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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40화 (40/224)

00040 나로 사는 것 =========================

뭐야 왜 이래. 나는 한정운을 바라본다. 이 녀석, 성격 진짜 나쁜 것 같다. 예의바르지만 뭐랄까, 정말로 싸가지가 없다. 지킬 건 지키면서 사람 속 긁는것도 이만하면 상 줘야돼.

“너 성격 나쁘다고 자각은 하냐?”

“충분히 하고 있어요.”

“굳이 화나게 할 필요는 없잖아.”

“굳이 화나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화나게 했잖아….”

그래도 한정운은 내 편이 되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쪽이 선약이다. 내가 이선준을 따라서 가버리면 한정운은 기분이 나쁘겠지. 나도 은근히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것에 엄청 신경쓰는 사람이야.

한정운은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 태도가 뭐랄까, 위압적이다.

“그게 화날 상황이었다고 생각하세요?”

“어?”

“화날 상황이 아니잖아요. 보통 친구끼리는.”

내가 벙쪄있자 한정운은 계속 말한다. 너 무슨 말 하는거야…. 듣고 싶지 않다. 듣고 싶지 않아.

나도 계속 민감한 상태였다.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해왔던 것이다.

“선배도 알잖아요. 보통 친구끼리는 친구가 누굴 만나든, 무슨 얘기를 하든 궁금해하지 않아요. 말 하기 싫다고 하면 그냥 그래 하고 말아요. 알잖아요?”

한정운의 말이 맞다. 나는 양손은 무릎에 얹어놓은 채 아래만 쳐다본다. 휘핑크림 속 쿠앤크 프라푸치노가 보인다. 거무튀튀한 색깔이다. 내가 먹어서 내려앉은 만큼, 컵 주변에 검은 회색빛 찌꺼기들이 묻어난다. 먹고 난 흔적이다.

뭐든 흔적이 남는다.

흔적만 남는다.

“그 이야기를 안 해줬다고 저렇게 화내지도 않아요. 화를 내도 물어볼 거에요. 무슨 일이길래 숨기냐고, 하지만 저렇게 서운하다는 듯 박차고 나가지는 않아요. 선배도 알잖아요. 이게 무슨 상황인지.”

한정운은 일부러 숨긴거다. 이선준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서 숨긴거다. 이 녀석은 무섭다. 내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이선준에게 하지 않으리라는 것까지 알고 그런거다. 한정운은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듯 말한다.

“이선준 선배는 점점 더 설원 선배를 여자로 보고 있어요..”

“거, 거짓말…. 아직 일주일도 안 지났는데….”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에 얼마나 시간이 걸리죠? 첫 눈에 반하는 데에는 삼십분도 채 안 걸려요. 며칠이면 호감이 생기고, 소유욕을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이에요.”

“야, 소유욕이라니…. 무슨 소리야 대체. 과민한 것 같아 너.”

한정운은 아메리카노를 들이킨다. 나는 애꿎은 컵만 만지작거린다.

“저보다 훨씬 예민하고, 감정적이고, 사람의 감정에 관해서 천착한 글쓰기를 한 선배에요. 모르는 척 하지 마세요. 알고 있잖아요. 선준 선배는 지금 선배를 독점하고 싶어하는 거에요.”

그래, 알아. 내 장난이, 내 농담이 점점 뭔가 이상한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었다는 걸 안다. 이선준이 방금 한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안다. 모를리가 없잖아. 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런 우정도 있는거라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내 마음과 정신을 마취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랬던 내 자신을 깨닫는다. 나는 한정운을 노려본다.

“너, 그런데 내 편이 되어준다면서 이런 얘기 하는 이유가 뭐야? 나를 흔들어서 뭐가 좋아? 이선준이 나를 여자로 보고 있다는 말이 나한테 도움이 되는거야? 네가 이런 얘기 하면 나는 그냥 혼란스러워질 뿐이야.”

“도움이 돼요. 당연히.”

한정운은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이제 거의 다 마셨다.

“멀어지세요. 상처받을 거에요.”

“무슨, 무슨 소리야.”

“관계는 상처와 흉터만 남기고 사라져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한정운은 계속 말한다.

“이선준 선배는 자신의 규칙과 선배에 대한 소유욕을 부정(不正)한 것이라 생각할 거에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거에요. 설원 선배도 그걸 감당할 수 없으니 점점 괴로워지겠죠.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어느 쪽으로도 발전할 수 없는 관계에요. 이 관계가 고통 이외에 뭘 낳겠어요? 그러니까 결국 제 말은 선배에게 도움이 돼요. 장기적으로 보세요. 이대로 계속 만나고, 계속 친하게 지내면 결국 후회할 만한 일이 생길 거에요.”

“….그 후회할 만한 일이 뭔데?”

“모르죠. 하지만 제가 아는 이선준 선배는 선배에게 나쁜 짓을 할 사람은 아니에요.”

한정운은 이선준을 제대로 보고 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선준이 나를 강제로 어떻게 하는 상상은 할 수 없다.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다. 이 녀석은 무관심한 척 하면서 사람들을 그렇게나 관찰하고 있었던 걸까. 그것은 어쩐지 외롭게 느껴진다.

“아마 자기 자신에게 나쁜 행동을 하겠죠.”

“그게 뭔데?”

“저도 모르죠.”

하지만 한정운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것 같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이선준이라는 사람이 스스로를 기만하는, 스스로를 상처입히는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면….”

한정운은 잠시 뜸을 들였다.

“가장 상처받는 건 선배가 되겠죠.”

“나?”

“그래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상처만 받는 관계는 정리하세요.”

“우, 웃기지 마….”

나는 컵을 쥔 채 떤다.

“너는 신이 아니잖아. 네가 말한대로 세상이 돌아가리라는 법도 없는데 너무 자신만만한거 아냐?”

“충분히 예측 가능한 상황이에요.”

“그리고 나는 애초에 이 관계들을 버릴 수 없어서 이걸 택한거야. 언제나 나를 믿어주는, 언제나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여기에 있는거야. 네가 그걸 포기해라 마라 할 권한은 없어. 그걸 포기하면, 애초에 여기 남아있는 이유가 없잖아.”

“제가 대신….”

“시끄러 멍청아. 어이 후배, 너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신하는거 아냐? 네가 도와주는건 고마워, 날 생각해주는 것도 고마워. 하지만 나는 보모가 필요한게 아니야.”

이 녀석은 이선준의 역할을 자신이 대신해주겠다 말하고 있다.

“그리고 너, 네가 이선준을 대신하면 너 자신은 나를 여자로 생각하지 않을 자신 있어?”

“네.”

“웃기고 있네.”

나는 피식 웃는다. 그리고 녀석을 노려본다. 나는 입술을 모았다가 웃는다. 보지는 못하지만 지금 내 모습, 엄청 매력적일거다.

“이렇게 예쁜데?”

“……그러네요.”

한정운은 순순히 인정한다. 이선준이나 박헌영이었다면 뭐라고 욕을 해도 했을텐데 이 녀석은 매사 진지해서 뭔가 놀랍다.

“저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했네요.”

“뭐, 뭐야. 너…. 기분 나쁘잖아. 방금 설렜다는 식으로 얘기하지 말라고.”

“아뇨, 진짜로 설렜어요.”

“그런 무표정으로 얘기해봐야 설득력 없거든?”

미친 놈! 뭐라는거야 진짜. 한정운은 설렜느니 뭐니 하면서 무표정하다. 이거 실례 아냐? 묘하게 기분 나쁘다. 한정운은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저를 너무 과신했네요. 쓸데없는 간섭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진심이에요. 저는 선배가 상처받기를 바라지 않아요.”

“그래, 그래, 고마운데 말이야. 나는 내가 중요하게 여겼던 걸 버리는 것 자체가 불행이야. 불행해지는 선택지를 주고 행복해지라니, 그런데 될리가 없잖아.”

애초의 목적도 상실되는거다. 이선준과의 관계를 버리는 것은. 하지만 한정운의 말도 일리가 있다. 무슨 말인지 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안다. 그래.

나도 알고 있어. 이선준이 예전처럼 나를 온전히 예전처럼 대하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나도 예전같지 않다는 걸.

며칠만에 나는 이렇게 바뀌어 버렸다. 한정운의 말은 일리가 있다.

“그래도 버릴 수는 없어.”

한정운은 납득했다.

“그냥 조언이나 해. 간섭받는건 싫어, 네가 내 편이 되어준다는 거 고마워. 하지만 정도 이상은 항상 부담이 되거나 사람을 열받게 하는거야. 너도 알지?”

나 치고는 상당히 부드럽게 말한거다. 한정운은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이란 비합리적이네요.”

“너는 아니냐?”

“저를 포함해서 하는 말이에요.”

나는 웃는다. 한정운도 묘하게 웃는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든다. 이 녀석은 좀 정도 이상으로 참견하기는 했지만 결국 나를 위해서 한 말이다. 그걸 안다. 그래서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아. 한정운이 나를 신경쓰는 계기가 어떻건 간에, 나를 위해서 한 행동이다. 중요한 건 그거다.

나는 며칠 전 친구 하나를 잃었다. 아주 친하고, 내게 소중한 친구였다.

하지만 오늘 또 하나의 인연을 얻었다. 그것이 내게 위안이 된다.

나는 과제를 좀 하다가 나왔다. 한정운은 운동을 하러 간다며 휙 가버렸다. 뭐 그래, 나도 항상 옆에 있어주는 껌딱지를 바란 건 아니다. 필요할 때 옆에 있으면 되는거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세요.”

“알았어.”

나는 손을 흔들다. 한정운은 갔다. 얘기를 좀 하다보니 저 녀석도 괜찮은 놈이다. 해가 저문지 좀 되었다. 시각은 일곱시다.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하고, 이선준은 이미 밥을 먹었겠지. 카톡을 보낸다.

[뭐 해?]

[술 마신다.]

우와 답장 빨라.

[누구랑?]

[새내기들이랑 몇 명 있다. 너도 올래?]

술 마시는 거 좋아하는 나다. 하지만 이제는 술 먹기도 싫고, 사람 만나는 것도 별로다. 하지만 이선준이 어쩐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니까.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는게 좋겠지. 한정운에 대해서 완전히 말할 수는 없지만, 말 할 수 없는 개인사정이 있다는 정도는 설명할 수 있다. 그러면 이선준도 오해를 풀 거다.

애초에 이런 오해가 생기는 이유도 뭔가 께름칙하지만, 그래도 풀어야 할 건 푸는 게 맞으니까.

그래서 술자리로 간다.

[어딘데?]

술집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대학가 술집은 어딜 가든 이 모양이다. 나는 조용한 게 좋지만. 적당한 소음까지는 좋다. 하지만 너무 시끄러우면 인상이 찌푸려진다. 그리고 대학가 술집이 그렇듯 엄청나게 시끄럽다.

여러 테이블에서 무슨 소리인지도 모를 소음이 터져나온다. 술게임을 하고 술을 먹인다. 친해지는 과정이라고들 하지만 결국 술게임을 하면 그걸로 시작해서 그걸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화는 없다. 나는 그럴 거면 애초에 술을 왜 먹는지도 모르겠다. 하나 골로 보내서 주접 떠는 꼴을 보고 싶은 건가.

“술이 들어 간다!”

“러브샷! 러브샷!”

어딜가나 시끄럽다. 이런 혼잡하고 시끄러운 곳에서 우리 술자리를 찾는 건 아주 쉽다.

제일 조용하고, 제일 암울해 보이는 곳으로 가면 된다. 나는 곧 이선준의 얼굴을 발견한다.

“안녕하세요.”

나를 알아본 후배들이 내게 인사한다. 이선준은 테이블 깊은 곳에 있고, 양옆에 누가 앉아있어서 뭔가 애매하다.

옆자리로 가서 이야기만 잠깐 하고 오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뭔가 애매하다.

“여기 앉으세요.”

낯선 얼굴 하나가 옆으로 몸을 옮기며 자리를 만들어 낸다. 뭐야 이거, 술 마시러 온 거 아닌데 얄짤없이 술 먹어야 할 기세다.

“거기 앉어.”

이선준이 말한다. 나야 용건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선준의 양 옆에는 여자 후배들이 앉아있다. 하나는 서혜인이고, 하나는 새내기다. 저 인간은 뭐랄까, 여자가 꼬인다. 나는 털썩 앉는다. 내 옆에는 남자 새내기로 보이는 녀석이 앉아있다. 파마를 했는데, 척 봐도 대학 입학 기념으로 한 번 힘줘본 것 같다. 안 어울려.

맞은편에는 여자 새내기가 앉아있다. 일단 앉았으니까 소개 정도는 해야지

“이름이 뭐냐?”

여자 얼굴인데 뭔가 남자 같은 말투. 내가 생각해도 나 뭔가 이상해. 엄청 센 척하는 여자 선배같아.

“15학번 정현수라고 합니다.”

“15학번 김나리입니다.”

나리라니, 이름 특이하다. 맞은 편 여자애는 좀 통통하지만 귀엽게 생겼다. 파마머리 한 애는 너무 힘주고 있는 느낌이다. 평범하게 입으면 괜찮을텐데. 뭐 새내기가 멋지게 하고 다니는 건 힘들다. 한정운이 좀 특이한 케이스였지. 애초에 이 과에 온다는 건 어딘가 비뚤어진 애들이니까. 뭘 하든 제대로 하려면 좀 어설프다. 일단 나부터가 그런 것처럼.

아니, 세상에 비뚤어지지 않은 인간이 있기나 한가?

============================ 작품 후기 ============================

ㅠㅠ 치인다 갑자기 연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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