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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43화 (43/224)

00043 고생길 탄탄대로 =========================

이선준이 눈치를 줘서 결국 나는 할아버지에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쳇, 여자라고 다 군대 안 가는 세상은 아니라고. 내가 예비역 하사일수도 있는거잖아.

하긴, 애초에 그런 나이로 안 보이는 얼굴이기도 하다.

“여자친구가 예쁘네, 버릇 좀 제대로 들여.”

여자친구라니, 이 할아버지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하고 있다. 이선준은 할아버지를 보며 웃는다.

“네, 애가 아직 어려서 철이 없어요.”

“야, 이선준….”

“어, 도착했다. 내리자.”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선준은 후다닥 내렸다. 나는 따라 내린다. 뭐야 이 할아버지 쓸데없는 오지랖이나 부리고.

키 큰 군인과 작은 여자가 같이 있다. 서로 웃으면서 얘기한다. 누가 봐도 그냥 친구처럼은 보이지 않을거다. 연인이라고 생각하는게 당연하다.

이래도 되는걸까. 정말 이래도 되는걸까.

“뭐 해? 빨리 안 오고.”

이선준이 나를 부른다. 몇 걸음 뒤에서 부르고 있다. 나는 우물쭈물한다. 최대한 부끄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군인이랑 같이 다니기 쪽팔려서….”

“뭐?”

“장난! 장난!”

이선준이 화를 낼 것 같자 나는 후다닥 달려갔다. 이선준은 키가 크다. 설훈만큼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좀 과한 키다. 올려다 보기 짜증난다.

“아, 목아파 진짜. 여자들은 목디스크 같은거 안 걸리나?”

내 키는 이선준의 가슴에 미친다. 시선은 그보다 조금 더 낮으니 눈을 맞추고 이야기 하려면 솔직히 피곤하다. 이선준은 나보다 에스컬레이터 한 단 아래로 내려온다. 그래도 나보다 크다.

군복에 시선을 한 번 주고, 나에게 시선을 한 번 준다. 남자들의 시선은 부러움, 여자들의 시선은 질투. 그리고 남자들의 시선은 다시 한 번 부러움과 가소로움으로 나뉜다. 가소로움은 예비역, 부러움은 미필. 당연한거다. 예비군 마크를 달아놨으니 전역예정자라는 뜻이다. 예비역은 전역마크를 보든 뭘 보든 일단 군복을 보면 가소롭다. 전역하기 전까지는 전역한게 아니다.

막말로 진짜 하루 전에라도 전쟁이 나서 군생활이 무기한 늘어날수도 있는거다.

터미널에 들어와서 표를 끊는다. 시간은 대략 한 시간 정도가 남아있다. 그리고 우동을 먹는다. 우리는 시덥잖은 얘기를 한다. 강의 얘기도 한다.

“월요일 수업은?”

“교수님들한테 다 얘기해놨어. 복무 중이라 힘들다고.”

화요일 전역이니, 월, 화 수업은 못 들을거다. 아니, 화요일은 오후수업이니까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진짜 전역하고 태원에 바로 와서 군복 입은 채 수업 들을 기세다. 그거 부끄럽지도 않나?

그런 멘탈, 진짜 본받고 싶을 정도다.

우동 한 그릇을 다 먹고 나서도 우리는 거기에 앉아 이야기를 오랫동안 한다. 이선준과 이야기하는 건 즐겁다.

“진짜 죽겠다니까. 자꾸 연락하고, 거절하자니 좀 미안하기도 하고, 내가 바람 넣은 것 같기도 하고 진짜 어떡해? 계속 만나자는거 거절하고 있기는 한데 진짜로 끈질겨.”

나는 정현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선준은 진지하게 듣다가 말한다.

“싫으면 딱 잘라서 거절해. 이런 식으로 연락 하는거 부담스럽고, 나는 남자라고.”

“남자?”

그 말이 낯설다. 낯선 울림이다.

“정신적으로 남자라는 뜻이니까.”

나는 잠시 멍해진다. 나는 이선준을 빤히 쳐다본다. 나는 남자라고 말한 이선준의 말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말이다. 나를 남자로 봐준다는 말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나를 나로 생각해준다는 거니까 고맙다.

“나 남자 아냐.”

하지만 그 말은 묘하게 마음에 걸린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턱에 걸려 넘어진 기분이 든다. 이선준은 멍청해진 내 표정을 보더니 말한다.

“그럼…. 여자야?”

“여자도 아니야.”

나는 이상하다. 성별이라는 건 흑백과 같다. 남자거나, 여자거나. 둘 중의 하나다. 물론 두 개 다 달려있는 경우가 있다고 하지만 그건 논외로 치자. 어떤 성(Sex)을 사랑하는가를 떠나서, 어떤 성(Sex)인가? 라는 질문에는 항상 대답이 명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좀 이상하다. 나는 내가 남자라는 자각이 없다. 몸이 여자니까. 하지만 여자라는 자각도 없다. 남자였던 기억이 있으니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나는 남자와 여자의 그 어딘가. 중간은 아니지만 어딘가 언저리 비슷한 곳에 서 있다. 나는 지금 흑백의 경계선, 그 흑백의 중간지점에서 흑과 백이 만나 어우러지는 곳. 회색빛으로 물든 그 어딘가의 경계에 서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명백하다. 나는 여자니까. 여자로 간다.

하지만 내 기억이, 경험이, 습관이 여전히 나를 남자의 세계에 머물도록 만든다. 나의 어떤 부분은 여자고, 미처 데려오지 못한 부분은 남자로 남아있다. 그런 것 같다.

“그럼 걔랑 사귈 수 있어?”

이선준이 묻는다.

“아니, 전혀.”

“복잡하네.”

스킨십 같은 걸 한다고 생각하면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넘어서 경기를 일으킬 것 같다. 이선준은 나를 바라본다.

“그냥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야.”

“그래. 시간.”

나는 고개를 숙인다. 다 마시지 못한 우동 국물이 있다.

“이런 국물이 식는 데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내 안의 과거들이 식어가는 시간이 필요한거야.”

우동 국물은 식는다. 식는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내 안의 기억들이 점차 식어가고, 옅어지면 나는 여자가 될거다. 하지만 온전히 내가 여자의 삶을 받아들이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른다. 이선준에게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형이 좋아? 아니면 오, 오, 오…오빠가 좋아?”

젠장, 말 더듬었다. 이선준은 눈이 동그래져서 날 바라본다. 나는 장난스럽게 물어봤다. 하지만 나는 이선준이 이 질문의 의미를 알아들었으리라 믿는다.

‘내가 남자로 남는게 좋아? 여자가 되는게 좋아?’

그 질문이다. 이선준의 선택이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칠지 어떨지는 모른다. 나는 단지 궁금하다. 이선준은 뭘 바랄까.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

하지만 이선준은 멍청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 말한다. 이선준 치고는 묘하게 텐션이 높은 목소리다.

“당연히 오빠지!”

“죽어 그냥. 너도 똑같아.”

내가 젓가락으로 찌르려 하자 이선준은 흠칫 물러선다. 이선준은 웃으며 말한다.

“장난이고,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

“…….”

문득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서 왕 이야기에 나오는 거웨인과 마녀의 이야기가.

흉측한 마녀와 아름다운 미녀의 모습을 가진 마녀는 자신과 결혼한 거웨인에게 묻는다. 아름다움 모습을 밤에 보여줄지, 낮에 보여줄지를 정하라는 것이다. 낮이 미녀라면 밤에는 마녀, 낮이 마녀라면 밤에는 미녀가 될지 고르라는 말이다.

거웨인은 마녀에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라 말하고, 마녀는 그 결정에 감복해 하루 종일 미녀의 모습으로 있겠다고 말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서사적 오류가 있지만 뭐, 유명한 이야기다. 나는 이선준의 태도에서 문득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선준이 이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뭘까. 나는 남자가 되고싶은 걸까 여자가 되고싶은 걸까.

이제 나는 남자로 되돌아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남자로 되돌아간다면 나는 더욱 혼란스러울거다. 이미 많은 것들이 바뀌어버렸다. 그렇다고 온전히 여자가 되기도 요원하다.

하지만 할 수 밖에 없는 일을 한다. 얼마 전 말했던 것처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사고와 행동. 그 뿐이다. 여자가 되기는 힘들다. 하지만 노력해야 한다. 이대로 살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삶의 선택권을 준 거웨인에게 마녀가 선물을 준 것처럼, 내게 선택권을 되돌려준 이선준에게 나도 선물을 해줘야겠지? 나는 웃으며 말한다.

“그럼 둘이 있을때만.”

“뭐가?”

이선준은 나를 보며 말한다. 나는 양손을 모으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눈을 감았다 뜨며, 나는 입을 연다.

“오빠.”

“…….”

이선준은 대답이 없다. 저 표정은 이게 무슨 개소리야? 이런 건 아니다. 포켓몬스터 식으로 말해보자.

효과는 굉장했다!

이선준은 그 자세로 십 초 정도 말이 없었다.

“너 대체 왜….”

“왜, 나 같은 귀여운 여자애가 오빠라고 불러주니까 좋냐? 응? 오빠아아앙~”

정도 이상으로 하면 안 귀엽다. 이선준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젓더니 시계를 본다.

그래 나도 몰라. 나도 내가 누군지 몰라.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냥 되는대로 살거야. 이렇게 해도 이선준은 떠나가지 않으니까.

사실 이렇게 해서라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싶은 걸지도 몰라.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진짜로 모르겠어.

시간이 다 되어서 이선준은 버스에 탄다. 며칠 전에는 이선준이 배웅을 해줬지, 이번에는 내가 배웅을 한다. 손을 흔든다.

“전쟁 안 나길 매일 빌면서 있으라구.”

“재수없는 소리 자꾸 할래?”

이선준이 인상을 팍 썼지만 하나도 안 무섭다.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까지 나는 탑승장 앞에 서있다. 이선준은 유리창 너머에 있다. 눈이 마주치자 나는 입술을 쭉 내밀어 보인다. 뭐야, 나 왜 이래. 오늘 좀 심하네.

이선준이 가운뎃손가락을 올려보인다. 나는 웃는다.

버스가 출발한다. 이선준에게서 카톡이 온다.

[그런 거 좀 하지 마]

하나 더 온다.

[너 그러다 후회해]

뭐야 이거, 자기가 힘 쓰면 언제든 나따위는 함락시킬 수 있다는 건가. 오만함이 도를 넘었군.

[무슨 자신감으로?]

[나니까]

[으엑 재수없엌ㅋㅋㅋㅋ]

[ㅋㅋㅋㅋㅋ]

웃긴다. 진짜 웃긴다. 다른 누구에게도 못 하는 걸 이선준에게만큼은 할 수 있다. 이선준을 믿으니까 할 수 있다.

나는 돌아간다. 올 때만큼 걸음이 가볍지는 않다. 나는 입으로 ‘오빠, 오빠’ 입으로 계속 발음을 굴려본다.

-지이이잉

카톡이 왔다. 이선준인가 싶어서 봤는데 전혀 아니었다.

서혜인 – [오늘 시간 있으세요?]

얘가 왜 나한테 연락을 하지?

============================ 작품 후기 ============================

미리보기 풀었다. 자세한 사정은 공지사항에 써놓았다.

결론적으로 내 소설을 돈 쓰고 보는 사람이 많아서... 좋기는 하지만 어쩐지 미안한 마음도 들고.

애초에 돈 벌려고 쓴 글이 아니고, 내 생각을 많은 사람한테 보여주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는거였는데. 의도가 변질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과금했던 독자들에게는 정말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설원은 그렇게까지 장편으로 갈 예정은 아니다.

다시 한 번 과금한 여러분께 죄송하다. 더 열심히 쓰고 있으니까 용서해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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