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2 나로 사는 것 =========================
“2차 안 가세요?”
서혜인이 이선준에게 묻는다. 오늘 월요일인데 월요일부터 이렇게 달려서 어쩌자는거지? 서혜인은 조금 취한 것처럼 보인다. 이선준이 나를 힐끔 쳐다본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서혜인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고개를 젓는 걸 봤다.
“내일 수업도 있으니까.”
이선준이 거절한다. 술자리는 끝났다. 서혜인은 이선준을 따라오고 싶은 눈치다. 하지만 이선준이 내게 다가온다.
“가자.”
“어? 아 그래.”
이선준이 앞서가고 내가 뒤를 따른다. 남겨진 사람들은 저들끼리 술을 더 먹든지 어쩌든 할거다. 나는 뒤돌아서 서혜인을 본다. 나를 향한 눈빛이 어쩐지…. 잘 모르겠다. 나는 이선준의 옆에서 걷는다.
“왜? 더 먹지. 내일 수업 오후 아냐?”
“많이 먹었어.”
“전혀 안 취한 것 같은데?”
뭐 취할 때까지 먹는건 멍멍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물론 나는 그런 멍멍이들 중 하나였다.
“취할 때까지 먹는 건 너나 박헌영이랑 먹을 때뿐이야.”
“아, 그래….”
이선준과 나는 걷는다.
“오늘 있잖아.”
“어.”
“한정운이….”
“됐어.”
“어?”
“그걸 굳이 나한테 왜 말해?”
이선준은 화가 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말투가 뭔가 찜찜하다.
“굳이 내가 알아야 할 이유도 없잖아.”
카페에서는 분명히 화가 났던 것 같은데, 지금은 화가 난 기색은 전혀 아니다. 뭔가 단번에 칼로 잘라버리는 듯한 날카로운 단절감이 느껴진다. 마치 어딘가에서 확 끊어버리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은 말투다.
“한정운이 네 편이 된다는 건 좋은 거겠지. 그 이유를 내가 궁금해하는 것도 웃기고…. 그냥, 그거대로 네 편이 생긴다는 거라서 좋은 일인데. 그렇지?”
“어, 그렇지.”
“궁금해 할 필요 없어.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것도 아니니까.”
이선준의 말은 나에게 하는 것 같지 않다. 꼭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이선준은 고민하고 있다.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다. 이선준은 한참을 걷는다. 그런데 우리 어디로 가는거야?
이선준은 갑자기 멈춰선다.
“그래도 궁금해.”
나는 이선준을 쳐다본다. 이선준은 갑자기 말이 달라진다.
“친구니까 물어보는거야. 너한테 접근하는 놈이 어떤 이유에서 그러는 건지 충분히 알아야 하니까. 위험한 놈일 수도 있잖아. 한정운은 아무도 속을 몰라, 그 자식의 의도가 불손할 걸 수도 있어. 무엇보다 이유가 있다면 나는 알아야겠어. 무엇보다 내가 안심이 안 되니까. 나는 내 스스로를 설득할만한 이유가 필요해. 친구니까 그런거야. 친구니까, 이렇게 된 네가 나쁜 일을 당하지 않도록…. 걱정되어서 그러는거야.”
“알아, 알아. 무슨 말인지 알아.”
안 취한 것 같더니 좀 취한 모양이다. 횡설수설 하고 있다. 안다는 내 말에 이선준의 약간 혼란스러운 표정이 누그러진다. 그래, 걱정하는거다. 걱정하는 건 당연한거다. 이선준이 자신에게 말하듯 한 말들은 나에게도 닿았다. 걱정하니는 거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걱정하지 않는게 이상한 거잖아? 내 상황은 누가 봐도 특수하다. 이 상황에서 이선준이 걱정 때문에 한정운과 나의 일을 궁금해 하는 건 당연한거다.
“무슨 말인지 아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마.”
“어, 아…. 그래.”
이선준의 얼굴은 왠지 불안하다. 그 표정은 나도 불안하게 한다. 나는 한정운과 있었던 일을 얘기한다. 한정운의 비밀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하지만 말해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선준이 최대한 납득하도록 설명했다.
“정말 궁금하면 본인에게 물어봐. 나는 말할 수 없어.”
“그래, 그 정도면 됐어. 한정운은 어쨌든 너를 걱정한다는거지?”
“그래.”
이선준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이다. 불안해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얼마간 걷자 내 원룸 건물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데려다 준거다. 박헌영 집에서 있기로 했는데, 어딜 가나 했더니 당연하다는 듯 나를 데려다 줬다. 여자라면 서혜인도 있고 다른 애들도 있는데 굳이 나만을 데려다 줬다.
“가라.”
이선준은 들어가려는 나에게 인사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들어가려 했다. 현관 문을 열고 뒤를 쳐다본다. 이선준이 내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 아 뭐야, 저렇게 있으면….
그냥 들어가기 어렵잖아. 미안하잖아.
이런 말 뭔가 이상하다. 이 상황에서 이런 말 꺼내는거 굉장히 이상한 거 안다.
“저기….”
“왜?”
“라, 라…. 그…. 라면 먹고 갈래?”
나는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면서 말한다. 뭐야 이거, 진짜 이상해. 진짜로 라면만 먹고 가라는건데!
그리고 진짜로 라면만 먹었다. 나는 라면을 끓였고, 이선준은 멀뚱멀뚱 있다가 라면을 먹었다. 별 얘기는 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리가 없잖아.
학교에 다니는 건 생각만큼 힘든 일은 아니었다. 교수나 강사들은 내 사정을 이해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도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대부분의 수업에 이선준, 혹은 박헌영, 혹은 한정운이 있었다. 나는 그 녀석들과 같이 앉았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쌓아가는 것은 벅차다. 이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것만으로도 나는 벅차다. 사람들은 내가 변한 것에 대해서 스스럼없이 얘기해서 나에게 모욕감을 주지 않는다.
전부 민감한 녀석들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부로 들쑤시지는 않는다. 나에게 언니라고 하며 모욕감을 줬던 녀석도 앞에서는 깍듯하다.
하지만 나는 어느 정도 보인다. 그들의 멸시가. 비웃음이 보인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다. 누구나 뒤에서 자신을 욕하는 녀석 한둘쯤은 있다. 그게 조금 많다고 해서 그 모든 것들을 바로잡을 수는 없다.
휘발성 짙은 관심일 뿐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나에 대한 화제도 시들해질 거다. 그러니까 괜찮다. 그리고 나는 나에 대해서 무슨 말이 오가는지 모른다. 모르는 게 약이다. 알아봐야 피곤하고 짜증만 난다.
“어, 누나 안녕하세요!”
나는 강의실을 나오다가 정현수를 만났다. 그 때 술자리 이후로 이따금 연락한다. 적당히 받아주기는 하지만….
솔직히 식은땀 난다.
너무 빠르잖아 이거.
“수업 끝나셨어요?”
“어….”
시선이 몰린다. 이거 위험해. 진짜 위험해. 나는 부리나케 건물 밖을 향해 걷는다. 녀석은 나를 따라온다.
“식사 하셨어요?”
“어, 대충 먹었어.”
“대충 드시면 안돼죠. 저도 밥 안 먹었는데 같이 드실래요?”
“약속 있어.”
“누구랑요?”
“이선준이랑.”
나는 걸어가며 얘기한다. 뭐야 싫어, 이 녀석 그 때 이후로 뭔가 끈덕지다. 나를 좋아하는 티를 너무 팍팍 낸다. 이 녀석 말고도 꽤 있다. 구체적으로 나를 모르는 녀석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남자였던 것과는 달리 뭔가 마주칠 때마다 으레 묻듯, 밥은 먹었냐. 술 한 잔 안 할거냐 하는 등의 질문을 많이 받는다.
특히 술 먹자는 얘기는 나를 알던 녀석들에게 많이 받는다.
뭐 어떻게 해보겠다는 심산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자 부르는 건 뭔가 껄끄러우니까 나를 부르는거다. 왠지 치근덕거리는 것 같고 그러니까. 차라리 남자였을 때 친분이 있던 나를 부른다.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야, 너 뭐냐?”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박헌영이 나를 보고 있다. 박헌영은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이다.
“아, 안녕하세요.”
“너 뭐냐고 임마.”
“아, 15학번 정현수입니다.”
“됐고, 꺼져.”
“네?”
“꺼지라고 치근덕거리지 말고.”
박헌영의 말에 정현수는 기가 질린 표정이다. 뭐야, 그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왠지 겁먹은 정현수의 모습이 안쓰럽다.
“뭘 욕을 해. 정현수, 나중에 얘기하자. 나 바뻐.”
“아, 네 누나. 안녕히 가세요.”
나는 박헌영과 같이 건물을 나섰다. 박헌영은 나를 쳐다본다.
“왜 욕을 해? 어린애한테.”
“너야말로 뭐 하냐? 어장관리하냐?”
“어? 그게 무슨 미친소리야?”
“싫으면 딱 말해. 면상 갈아버리기 전에 꺼지라고. 뭐 하는 짓이야?”
박헌영은 화가 나 있다. 뭐야 이거, 나한테 화를 내는 이유가 뭐야?
“네가 확실하게 안 하니까 저런 놈이 달라붙는거 아냐.”
“뭘 확실하게 해? 나는 싫은 티 팍팍 내고 있구만.”
“그런 걸로 안 떨어지는 놈도 있는거야.”
사실 그렇게 하는게 맞다고 생각은 하고 있다. 그런데 잘 안 된다. 다른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그 와중에 저 녀석에게 심하게 말해버리면 또 무슨 악담이 추가로 붙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러는거다.
“그리고 거절을 해도 애초에 고백을 하든 뭘 하든 해야하는거 아냐.”
나는 네 마음 받아줄 수 없어. 이런 식으로 얘기했는데 ‘누가 좋대요?’ 라고 말하면 나만 설레발 친게 되는거다.
관계라는건 정말 복잡해. 나와 박헌영은 실랑이를 하며 대학가로 왔다. 오늘은 금요일, 이선준이 말년휴가를 복귀하는 날이다. 다음 주 화요일 전역이라고 했으니 뭐 별로 오래 어딜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고보니 쟤네 오늘 엠티간다고 했지?”
“새내기 엠티?”
“응.”
궁금하지도 않은데 정현수 녀석이 카톡으로 엠티 가는거 설렌다고 하도 말해서 머리에 박혀버렸다. 엠티라니, 나와는 이제 상관없는 일이다.
과제만 하고 살아도 벅차다. 그러니까 엠티는 무슨. 그런 거 가봐야 별로 재미있지도 않고 술은 또 엄청 먹으니까 다음 날 머리만 아프다. 엠티 다음 날,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을 보는 건 이제 싫다.
“이선준은?”
“원룸 계약한다나봐.”
전역하기 전에 방을 구해야 뭘 해도 한다. 그나저나 정말 집에는 안 가나? 전역날도 수업이 있으니 집으로 가지는 못할거다. 이선준은 서울 사람이다. 부대는 철원이다. 사실 서울이 더 가까운데 집에는 안 가고 태원에만 들락날락한다.
이선준은 집 얘기를 잘 안 한다. 무슨 사정이 있나보지. 가정사는 누구나 있는 고민이다. 이선준의 원룸은 내 원룸과 한 블록 떨어져 있다. 걸어서 오 분 정도 거리다. 어쩐지 일부러 가까운 곳에 있다는 느낌도 들지만, 어차피 대학가 원룸이 워낙 밀집되어 있으니 겸사겸사 가까운 곳에 구한 걸수도 있다. 민감하게 굴지 말자.
이선준과 만나서 얘기했다.
“방은 어때?”
“넓고 깨끗해. 벌레도 없는 것 같고.”
이선준이 사는 원룸은 여기서도 좀 비싼 곳이다. 물론 박헌영의 집이 제일 비싸다. 이선준과 같이 터미널에 간다. 박헌영은 소설 써야 된다며 먼저 돌아갔다. 의리 없는 자식.
“짐은 집에서 다 부쳐준대?”
“뭐 그렇지.”
이선준은 군복을 입고 있다. 복귀하는 거니까 당연하다. 군복을 딱히 줄이거나 한 것도 아닌데 맵시가 난다. 육군 신형 전투복 베레모, 진짜 이상한데 이선준이 쓰니까 괜찮다. 말년병장이니까 좀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데 군복을 입고 있을때는 항상 정자세다.
“군바리 아니랄까봐….”
“시비 거는거냐?”
“아니. 멋있다고.”
우리는 별다른 얘기가 없다. 말이 통하는 친구도 좋지만, 말이 없을 때도 지루하지 않은 친구가 좋다. 우리는 서 있었는데, 지하철에 자리가 났다.
“앉아.”
이선준의 말에 나는 빈 자리에 앉았다. 이제는 뭔가 익숙해져 버렸다. 그게 문득 낯설게 느껴진다. 이선준은 핸드폰을 보고 있다. 부대에 맡겨놓고 전역할 때 가지고 나올 모양이다. 나는 이선준을 보며 말한다.
“기분이 어때? 이제 전역이네 진짜로.”
“뭐 별로.”
“하긴 전역을 해봤어야 알지.”
나는 킥킥 웃는다. 이선준의 표정이 삐뚜름해진다. 갑자기 옆자리의 누군가가 나를 툭툭 친다.
“아가씨.”
“네?”
“군인들 놀리면 못 써, 다 힘든 사람들인데 아가씨는 군대도 안 갔음서 그러면 쓰나.”
옆자리의 할아버지가 나에게 핀잔을 준다. 어…. 맞는 말이지만 맞는 말은 아니다. 나는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말한다.
“저 예비역인데요.”
“뭐어?”
“예비역 병장이에요.”
“할애비가 늙었다고 거짓말 하면 못써!”
할아버지가 조용히 역정을 낸다. 나와 이선준은 웃는다. 진짠데, 나 진짜로 예비역 육군 병장인데.
============================ 작품 후기 ============================
편당 용량이 크니까 사실 예전으로 따지면 하루에 계속 세 편은 연재하는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