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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38화 (38/224)

00038 나로 사는 것 =========================

꿈도 꾸지 않고 편하게 잔 밤이다. 그래, 사실 나는 이곳이 제일 편하다. 집은 불편해. 이제는 더 불편해졌고.

뭔가 따뜻한 것이 느껴진다. 추워, 시린 공기 때문에 나는 그 안으로 파고든다. 그 따뜻한 것이 내 몸을 감싼다. 나는 잠깐 멍하니 그러고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든다.

이런 커다랗고 따뜻한 게 있을리가 없잖아. 나는 눈을 뜬다. 나는 이선준의 품에 엉겨붙어 있고, 이선준은 그런 나를 끌어안고 있다.

뭔가 배에 닿아있다. 배라기보다, 미묘한 부분에. 뭔가 닿아있다.

“!”

나는 황급하게 몸을 뗀다. 위험했다. 방금 위험했다.

아침이라 그런거다. 아침이라서 그런다. 나도 경험해봤으니까 안다. 이건 그냥 해프닝이야.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선준은 잘 자고 있다. 자다보니까 추워서 서로 끌어안게 된 모양이다. 이선준이 깨기 전에 내가 먼저 일어나서 다행이다. 보일러가 고장났으면 빨리 고쳐야지, 왜 고생시키는거야? 짜증난다.

나는 멍하니 앉아있는다. 춥다. 이제 따뜻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아직 날이 추워. 나는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추워서 그러는거다.

이선준이 박헌영의 방으로 갔다. 그 날 밤, 나는 혼자다. 보일러는 아직 고쳐지지 않았다. 이선준은 돌아가며 말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어. 가버려.”

“화났냐?”

“화가 왜 나? 연애하냐!”

내가 으르렁거리자 이선준은 웃으며 갔다. 그래, 질척거려봐야 좋을 거 없잖아.

밤이다. 하루종일 또 과제나 했다. 글 쓰러 온 학과인데 과제에 치여서 글을 못 쓴다니, 어불성설이다. 진짜로.

방이 춥다. 썰렁하다. 혼자 있다 보면 이대로 죽어도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 때가 있다. 미이라가 되어서 두 달쯤 뒤에 발견되는거야. 두 달 가지고 미이라가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 그렇다는 얘기다. 이불 두 겹을 덮고 잔다. 어제보다 춥다. 날씨는 그대로인데 나는 어제보다 춥다.

정말로 어제보다 춥다.

그리고 어제보다 외롭다.

“아….”

내일부터는 학교에 가야한다. 모든 걸 말해야 한다. 사람들의 달라진 시선이 내게 향한다. 경멸일수도, 동정일수도, 멸시일수도, 비난일수도 있는 시선들을 감내해야 한다.

그러니까 자자, 내일은 힘든 날이 될 테니까. 일단은 자자.

수업에 들어왔다. 교양은 안 들으니까 다행. 전부 전공수업이다. 열 시 수업이다. 사람들은 갑자기 모르는 여자가 들어오자 나를 쳐다본다. 아, 가시밭길이다. 나는 아싸가 아니다. 사람들과 어느 정도 잘 지냈다. 뭐 정말 친한 사람은 박헌영과 이선준이지만 이따금 사람들과 모여서 술도 마시고 그랬다. 이선준과 같은 수업이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설원이라는 이름에 반응하면 이 강의실 전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건 당연하다는 얘기다. 출석을 부르고, 내 이름이 나온다.

“설원.”

“네.”

민트색 후드티를 입은, 처음 보는 예쁜 여자가 설원이라는 이름에 손을 든다. 교수도 전달을 못 받았을거다. 그냥 내가 아프니까 병결로 처리해달라는 이야기만 들었을 것이다. 교수를 비롯한 학생들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어…. 설원 학생을 불렀는데.”

“설원 맞아요.”

아…. 죽고싶다. 얼굴이 엄청나게 빨개져 있을게 분명하다. 다들 이게 무슨 상황인지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이미 몇 명은 이게 무슨 사태인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거다. 나는 일어난다.

“설원입니다. TS바이러스 발작으로 여자가 되었습니다. 아,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강의실 전체를 향해 인사한다. 다들 눈이 찢어질 듯 커진다. 이런 시선을 앞으로 한동안 받아야 한다. 정말 피곤하다. 많이 피곤하다.

수업 쉬는 시간에 나는 수많은 질문세례에 시달렸다. 어떻게 된거냐, 진짜 설원이 맞냐. 몸은 괜찮냐는 질문까지. 남자여자를 불문하고 나와 친분이 있었던 녀석들은 우르르 몰려왔다.

나는 적당히 설명했다. 놀라는 얼굴, 호기심에 찬 얼굴들이다. 타인의 비극은 원래 누군가에게는 희극으로 보일 수 있는거다. 뭐, 이렇게 예뻐졌으니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 하는 녀석들도 있겠지.

이선준과 박헌영은 나와 다른 수업이다. 한정운은 뒷자리에 앉아서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뭔가 짜증난다.

“우와 피부 엄청 좋아요. 완전 부럽다.”

여자 후배 하나가 호들갑을 떨며 말한다. 그 말이 괜히 울컥한다.

“그럼 너도 걸리면 되겠네.”

“네?”

“걸리면 되잖아 너도, 남자로 바뀌겠지만 피부는 좋아질걸?”

“네? 오빠 무슨 말을 그렇게….”

“그렇게? 그런데 너는 말을 그 따위로 하냐?”

생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년, 최소한의 배려가 있다면 그딴 소리는 하지 않는게 예의 아닌가? 나는 그 멍청한 후배년을 노려본다.

“내가 지금 재미있어 보이냐? 부러워? 부럽다고? 진짜로 부럽냐?”

“네? 아, 그건 아니지만….”

“꺼져. 기분 엿같으니까.”

내 분노에 주변에 몰려들었던 남자 여자들이 슬금슬금 물러난다. 귀찮으니까 꺼져. 흥미 본위의 접근에 내가 어울려줘야 할 이유 따위는 없어.

나 성격 더렵다. 내 자존감이 침해받는 것을 나는 극도로 싫어한다. 이 상황이 되고 나서는 그게 더욱 심해졌다. 피해망상적이다.

그냥 지나가듯 한 말일 수도 있다. 별 생각 없이 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싫다. 왜 생각 없이 말하는거지? 한정운과 나는 이 수업을 같이 듣는다. 한정운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뭘 쳐다봐.

쳇, 이놈의 성질.

수업이 끝났을 때, 나에게 면박을 당한 후배가 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기분 나쁘다.

“죄송해요.”

“어? 아냐 나도….”

나도 잘한 건 없으니까 사과하려 했다. 하지만 후배는 내 말을 지르고 들어왔다.

“제가 예민해진 걸 몰라서 그랬어요.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언.니.”

그리고 그 녀석은 제 딴에는 도도한 걸음걸이로 동기들과 함께 강의실을 나갔다.

“…….”

어이가 없다. 명백한 조롱과 멸시가 담긴 목소리였다. 뭐야 이거, 이딴 식으로 말해도 되는거야?

언니라는 말이 기분 나쁜 게 아니다. 남자 취급을 안 해줘서 기분 나쁜 게 아니다.

나를 여자로 규정하고, 나의 변화를 조롱하는 그 태도가 싫은거다. 나는 강의실에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 날은 정말 피곤했다. 겨우 한 강의를 들었을 뿐인데 내 이야기는 이미 과내에 전부 퍼져있었다. 말 퍼나르기 좋아하는 것들이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강의를 들었을 때, 나는 지나다니는 모든 과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았다. 누나, 형, 오빠, 언니 모든 호칭을 다 들었다.  세상에 이런 호칭을 전부 소유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니, 뭔가 웃긴다.

그리고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과를 넘어서 단과대학으로, 종내에는 캠퍼스 전체에 내 존재가 알려질거다. 누군가 사진이라도 찍어서 페이스북에 TS발병자라고 올려대면 그대로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걸 선택했다. 나로 살기를 원했고 선택했다. 그러니까 후회하지는 않을거다. 후회하지 않으려 발악할거다.

“선배, 얘기 좀 해요.”

“뭘?”

한정운이다. 한정운은 방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붙잡고 말한다. 그래, 얘기 정도야 뭐.

“커피는 네가 사는거지?”

“…….”

“뭐, 너가 얘기하자며.”

“네, 그렇게 하죠.”

공짜 커피다! 오예! 한정운이랑 얘기가 끝나면 거기서 과제나 해야지. 집은 보일러 고장나서 들어가기 싫었는데 마침 잘 됐다.

내려가는 길에 새내기들을 마주한다. 밥이라도 사 주고 올라오는 모양이다.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IT시대의 전파력이란 대단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병아리 같은 새내기들, 귀엽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아니, 이런 적은 없었나? 내가 흐뭇한 시선으로 지나가는 새내기를 바라보자 한정운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내 얼굴 주제에 누굴 귀여운 듯 쳐다보냐는 태도다.

“하나하나에 일일이 반응하지 말지?”

한정운은 대답이 없다. 우리는 근처의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야 뭐 아무래도 좋다만, 오랜만에 단 걸 먹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원래 단 걸 별로 안 좋아하지만 뭐, 가끔씩 먹는건 나쁘지 않겠지.

그리고 기껏 이 녀석에게 얻어먹는 건데 가장 싼 아메리카노를 먹을수야 없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한다.

“나는 쿠앤크프라푸치노. 휘핑크림 잔뜩 올려서.”

“…원래 단 거 좋아하세요?”

“아니, 비싼 걸 좋아해.”

악의적인 웃음에도 한정운은 순순히 계산을 한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 부자였던가? 잘 기억은 안 난다. 박헌영이 무슨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걔 입고 있는 옷 보면 답 안 나오냐?’

나는 그런 패션 브랜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이 녀석 옷 입은 스타일은 정말 좋다. 비싼 거라는 모양이지. 글도 잘 쓰고 성실하고 집도 부자.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녀석은 에스프레소 더블샷을 시켰다. 뭐야…. 취향마저 뭔가, 뭔가 달라. 나와는 다른 사람같아.

“너는 커피 마시는 취미도 있냐?”

“……그러면 안 되나요?”

“아니 안 될 건 없지만…. 그 쓴 건 무슨 맛으로 먹는데?”

나는 쿠앤크프라푸치노를 빨대로 먹는다. 엄청 달다. 뭐지? 맛있다. 엄청 맛있다. 나, 나는 이제 단것마저 엄청 좋아하도록 바뀌어버린 건가?

이상한 곳에서 나의 성별을 실감한다. 별로 안 좋아했던 단게 엄청 맛있다. 녀석은 에스프레소 잔을 우아하게 들고 한 모금 마신다. 나는 봤다. 녀석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지는걸. 엄청 쓰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

“야, 너 처음 먹어보지.”

“네. 메뉴가 다 거기서 거기라 뭐가 뭔지 모르겠어서 시켰는데…….”

“너 카페 안 와봤어?”

“지금이 처음인데요. 아메리카노밖에 안 마셔봤어요. 편의점에서.”

“그건 먹을만 하디?”

“왜 먹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 나름의 매력은 있더라고요. 근데 이건 좀…. 인간의 고행은 참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네요.”

뭐야 이거…. 대학생이 카페도 한 번 안 와봤다니, 뭣보다 이런 녀석이 처음이라니 뭔가 신기하다. 한정운은 드물게 인상을 팍 쓰더니 슈가 스틱을 부러뜨러서 그 안에 설탕을 쏟아부으려 한다.

“야, 잠깐잠깐.”

“?”

“기다려봐.”

나는 한정운을 제지하고 카운터로 갔다.

“네 손님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얼음 좀 주시면 안돼요? 그란데 사이즈 컵에요.”

“네 알겠습니다. 오백원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뭐야, 얼음도 파는거야? 너무하네. 카드는 있지만 오백원을 카드결제 하기는 좀 그렇다. 나는 알바생을 빤히 쳐다본다. 내 억울하다는 듯한 시선을 느낀 것 같다.

“안 돼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어, 어 설마? 나의 의도치는 않았지만 미인계가 먹힌건가? 알바생은 곧 그란데 사이즈에 가득 담겨있는 얼음을 가져왔다.

“여기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씀하시면 안 돼요?”

“아, 아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그 얼음컵을 들고 돌아왔다. 알바생의 흐뭇한 미소가 아른거린다. 근처의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야, 나쁜 일만 일어나서 그렇지. 사실 내 외모 엄청난 어드밴티지가 되는 이런 경우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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