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39화 (39/224)

00039 나로 사는 것 =========================

“이건 뭐에요?”

나는 말할것도 없이 녀석의 에스프레소를 컵에 때려박고 물을 넣은 뒤 빨대로 슬슬 휘저었다.

“아메리카노.”

“어?”

한정운이 얼빠진 소리를 낸다.

“에스프레소에 물 넣으면 아페리카노, 우유 넣으면 카페라떼. 커피가 다 거기서 거기야.”

이 정도는 상식 수준이 된 거 아니었나? 한정운 이 녀석은 뭔가 묘한 놈이다. 아메리카노는 먹을만한지 인상을 쓰지는 않는다. 하긴, 나도 카페라는건 대학 오고 나서 처음 가봤다. 지금까지 안 가본 한정운이 딱히 이상한 녀석은 아니다.

“동기들이랑 카페 안 오나보네.”

“안 친하거든요.”

“아…. 그래.”

한정운은 항상 고립되어 있다. 확실히 아는 것도 많고, 얼굴도 잘 생겼다. 하지만 묘하게 한정운은 겉도는 느낌이 있다. 별로 사교적이지도 않고 평가가 있는 수업에서는 항상 신랄하게 비판한다. 딱히 내 소설만 욕을 먹었던 게 아니다. 이 녀석이 호평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니까 당연히 고립된다. 솔직하게 말하는 건 당연한거다.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결국 사람이다. 자신을 비판했던 사람 앞에서 당당해질 수 없다. 어떤 꺼림칙함 같은 것이 남는다.

그래서 한정운은 고립된다. 소설을 잘 써도 고립된다. ‘혼자라서 문제있냐?’ 항상 이런 느낌으로 다니니까. 어찌보면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된 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에 매혹된 여선배들, 여학우들이 한정운에게 관심이 많다는 것도 안다. 그저 다가가지 못하는 것 뿐,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여자를 갈아치우며 입맛대로 만나고 다녔을 것이다.

“그래서 무슨 얘길 하려고?”

“너무 공격적인 게 아닌가 해서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알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한정운이 이런 오지랖이라니, 솔직히 놀란다.

“선배는 안 그래도 주목 받기 쉬워요. 사람들의 관심과 호기심은 당연한 거에요. 그런 것들에 감정적으로 대처하다 보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 거에요. 방금 전 같은 일요.”

여후배가 나를 멸시하며 사라져버린 걸 떠올린 모양이다. 그걸 직접적으로 지적하기는 좀 그렇다. ‘이제 여자라서 언니라고 한 건데 그게 문제에요?’ 라고 말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런 면에서 보면 몇몇 여성들은 지능적이다.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항상 만들어 놓는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어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저는 그냥 좋은 뜻에서 한 말인데….

그리고 여의치 않으면 운다. 비장의 무기다.

역겹다. 악의를 포장하는 많은 말들을 들어왔다. 여성의 사회도 나름대로 무섭다.

“타겟이 정해지면 진실은 아무래도 좋아요. 벌써 12학번 단체 톡방에서 선배에 대한 욕이 막 써지고 있을걸요.”

병신 같은 년이 병신 같은 소리를 한다. 그럼 그 년과 친한 여자들은 그 논리를 옹호한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은 그러한 대세에 낙오되지 않으려 동조한다.

누군가에 대한 비난 여론이 세워지는데 걸리는 것은 10분이라는 시간도 필요없다. 내가 성질 한 번 낸 것 때문에 나는 지금 거기서 몇 번이나 해체되고 있을지 모른다.

‘ㅋㅋㅋㅋ설원 존나 기분나쁘지 않냐’

‘그니까 역겨움’

‘변하고 또 좋다고 여탕 달려갔겠지’

‘헐 진짜 대박. 나 여탕 갔을 때 그런 사람 있었을 것 같아 ㅠㅠ 어떡해 이제 목욕탕 못가겠어’

‘진짜 손발 묶어놔야되는거 아닌가 그런 사람들 자기 몸 만지면 성추행으로 잡아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맞아맞아’

보지 않아도 어떤 논리가 펼쳐지고 있을지 대충 상상이 된다.

나는 사람이다. 빈틈이 있고 못 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 지점이 있을 때마다 그들 사회에서 나는 물어뜯긴다. 나는 지금 첫 단추를 잘못 끼운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얼마나 경솔했던 건지 새삼 실감이 난다.

우울해진다.

“뭐 어떡하라고 그래서.”

“앞으로는 조심하라는거죠.”

“조심해? 뭘 조심해? 여자애들 비위 맞추고, 걔네들 앞에서 실실 웃으라는거야?”

“그런 게 아니라, 자극하지 말라는 거에요.”

내가 발끈하자 한정운은 고개를 저었다. 한정운의 말이 맞다.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자극하면 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다. 성질대로 살기 힘드네, 나는 고개를 젓는다.

“아냐, 나는 나대로 살기 위해서 이걸 선택한거야. 비굴하고, 구차하게 내 자존감을 유지시키기 싫어. 그런 식으로 살아갈거면 애초에 나는 보호 프로그램 거절하지도 않았어. 역겨운 년들이 나한테 뭐라고 해도 상관없어. 나를 자극하면 나는 성질 낼 거고. 나한테 시비 걸면 욕을 해줄거야. 그게 내 방식이야. 비위나 맞추면서 살거면 이렇게 밝힌 의미가 없어.”

나는 나대로 정론이다. 이것은 양보할 생각이 없다. 굳이 가시밭길을 택한 건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나 자신으로 온전히 걷기 위해서다. 내가 아닌 누군가를 연기하고, 내 감정을 죽이고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거다.

“네, 그 말이 맞네요.”

한정운은 고개를 끄덕인다. 발병자의 말로는 한정운이 더 잘 알 것이다. 이런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도 알까? 하지만 그게 비극이라 해도 나는 스스로 최후를 선택했던 사람들과는 다르다. 나는 나다. 나대로 산다. 나처럼 산다.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다. 항상 말했듯, 남자로 사는 것이 나대로 사는 것은 아니다.

나의 자존감을 지키는거다. 여자가 되든 남자가 되든 그건 오롯이 나만의 몫이다. 누가 간섭할 수 있는게 아니다. 한정운은 커피를 마시며 말한다.

“발병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아세요?”

“몰라.”

하지만 알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며칠만에 아픔과 고통을 겪었다. 한정운은 입을 열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 이해하는 사람이요.”

맞다. 부모님과 이선준, 나에게는 그들이 그런 존재다. 그래서 아직 희망이 있다. 아무리 슬퍼도 하소연할 사람이 있다.

너무 슬프고 힘든데 하소연하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는 건 너무 슬픈 얘기다. 한정운은 이 얘기를 왜 하는 걸까. 한정운은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저는 선배 같은 사람이 불행해지는 걸 더는 보고 싶지 않아요. 제 형제의 선택이 잘못된 거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요.”

한정운은 커피를 내려놓고 깍지를 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선배가 행복하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이거 잘못 들으면 프러포즈처럼 들리기도 하는 말이다. 나는 괜히 식은땀이 난다.

“무조건적인 자기 편이 사람은 누구나 한 명쯤 필요해요. 특히 선배 같은 사람은 더더욱.”

그 말에는 정말이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파충류 같은 한정운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한정운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무조건적인 내 편이 되어주겠다고. 그 말이 가진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건 내 편이 되어주겠다는 말이다. 도덕과, 윤리하고는 전혀 별개로 내 편이 된다는 뜻이다. 나를 상처입히지 않겠다고 했다. 나를 존중한다는 뜻이다. 한정운이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짐작이 간다. 이 녀석은 병들어 있다.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병이 있다. 그게 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내 편이 됨으로써 속죄할 수 있거나, 보상받을 수 있는 무언가다.

문득 설훈이 떠오른다. 나를 더듬었던 설훈, 너무 미워서 죽이고 싶은 설훈.

한정운도 같은 일을 했을까? 같은 짓을 해서 자신의 형을 상처입혔던 걸까? 모르겠다. 답은 나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한정운이 그런 짓을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할 말은 하나뿐이다.

나는 인정한다. 나는 도움이 필요하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이선준이 나를 도와준 것처럼, 이선준과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좋다. 나는 좀 더 이 삶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며칠 전이었다면 그까짓 것 필요없다고, 동정받기 싫다고, 내 몸이 탐나느냐고 소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 사이에 나는 바뀌었다. 많이 바뀌었다. 어떤 부분은 체념하게 되고, 어떤 부분은 납득하게 되었다.

나는 납득하고 있다. 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한정운이 말한 것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조건적인 내 편이 필요하다. 손끝이 달달 떨린다. 솔직히 마음이 벅차다. 이런 사람이 있구나, 아직 나에게도 이런 새로운 만남이 남아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고마워. 잘 부탁해.”

“저야말로요.”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나온다. 하지만 울지는 않는다. 울기는 싫어. 이렇게나 기쁜 순간인데 울 것까지야.

-지이이잉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전화다. 화면에는 이선준의 이름이 떠 있다.

“여보세요?”

[어디냐? 나 수업 끝났는데.]

나는 카페 이름을 말했다. 이선준은 곧 온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한정운은 나를 쳐다본다.

“선준 선배에요?”

“어. 여기로 온대.”

“조심하세요. 뭐든지.”

“이선준은 괜찮아. 그렇게 따지면 너도 조심해야 되는거 아니냐? 오히려 네 쪽이 더 수상한데.”

내 말에 한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친 간섭은 싫다. 한정운이 내 편이 되어주겠다고 했지만, 보호자 역할을 자청하는 거라면 사양이다.

이선준은 곧 왔다. 내가 한정운과 있는게 신기한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한정운은 깍듯하게 인사했다.

“너는 무슨 일이냐?”

어쩐지 이선준의 말투가 적대적이다. 네가 왜 여기에 있냐는 것 같은 말투다. 뭐야, 굳이 그럴 필요는 없잖아.

“선배랑 얘기하고 있었어요.”

“무슨 얘기?”

“그걸 제가 말해야 하나요?”

이선준의 태도가 좀 이상하다. 이선준은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그나저나 성실하게 수업을 들어간다. 나 같으면 머리 짧은 게 쪽팔려서 들어가지도 못할거다. 하지만 이선준은 머리 짧은 모습이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잘 어울린다고 해야하나. 이선준이 시비조로 나오자 한정운의 말투도 딱히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선준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한정운의 말은 제대로 된 지적이다. 이선준은 그럼 나한테 물어보면 된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무슨 얘기 했는데?”

뭐야 이거, 취조하는 것 같아. 말 못할 건 없다. 나는 볼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 뭐야 이거, 이 상황 엄청 기분 이상하다.

“나 도와준대.”

“응? 뭘?”

“그냥…. 학교 생활이나, 뭐 후배들끼리 험담하는 그런 거… 내 편이 돼주겠다고 했어.”

“한정운이 왜?”

타당한 의문이다. 한정운과 나는 친하지도 않았고 아무 관계도 없다. 그런데 갑자기 대뜸 내 편이 되어주겠다고 하면 이선준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아마 다른 수상한 목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거다. 내가 당했던 일도 있으니까. 하지만 속사정을 모르니까 그런 의심을 하는거다.

한정운의 형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이선준의 의문은 사그라들거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내가 할 수는 없다. 비밀 같은거다. 내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냥, 그런 게 있어서….”

“……..”

뭔가 이렇게 말하니까 한정운과 내가 둘만의 비밀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잖아. 엄청 수상하게 오해할만한 그런 거. 말해주고 싶은데 그건 한정운에게 실례다. 그리고 그걸 한정운에게 말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나에게만 말한 숨겨놓은 비밀인데.

한정운도 말하기 싫은 눈치다. 뭐 애초에 표정이 별로 없는 녀석이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보니 그렇다.

이 상황 어쩐지 괴로워. 이선준을 속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정운이 그냥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그, 그런데 어쩐 일이야? 끝나자마자….”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말한다. 이선준은 나를 보며 말한다. 왠지 기분이 상한 것 같은 표정이다.

“친구 만나러 오는데 이유가 필요하냐?”

“어? 아, 아…. 그건 아니지.”

“박헌영이랑 저녁이라도 먹을까 했는데 바쁜가보네, 먼저 간다.”

“안녕히 가세요.”

뭐야 이 인간 진짜로 삐쳤어. 진짜로 삐쳤다고! 이선준은 한정운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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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당 용량은 특별한 절단점이 없는 한 14kb로 고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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