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7 나로 사는 것 =========================
결국 모든 사조든 사상이든 끝이 있다. 자본주의도 언젠가는 끝장이 나겠지. 인류가 멸망하고 끝장이 나든, 변형된 맑스 혁명이 대두되든 간에.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과제를 했고, 어영부영 끝마친 뒤 박헌영의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사실 어영부영 한 건 나다. 이선준은 제대로 한 모양이야. 이선준은 쓰레기장인 박헌영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쓰레기 봉투를 먼저 샀다.
“그건 왜? 쓰레기 치워주려고?”
박헌영이 설레발을 쳤다. 이선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를 담아서 버리면 지구가 더 깨끗해지겠지.”
“….너무하는데?”
“네 삶을 존중하라고.”
그러면서 박헌영은 요리 재료를 샀다. 말했듯 박헌영은 요리를 잘 한다.
박헌영은 정말 황송하게도 찜닭을 했다. 요리 하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다 보니 무지막지한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다.
“주방 진짜 볼 때마다 좋네.”
“오로지 주방만 보고 계약한거니까.”
애초에 방도 넓다. 이선준은 주방이 뭐 어쨌냐는 듯 가만히 있다. 혼자 놔두면 맨날 라면이나 먹는 인간이다. 역시 모든 사람들이 완벽하지는 않아.
찜닭을 먹는다. 술도 마셨다. 나는 거절했다.
“속 안 좋아.”
사실 술이 조금 싫어졌다. 저번에 먹고 그 일이 일어났는데 또 먹기는 싫다. 이선준과 박헌영은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한다. 나는 설거지를 한다. 술도 안 마시니까 할 게 없다. 마시고 싶다는 생각도 불현듯 들지만 안 먹을거다.
술자리에서 술 안 마시는 것만큼 괴로운 게 없다. 둘은 방 안에서 담배를 피운다. 담배고 피우고 싶다. 흡연이 전면 금지되고 자취방에서 술 마시면서 담배 피우는게 하나의 행복이었는데.
쩝, 그래도 정말 엄청엄청 피우고 싶지는 않으니까.
-달그락
“참하긴 참하네.”
박헌영이 나를 보며 말한다.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는 폼이 꼭 어린 신부처럼 보일거다. 반응하기도 귀찮아서 안 한다. 박헌영이 내가 가만히 있자 말한다.
“앞치마 할래?”
“뭘 바라는지 너무 뻔히 보여서 짜증나거든?”
“바라긴 뭘 바래. 그냥 물 묻을까봐 그런건데.”
이 정도 장난은 이제 애교처럼 느껴진다. 그래, 그냥 평범한 장난이니까 뭐. 괜찮다. 진지한 단계로 넘어가지만 않으면 된다.
“시끄러. 설거지 안 한다?”
“잘못했습니다.”
아무리 요리가 좋아도 설거지 하는건 싫을거다. 박헌영이 우리가 오면 요리를 하는 이유는 그거다. 설거지를 나나 이선준이 해 주니까. 순전히 재료비도, 이것저것 전부 다 박헌영이 산거니까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그리고 정말 취향은 누드 에이프런이라고, 잠깐, 잠깐, 던지지 마. 그러니까 내 말은 내 취향을 강요한게 아니라는 소리야!”
진짜 확 엎어버릴까 하다가 설거지를 묵묵히 마쳤다. 술도 안 마시니까 뭣해서 나는 침대에 누웠다. 아, 설마 내가 가면 내가 누웠던 이 침대를 이 녀석 말로 ‘킁카킁카’ 하는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 방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다급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홱홱 돌리자 박헌영을 고개를 푹 숙인다.
“내 대체 얼마나 나를 쓰레기로 보는거냐….”
어, 겨우 이런 행동만으로도 내 생각을 읽은건가.
“적어도 내가 너를 어떻게 보는지 만큼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 같네.”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할 만한 일인거지.”
이선준의 말에 박헌영은 더욱 고개를 떨군다.
박헌영과 이선준은 이야기한다. 박헌영은 장르문학의 가치에 대해서, 이선준은 문학이 순수성을 담보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어찌보면 정 반대지만, 사실 말하는 건 같다.
문학은 어떠한 역할이 있다. 그 역할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모습을 취하느냐가 중요하다는거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이 중요한지, 순수한 문학으로 승부하는게 중요한지에 대해서다.
훌륭하면 결국 된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 그건 개소리. 노력이면 된다는 말은 정말 역겹다. 그건 곧 모든 실패를 시스템이나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노력의 부재라는 말로 매도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실패가 온전히 개인의 잘못일 수는 없는거야.
술을 좀 더 마시다가 집에 돌아간다. 이선준은 원룸 문 앞에서 나를 먼저 보낸다.
“담배 피우고 갈 테니까 먼저 가있어.”
“기다리지 뭐.”
“아냐 먼저 가.”
먼저 보내려는 의도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아마도 박헌영과 할 얘기라도 있는 것 같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먼저 돌아간다. 기분이 씁슬하다. 나를 빼놓고 해야 할 이야기가 생긴걸까. 벌써 그런건가. 별 일 아닐수도 있는데 괜히 서럽다.
“하아….”
감정적인 인간인 건 맞지만 요즘 더 심해진 것 같은 느낌이 부쩍 든다.
이선준과 박헌영은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한다.
“형, 계속 거기 있을거야?”
“…….”
이선준은 딱히 말 말이 없다. 박헌영이 뭘 지적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이상한 놈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선준과 설원이 같은 방에 계속 있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다.
“솔직히 불안해. 뭣보다 다른 사람들이 볼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야지.”
“그래….”
박헌영의 지적은 옳다. 설원은 자신이 발병자라는 것을 곧 밝힐거다. 하지만 이선준과 같은 방을 썼다는 것이 알려지면 안 좋은 소문이 퍼질수도 있다. 그건 이선준에게도, 설원에게도 좋지 않다.
원래가 말 지어내기 좋아하는 것이 사람이고, TS발병자는 그 소문의 먹잇감이 되기에 너무나도 훌륭하다. 남자든 여자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말을 해댈 것이고, 실체 없는 소문에 살이 붙어서 결국 사실로 굳어질 수도 있다.
“후우…. 그러네. 네 말이 맞다.”
“내 방에서 있어. 원이랑 형 둘 다를 위해서야.”
“그래.”
무엇보다 이선준은 자기 자신이 불안했다.
이선준은 곧 들어왔다. 나는 옷을 편한 것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있다.
“설원, 잠깐 얘기하자.”
“무슨 얘기?”
“나 헌영이 방에서 있어야겠다.”
“뭐야, 그 얘긴 저번에 끝났잖아.”
무슨 얘기를 하나 했더니 그런 거였나. 어차피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나도 그럴 생각이 없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
“아니, 그게 아니라 이 근처에 보는 눈도 많고, 솔직히 너에 대해서 안 좋은 소문 퍼질 수도 있잖아. 그 부분을 생각 못 하고 있었다.”
단박에 이해가 됐다. 그래, 맞다. 이미 낯선 여자와 같이 다니는 이선준의 모습이 여러 곧에서 포착되었을거다. 같이 산다는 소문까지 나게 되면, 그리고 내가 설원이라는 사실까지 밝혀지면 일어날 일은 뻔하다.
TS되자마자 걸레처럼 여기저기 뿌리는 년으로 기억되겠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이선준의 말이 맞다. 여기 있는건 위험하다. 이선준에게도, 나에게도. 하지만 그게 싫다고 생각한다. 그냥 조금은 더 있어도 되잖아.
“오늘은 자고 가.”
“생각난 김에 가야지.”
“자고 가.”
나는 빤히 바라보며 말한다. 이선준은 나를 쳐다본다. 솔직히 심심하다. 혼자 있으면 할 것도 없고, 누군가 옆에 있어주는 편이 좋다.
그렇게 생각하려 한다. 이선준은 약간 곤란한 것 같다. 뭐야, 내가 꼭 매달리는 것 같잖아.
“그럼 혀….엉은 거기 가고 박헌영 오라고 해. 심심해.”
형이라는 말 하는게 왠지 낯부끄럽다. 오빠라는 말은 더 못하겠다. 이선준이나 박헌영이나, 누구랑 소문이 나든 결과가 이상한 건 매한가지다. 나는 떼를 쓴거다. 나는 짓궃게 웃으며 말한다. 진지하지 않게, 장난치듯.
“같이 있어준다며? 하루도 안 지나서 말을 손바닥 뒤집듯 바꿨는데 내가 서운해도 되는 부분이지?”
“알았어, 자고 간다.”
이선준은 털썩 주저앉았다. 뭐 밤도 늦었는데 그닥 가깝지도 않은 박헌영 집까지 가는 것도 고역이다. 내 나름의 배려라고.
“근데 방 왜 이렇게 춥지?”
나는 냉기가 올라오는 바닥에서 벗어나 침대에 쪼그려 앉으며 말한다. 여기는 중앙난방이라서 온도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가 없다. 항상 뜨끈뜨끈하게 유지가 됐는데, 어쩐 일일까.
“보일러 고장났나보지.”
이선준은 그렇게 말하며 화장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다. 내외가 참 빠르다. 거 참, 간지럽기도 하지.
“침대에서 자.”
이선준에게 말한다.
“바닥에서 잘게.”
“까는 이불 없어.”
자취생이 이불 많아 뭐 할까. 나는 덮는 이불만 두 개 있다. 여름용 이불은 엄마가 빤다고 가져가서 지금은 없다. 바닥에 까는 이불은 침대 커버 위에 얹은거 하나뿐이다.
“그냥 덮고 자지 뭐.”
“바닥 차가워, 입 돌아가.”
“이렇게 하면 돼.”
이선준은 덮는 이불을 일부분은 깔고, 일부분은 덮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걸 보니 부아가 치민다.
“화 날 것 같아. 왜, 나랑 자면 나쁜 생각 들 것 같냐?”
“그럴리가….”
“그럼 침대에서 자, 나 추워서 이불 두 개 덮고 잘거라고.”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춥다. 공기가 서늘한 것까지 느껴진다. 이럴거면 차라리 박헌영 방에서 잘 걸 그랬나. 이선준은 먼가 떨떠름한 느낌으로 침대에 올라온다. 싱글침대라고 하지만 그렇게 좁은 건 아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렇게 넓지도 않다. 아주 살짝 떨어져 있다. 마주보고 눕기는 역시 그래서 나는 벽을 보고, 이선준은 반대쪽을 보고 누웠다. 하지만 이불을 같이 덮는다.
“춥네.”
“그러게.”
막상 같이 누우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나쁜 기억은 안 떠오른다. 그게 다행이다. 시간이 지나도 잠은 오지 않는다. 별로 특별한 기분이 들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생각이 많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
이선준은 조용히 있다. 내가 말한 사실도 잊고 점차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쯤, 이선준이 말했다.
“그럴 수 있겠지.”
서로 간지러운 말 하는 건 싫다. 그냥 이런 단순한 말을 건네고, 받을 수 있는게 좋다.
나는 잔다. 깊은 잠이다. 언제,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잠이다. 안심이 된다. 행복해질 수 있겠지. 그렇겠지. 그런 날이 오겠지. 아니, 아니야.
지금도 충분히 괜찮아.
지금도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해.
불확실한 미래보다. 차라리 이 불안정하지만 확실한 이 현재에 안주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많이 추운 밤이다. 그래도 옆에서 누군가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