건이 터지고, 말 퍼나르기 바쁘다가 실제로 압박이 들어오면 하는 말은 정해져 있다.

나는 그거 그냥 누구한테 들은 거라서…. 나도 잘 몰라…. 나는 그런 줄 알았지…. 아니면 된 거 아냐? 나는 그냥 들은대로 말한건데….

진짜 역겹고 짜증난다. 전부 뒈져버려. 죽이고 싶다. 말을 퍼나르는 것보다 중요한 건 타인의 부정이나 잘못을 내심 기뻐하며 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그 마음이다.

그러니까 그딴 말은 변명이 되지 않아. 자신의 더러운 마음을 직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놈들은.

“아니라고 말 해. 사실대로 말 했으니까.”

“네, 그럴게요.”

서혜인은 그래도 여자들 커뮤니티에서 어느 정도 발언권이 있을거다. 기가 센 여자는 아니지만 예쁘니까, 예쁜 여자는 발언권이 세다. 내가 지금까지 지켜본 바에 따르면. 물론 예쁜데 싸가지 없으면 걸레년이라고 욕 먹으면서 추락하는 것도 꽤 봤지. 진위 여부는 아무래도 좋은거야. 그냥 공동체에 불필요하거나 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그 순간 제거되는거다.

“그런데 솔직히 그런 오해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봐요. 아무리 언니가 원래…. 그랬다고 해도 지금은 일단 여자잖아요. 그냥 보면….. 정말…..”

얘는 또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화 날 것 같은데, 서혜인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진짜로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진짜 잘 어울리거든요. 그냥 보면 엄청 즐거워 보이고…. 다른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틈 같은 건 안 보여서….”

알겠다. 얘는 나를 질투하고 있다. 이선준과 내가 같이 다니는 걸 보면서, 내 자리에 자신이 들어가고 싶은거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좋아하는 남자들 여자든, 그 사람이 이성과 함께 웃으면서 얘기하고, 항상 같이 다니면 그 자리에 내가 들어가고 싶다는 상상 누구라도 할거다.

이해할 수 있어. 나도 그런 적이 없지는 않으니까.

“언니, 저…. 도와주시면 안 돼요?”

“…뭘 도와줘?”

결국 본론의 본론은 이건가. 갑자기 피곤해진다.

“언니 솔직히 지금 소문 안 좋아요. 점점 안 좋아지고 있어요.”

“어떤데?”

소문은 진실이 아니지만, 그것이 사람을 평가하는 것에 있어서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소문이라는 것은 결국 사회적인 나 자신이다.

서혜인은 나에 대해서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말했다. 이선준과 섹스파트너인 것은 물론, 한정운과도 그런 관계일 수도 있고, 모르긴 몰라도 이미 학과내에 몇 명과는 이미 잤을 거라는 것이다. 뭐야, 너무 빠르잖아. 아무 일도 없었는데 이렇게?

지금은 추측성일 뿐이라고 하지만, 며칠 지나고 카더라 식의 소문이 붙을거다. 누가 봤는데 둘이 맨날 붙어 다니더라. 한정운이랑 밥 먹는데 사이가 엄청 좋아 보이더라 이런 식의 소문일거다. 그러면 설마? 했던 것은 사실이 되고 나는 세기의 갈보가 되겠지.

전부 다 죽이고 싶다. 군부대가 이 지역을 폭격해서 전부 때려죽여 버렸으면 좋겠어.

“선준오빠가 저랑 사귀게 되면 그런 소문도 없어질거고, 언니도 당연히 오해에서 풀려날 거에요. 저도 그런 소문 안 퍼지게 노력할게요.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네?”

너 논리가 이상하잖아. 하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는다. 그러니가 서혜인은 결국 나에게 거래를 하자는 거다. 이선준이 서혜인이랑 사귄다고 해서 나에 대한 그런 소문이 사라질까? 그럴리는 없다. 중요한 건 자기를 도와주면 나에 대한 나쁜 소문이 가라앉는 걸 도와주겠다고 한거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나쁜 소문이 퍼지는 걸 달가워 할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선준에 대한 오해를 풀려면 나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한다. 말은 다르지만 해야 하는 것은 같다.

어차피 자기가 해야 될 걸 하면서 나에게는 동시에 뭔가 도와달라는거다. 애초에 이건 거래가 나만 손해보는거잖아. 하지만 나에 대한 소문이 없어진다는 것은 이선준을 제외한 부분에서도 해당되는 거니까. 서혜인의 말을 거절해서 나쁠 건 없다.

이선준이 서혜인과 사귄다?

상관없잖아. 진짜 상관없잖아. 친구가 여자친구 생긴다고 해서 나에게 소홀해질리가 없다. 뭔가 친구를 팔아먹는 기분이 드는 것도 같지만….

그리고 애초에 이선준은 왠지 서혜인과 안 사귈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그런데 내가 딱히 도와줄 게 있나?”

“네, 많죠!”

서혜인이 눈을 반짝인다. 무엇보다도 내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상황 자체가 문제다. 나는 아무 생각 없고 관계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거절한다면 이 녀석은 자신에게 이선준이 안 넘어온 것을 내 탓으로 돌려버릴수도 있다. 그러면 소문은 지금보다 더 살이 붙겠지. ‘아닌 척 하더니 그렇고 그런 사이더라구. 도와달라고 하니까 얼굴 싹 변하는거 있지?’ 이런 식으로. 그러면 정말 끝장이다.

============================ 작품 후기 ============================

다들 이해해줘서 고맙다. 계속 쓰고 있으니까 기다려줘. 리리플은 리플이 너무 많이 달려서 전화에 달린것만 답변하는걸로 할게.

생각을읽는자//그쪽을 파고든다는게 오쿠다 히데오쪽을 파고든다는거겠지? 나는 '남쪽으로 튀어'밖에 안 봤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문학관이 편협하다. 이 문학도 옳다. 저 문학도 옳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작중 설원의 태도와는 정 반대야.

그 소설 하나만 가지고 평가하자면 소설 자체는 재미있다. 하지만 의미있는 소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개그소설이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문제가 되는 지점이 너무 많아. 일단 아버지가 지나치게 극단주의자고, 자폭테러를 하는놈이 나온다. 좌파의 희화화나 몰이해가 지나치게 심한 편인 것 같다. 그 부분은 소설상에서 진지한 장면인데. 그런 건 어떤 면에서는 조금 편협하고 기분나빴다고 본다. 좌파 사상가들을 전부 빨갱이로 만들어버리는 장면이라고 생각함.

물론 일본에는 적군파 사건도 있고, 이 부분에 관련된 문제들이 있었는데다가 주인공 아버지가 극 운동권 출신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

뭐 결과만 말하자면 소설은 재미있지만 가치있는 작품으로 생각하지는 않아.

물론 나는 오쿠다 히데오 소설을 전부 안 봤기 때문에 이건 굉장히 편협하고 왜곡된 평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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