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1 나로 사는 것 =========================
“나 누군지 알아?”
나는 그렇게 말한다. 모르면 한 잔 먹이고, 알면 학번 물어보고, 모르면 또 한 잔 먹이고 그런 식이다. 군대에 가기 전에는 그런 짓으로 후배들 많이 괴롭혔다. 군대에 가서 그게 군대문화라는걸 알게 된 이후로는 안 하게 됐지만.
그 때야 친해지고 싶으니까 그랬던 거고, 지금이야 별 생각 없다. 학번 차이 어마어마하잖아. 친해질 필요도, 이유도, 마음도 없다. 그러니까 별 얘기 하고 싶지도 않다.
“설원 선배님이요.”
정현수가 말한다. 나는 잠깐 놀라지만 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만에 전 과에 소문이 다 퍼졌다. 얼굴은 또 어떻게 알았대? 그러고 보니 한정운과 있을 때에도 애들이 나를 알았다. 그렇잖아도, 이 술자리의 사람들이 나를 계속 흘끔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이 시선 괴롭다.
나는 후배 녀석에게 술을 따라준다. 녀석이 내게 술병을 받아든다. 나는 잔을 덮어놓는다.
“나 술 안 마셔.”
“네? 아…. 네.”
“나 대신 너가 많이 먹어.”
“아, 네!”
이 녀석 표정 어쩐지 들떠있다. 적당히 얘기한다.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지, 뭘 쓰러 왔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정현수에게 묻는다. 뭘 쓰러 왔냐고.
“저는 시나리오요.”
“시나리오?”
“네.”
“그럼 극작과를 가지 왜 여길 왔어?”
타당한 의문이다. 태원대학교에는 문예창작과도 있지만 극작과도 있다. 학과의 유사성 때문에 작년 통폐합 위기도 겪었지만 학과생들의 극렬한 반발로 무산됐다. 그 때 이후로 극작과와 문예창작과는 사이가 좀 껄끄러워졌다. 뭐 싸울 때는 한 목소리였지만, 결국 안에서 내는 소리는 그거다.
‘저런 질 떨어지는 것들이랑 한솥밥 먹으라고? 싫어!’
뭐 이런 내용이니까. 실제로 극작과 사람들과 지금도 만나면 굉장히 어색하다. 이선준 같은 경우에는 실제로 시비가 붙은 적도 있다. 뭐 여전히 극작과도 문창과 수업을 꽤 듣고, 문창과도 극작과 수업을 듣기도 한다.
나는 궁금하다. 시나리오, 희곡, 드라마를 쓰고 싶다는 애들이 왜 문창과를 오는거지? 극작과 쪽이 더 그 쪽 커리큘럼은 더 잘 되어 있다.
뭐 반대로 소설이나 시를 쓰는 사람들이 문창과에 안 오고 극작과로 가는 경우도 왕왕 있다. 정현수는 내게 말한다.
“뭐든지 편중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소설이나 시 공부도 해보고 싶어요.”
“그래?”
이선준이라면 노발대발했을 내용이다. 물론 나도 고깝지는 않다. 문학계의 올라운더를 꿈꾸기라도 하는건가? 나는 소설 하나만 해도 벅찬데 여기저기 다 쑤셔보겠다는 마인드 솔직히 별로다.
애초에 나는 편협한 인간이라서 시나리오랑 드라마를 문학으로 보지도 않아. 그건 그냥 일종의 트리트먼트나 다름없다. 희곡은 뭐, 문학이라고 봐도 무방한 면이 있지만.
물론 이것도 예전 이야기고, 이제는 이러면 어떻고 또 저러면 어떠냐 이런 생각이 든다. 정현수는 내 반응을 궁금해하는 것 같다.
삼월 중순, 입학한지 이제 얼마 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극작과로 꺼져버려! 이러면서 욕이나 했겠지만….”
“네….”
녀석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뭐,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게 맞는거고, 더 좋은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서 문학 전반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겠다는 건 전혀 비난받을 만한 일이 아니지. 칭찬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이제는.”
나는 그렇게 말한다. 정현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진다. 솔직히 텃세가 심하다. 순수하지 않은 문학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배척당한다. 대표적으로 박헌영이 그런 면에서는 겉도는 면이 있다. 이선준과 박헌영이 친한 것은 정말 우리 과의 미스터리 중 하나일 정도니까.
이선준은 태원 문창의 적자, 박헌영은 매드싸이언티스트로 통하니까. 김나리는 시를 쓴다고 했다. 시는 읽는 건 좋아하지만 쓰는 건 모르겠다. 사실 사람들은 내게 시를 쓰라고들 많이 한다. 하지만 나는 소설이 더 좋고, 소설을 더 쓰고싶다. 내 소설이 서사가 없느니 뭐니 하지만 나는 결국 소설이 더 좋다고.
어쩔 수 없이 과제 때문에 시를 쓴 적도 있고, 실제로 호평도 받았지만 안 끌리는 장르다. 시는 그저 내게 하나의 위로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저 마음이 갈 때 보면 좋다.
김나리와 정현수에게 술을 좀 더 권한다.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둘 다 술을 꿀떡꿀떡 마신다.
“선배 꼭 후배가 술 먹이는 것 같아요.”
옆옆 자리에 있던 후배가 킥킥 웃으며 말한다. 어려 보이는 여자애가 껄렁하게 앉아서 남자에게 술을 권하고 있으니 그림이 이상할 법도 하다. 멀찍이 앉은 후배가 술이 취한건지 외친다.
“진짜 예뻐요!”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겹거든?”
내 외침에 술자리에 한바탕 웃음이 휘몰아친다. 딱히 적대적인 것 같이 보이는 애들은 없다. 맞아, 이런 꼴을 당했는데 적대적으로 나오면 그게 미친거지. 내가 몇 번의 사례로 사람들을 너무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선준은 나와 잠깐 눈이 마주친다. 서혜인이 뭐라고 신나서 떠들고 있고, 이선준은 진지한 얼굴로 뭔가 이야기한다. 저 인간은 농담을 잘 모른다. 그나마 가끔 하는 농담도 나나 박헌영을 빼고는 아무도 못 들었을거다.
뭐 자세한 이야기는 이 술자리가 끝난 다음에나 하자.
“힘들거야. 여기 사람들 편견도 심하고, 꼬여서 네가 시나리오 쓴다고 하면 극작과나 가라는 둥 나처럼 그런 소리나 할거야.
“네….”
정현수는 이미 그런 말을 많이 들어본 것 같다. 입학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게 문제다. 자기들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문학적 순수성을 매도하는 것에는 거침이 없다. 흥미 본위로 시를 쓰려 하지 마라, 소설을 쓰지 마라. 어디 얼마나 할 수 있나 보자. 이런 비아냥과 조롱이 넘친다. 전부 쓰레기 같은 짓이다.
자기 거나 잘 하면 돼. 타인의 세계관을 아무리 욕해도 자신의 문학성은 개미 발톱만큼도 나아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한정운은 그야말로 가장 모범적인 인간이다.
이선준은 뭐 스스로가 엄청 열심히 하니까. 나는 그냥 정현수를 위로해주고 싶을 뿐이다.
“위축되면 지는거야. 너 스스로가 위축되는 것보다. 네 글이 위축되는 걸 더 신경써. 글이 위축되면 방어적으로 되고, 방어적인 글은 누구에게도 공감을 줄 수 없단 말이야. 그냥 보고 다들 그런 말만 한다고, ‘딱히 문제가 보이지는 않네요. 하지만 재미가 없어요.’ 그 말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거야. 가장 극악하고 절망적인 비판이지.”
막 써도 특색 있게 쓰는게 낫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나의 소설은 정말 유니크하지! 라고 하지만 이미 충분히 많이 시도된 것이기도 하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가끔은 그 말이 슬프다.
“기존의 기성작가들을 답습해서 비교 분석하고, 말하자면 모범답안을 작성하듯 쓰지 마, 그것만 주의하면 너는 여기서 네가 가져가야 할 것을 얻어갈 수 있어. 다른 사람이 너를 비난하는 것도, 너의 의도를 모함하는 것도 신경쓰지 마. 그런 것에 신경쓰는 순간 너는 이 과에 온 의미가 아예 없어져버리는 거니까. 알겠지?”
타인의 의도에 좌우된다면 이 녀석은 결국 비난받지 않으려 노력할거다. 그러면 소설과 시를 공부하겠다는 그 의도마저 사라져 버린다. 아무리 욕을 먹어도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
지금의 나처럼.
정현수는 뭔가 감동받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고마울 것 까지야.”
“고학번 선배님들은 저한테 계속 그런 말만 하셨거든요.”
“들을 필요 없어.”
“이선준 선배는 시나리오 쓴다고 하니까 저리로 가라는 말만 하시고….”
이선준은 바른생활 사나이다. 하지만 문학관에 있어서는 굉장히 엄격하다. 시나리오 쓴다고 하니까 ‘그럼 너랑 할 얘기는 없겠네.’ 라며 멀리 밀쳐버렸을거다. 이선준도 꼬인 인간이다. 그런 지점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나의 문학관이 있으면, 이선준의 문학관도 있는거다. 이선준은 자퇴하라고 욕하지는 않으니까 양반이다. 나 새내기 때 고학번 선배들은 시나리오나 드라마를 쓴다고 한 애들한테 쌍욕을 하면서 극작과로 꺼지라고 욕을 해댄 사람도 많았다. 실제로 그걸 못 견디고 자퇴한 사람도 있다.
지금이야 그런 사람 없지만, 나는 그걸 보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뭐 나도 심정적으로 고까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드러내 놓고 비난해대는 건 정말 꼰대 짓거리로밖에 안 되는 거잖아. 자기 돈 내고 학교 다니겠다는데 왜 지들이 상관이야?
차라리 이선준은 이야기 하면 트러블이 생길 것이 뻔하니까 애초에 대화를 안 하는 거다. 얼마나 신사적이야?
어쩐지 이선준을 옹호해 버렸다.
정현수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뭐야, 이렇게까지 감동할 건 없는데.
“선배님 저 전화번호좀…. 받을 수 있을까요?”
어, 뭔가 잘못된 스위치를 올려버린 건 아니겠지? 하지만 후배가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건 뭐랄까, 새내기의 의무같은거다. 사심이 있다기보다 그냥 전화해서 밥 사달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배는 후배의 밥셔틀이니까. 잠깐 고민하다가 녀석의 핸드폰을 받았다. 그래, 내가 과민한거야. 정말 나 도끼병인가?
“감사합니다.”
“자주 연락하지 마, 돈 별로 없어서 밥 사주기 힘들어.”
“언니 저도요.”
김나리가 자신의 핸드폰을 밀어부친다. 나는 군말 없이 번호를 찍어준다. 언니라니…. 누나보다 적응 안 되는 말이다. 그, 그래도 언니가 맞잖아. 오빠라고 부르면 더 이상할거야. 그리고 얘네는 어차피 내 원래 모습보다 지금 모습이 더 익숙할 테니까 당연한거다.
“이제 그럼 설원 선배는 남녀 전부 수비범위에 있는건가?”
후배 하나가 나를 보며 놀리듯 말한다. 사람들이 전부 빵 터진다. 남자 후배다. 나랑 술도 꽤 한 적이 있는 녀석이다. 친하다면 친한 녀석이다.
“너 술 먹고싶지. 이리로 와봐.”
“어, 어?”
“가만히 있을 때 놔둬야지 왜 건드려 븅신아!”
“빨리 와.”
술 먹고 한 소리니까 마음의 상처는 아니지만 뭔가 웃음거리가 된다는건 썩 좋은 일은 아니다. 그 녀석은 테이블 사이를 지나 내 옆으로 온다. 나는 맥주잔에 소주를 미친 것처럼 부어버린다.
“혀끝을 잘못 놀린 대가다.”
“자, 잘못했습니다!”
“필요 없어!”
나는 녀석에게 소리친다. 그냥 평범하게 웃기다. 녀석은 유리잔에 가득 따라져 있는 소주를 보며 안색이 질린다. 그러게 왜 혀를 같잖게 놀려? 이건 정당방위다. 나를 놀렸으니, 나도 녀석에게 이런 식으로 복수할 자격이 있다.
“이렇게 귀여운 여자가 술을 따라줬는데 안 먹는거야?”
내가 녀석을 바라보며 웃자 그 후배는 흠칫한다. 그러고는 원샷한다. 그 어마어마한 양의 술을,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 그 녀석은 다 먹고 잔을 머리에 털며 말한다.
“차마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다시 자지러진다. 내가 졌다. 이 자식이 이걸 먹으면서까지 나를 놀리려 들다니, 그래, 용기만큼은 가상하다.
술자리는 꽤 오래갔다. 나는 진짜로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나도 내 자신이 놀랍다. 내가 이렇게나 잘 참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이선준은 여전히 뭔가 얘기중인다. 쳇, 저 보러 온건데 나한테 신경도 안 쓰다니….
서운하다.
내가 준 술을 먹은 후배는 결국 뻗어버렸다. 그러게 왜 오기를 부려?
정현수는 나한테 뭔가 이야기한다. 이 녀석도 취했다. 한 명 두 명 맛이 가면 술자리는 끝난다. 정현수는 꾸벅꾸벅 졸다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피한다. 정현수가 쓰러진다. 남자와 신체접촉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온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싫다. 정말 싫다.
“얘 데려가….”
나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하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린다. 정현수는 안 취했다며 중얼거리지만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주제에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술자리는 어영부영 해산 분위기다. 계산을 하고 다들 술집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