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36화 (36/224)

00036 나로 사는 것 =========================

이선준은 방에 있고, 나는 누워서 책을 보고 있다. 이선준은 내 노트북으로 뭔가 열심히 쓰고 있다. 군대에 간 이후로는 내 노트북으로 단편소설을 몇 개 쓰기도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몸을 따라서 점점 여자가 될거다. 마음까지 여자가 되고, 남자를 사랑할 준비가 되면 나는 어떻게 될까? 아니면 나는 다시 여자를 좋아하게 되고, 여자를 만나서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속단할 수 없다.

내가 만약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이선준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인간적으로 완벽하고, 따뜻하고, 머리도 좋다. 나와 생각하는 것도 비슷하다. 문득 나는 납득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게 남자라면 이선준 이외에는 없다. 물론 이선준의 의견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섹스는 못 할거다. 지금 마음가짐이라면 섹스는 무슨, 스킨쉽도 무리다. 뭐야, 그건 그냥 친구잖아.

하지만 이선준과 결혼하게 될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든다.

“이봐요.”

“왜?”

“나랑 결혼하면 이상할 것 같냐?”

“뭐? 무슨 미친 소리야?”

내 돌직구에 이선준이 버럭한다.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이다. 나는 낄낄 웃으며 책 페이지를 넘긴다. 웃긴다. 친구랑 결혼이라니, 잠깐 상상해봤지만 역시나 그만뒀다. 아직은 정신적으로 무리다. 나는 즐거워져서 묻는다.

“왜, 나처럼 불쌍한 사람 구제해주는 셈 치고 평생 책임져보는것도 나쁘지 않잖아? 물론 평생 고자로 살아야겠지만. 결혼생활 십 년 정도 되면 뽀뽀 정도는 해줄게.”

“나는 플라토닉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에로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런 육체적 욕망에 충실한 사람인줄은 몰랐네.”

내 과장된 어조에 이선준은 어이가 없는지 웃는다.

“나는 영혼의 절대성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서, 육체적 관계가 없으면 사랑 또한 없다고 생각하는 아주 평범하고 남성적인 동물이지.”

맞는 말씀.

“그럼 나랑 하면 그런 마음이 생기는거야?”

“자꾸 헛소리 할래?”

아차차, 이건 실수. 장난을 치다 보니 과해졌다.

“미안, 죄송합니다.”

사과한다.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말이다.

“애초에 더 행복할 수 있는 상황을 찾으라고, 경우의 수를 주변에만 두지 마.”

“왜, 은행나무 사랑이라는 말도 있잖아.”

은행나무는 가장 가까운 이성 나무하고만 결혼한다. 멀리에 아주 매력적인 이성이 있어도 결국 곁에 있는 나무와 결혼한다. 나무가 어떻게 결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들었다.

“그건 물리적 한계에 따른 피치못할 선택이지. 인간은 행동 범위가 넓어. 식물하고 동일시하면 포유류로서 슬프지 않냐.”

“문과 주제에 이과적으로 대답하네.”

“통섭의 시대에 외길인생 살면 피곤하다.”

얘기가 재미있다. 나는 책 읽는 것도 잊고 킥킥거린다.

“아, 나 사랑해줄 돈 많은 재벌인데 결혼하면 일주일 뒤에 죽는 할아버지 없나.”

“그런 할아버지면 내가 결혼하지.”

“남자한테 넘어갈까?”

“야, 그쯤 되면 여자는 너무 많이 만나서 오히려 남자는 무슨 맛일지 궁금해 할 수도 있어.”

이선준 치고는 하드코어한 대답이다. 의외로 설득력이 있어서 나는 실실 웃었다. 이선준이랑 이야기하면 즐겁다. 문득 정말로 진지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선준이랑 결혼하면 좋을 것 같아.

물론 그런 말은 속으로만 한다. 이런 말 진심으로 하면 서로 난감하다. 내가 이선준과 그럴 수 있다는 마음을 먹은 것과, 이선준이 나에게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건 다른거다. 다른 남자들도 같다. 그들이 내 몸에 욕정한다 해서, 그들이 진심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육체적으로는 남녀관계지만, 정신적으로는 게이다.

내가 그러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도 그러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나도 이선준을 사랑하는게 아니다. 그저 편하고, 이해할 수 있는 관계가 좋은거다. 그런 사람과 오래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저 그것뿐이다.

내가 이선준을 사랑한다면 결혼보다는 연애가 하고싶을거다. 연애는 으악, 정말 못 해. 그건 정말 상상도 하기 싫다.

“근데 뭘 써?”

“과제 해.”

“과제?”

말년휴가에 과제라니, 이 인간은 징한 걸 넘어섰다. 이 정도면 진짜 괴물이잖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 나는 그냥 재학생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나도 과제가 있다.

“으악! 과제 해야돼!”

이선준은 한심하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나는 다시 급격하게 우울해진다. 이선준은 진짜 멍청이냐는 듯 나를 쳐다본다.

“왜 자꾸 그렇게 보냐?”

“너 발제 과제 있지. 비평문 쓰는거.”

“어, 그게 왜?”

“무슨 책인데?”

“개선문인데.”

레마르크의 개선문, 그게 내 발제다. 어? 나는 침대를 쳐다본다. 조금씩 읽다 보니 이제 거의 다 읽은 개선문이 엎어진 채 놓여있다.

“어….”

“너 그게 처음 집을 때 과제 해야 된다고 하면서 읽지 않았냐?”

“어…. 맞아….”

“빨리 읽어.”

“네….”

나는 다시 침대에 엎드린다.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떠들다 보니 책을 읽던 목적까지 망각해 버렸다.

등화관제를 시작하며 소설은 끝난다. 외국 소설을 보면 항상 느낀다.

잘 모르겠어.

그 나라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공감대가 형성이 잘 안 된다. 발자크도 그렇고, 푸쉬킨도 그렇다. 카프카 같은 경우에는 난해해서 모르겠고, 외국 작가들 소설을 보면 잘 모르겠다. 뭐 전부 모른다는 건 아니고, 좋아하는 작가들도 있다. 귄터 그라스라던지.

그런 면에서 보면 일본 문학은 좀 이해가 된다. 이해를 떠나서 정서적 공감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부분이 좀 있다. 지리적 근접성과 문학적 유사성은 관계가 있는걸까? 하긴, 역사적으로 맥락이 비슷하면 의식 체계도 비슷할지 모른다. 인종적 차이일수도 있고, 물론 이선준과 같은 경우에는 외국 작가들도 잘 읽고, 좋아하는 편이다.

고전 읽으면 고전한다. 진짜로 맞는 말이야. 나한테만 해당되는 것 같아서 왠지 침울해지지만.

“나 비평문 써야돼.”

호칭을 삭제하고 말한다. 형이라고 하는 것도 좀 그러니까. 그렇다고 오빠라 하기도 그렇고, 이선준이라고 자꾸 하니까 뭔가 서운해할 것 같고, 진짜 복잡하다. 나도 날 모르는데 어떡할거야. 그냥 있는대로, 되는대로 살아야지.

“나가서 할까? 박헌영 노트북 빌려서 나도 하게.”

박헌영은 데스크탑도 있고, 노트북도 있다. 여러모로 이 가난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부르주아지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런고로 우리는 나간다.

현대인들은, 특히 문창년놈들은(욕이 아니다.) 카페에 자주 간다. 정확하게 말하면 악성손님이다. 자리에 주저앉아서 몇 시간이고 앉아있으니까. 테이블 회전율이 굉장히 떨어진다. 그래서 자리가 많은 대형카페에 간다. 카운터가 보이지 않는 이층이 있는 카페라던지. 대표적으로는 스타벅스 같은 곳, 흡연실이 마련되어 있는 곳 위주로 간다.

이유야 간단하다. 겨울에는 히터 틀어놓고, 여름에는 에어컨 틀어놓는다. 오천원 육천원 들여서 하루 종일 앉아있으면 개이득이다.

그러니까 곧, 거길 가면 한두명쯤 학우들을 마주치기도 한다. 하지만 대학가가 그리 좁아터진 것도 아니고, 안 만나는 경우도 많다. 박헌영도 심심했는지 소설을 쓰다가 우리를 따라나왔다.

“야, 컴퓨터를 빌려달랬는데 너가 같이 나오면 어떡해?”

내가 말하자 박헌영은 어깨를 으쓱한다.

“그냥 구상이나 좀 하려고, 요즘 슬럼프라서 막혔어.”

그리고는 나를 보며 씨익 웃는다.

“그리고 여유로운 데이트를 방해하는 찬스를 내가 놓칠리 없…. 컥!”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나는 박헌영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흔한 말로 쪼인트를 깠다. 힘이 딸리면 기술을 쓰면 된다. 이건 군홧발로 차야 제맛인데. 운동화로 차도 충분히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다. 이선준은 나를 보며 웃는다. 방금 전에는 결혼이 어쩌니 했던 주제에 이런 말에 반응하는게 웃긴 모양이다.

남을 있을 때는 절대 안 한다고.

카페에 가서 비평문을 쓴다. 이선준은 과제를 하고, 박헌영은 노트를 펴고 뭔가를 적고 지운다.

“너 아날로그하다. 어쩌면 가장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놈이.”

웹소설 시대에 맞춰 발빠르게 적응한 녀석이 스프링노트에 구상을 하고 있는 모습은 뭐라고 할까… 인상적이었다. 원래 다른 사람 글이나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는건 실례지만, 나는 너무 보여서 대충 몇 단어를 봤다. 뭔가에 동그라미를 쳐놓고, 엑스자로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다.

안쪽? 바깥? 12? 13? 변기, 공원

뭐지, 단어가 하나같이 위험하다. 그리고 저 숫자는 대체 무슨 숫자지? 이 새끼 아직도 그 생각을 못 접은건가?

이 자식의 소설을 보는 날이 오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단어만으로도 위험한 상상을 떠올린 나도 뭔가 글러먹은 인간같다. 나는 박헌영을 폐기물 보듯 쳐다보고 내 할 일에 집중한다. 하지만 나는 결국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짤리려나…. 음…. 그럼 수치는 좀 빼고…. 역시 여러명이 같이….”

“이상한 생각을 입 밖으로 말하지 마!”

“어? 나는 이런데 원래.”

진심으로 때리고 싶어진다. 상대하는게 피곤하다.

그래도 좋다. 뭔가 내가 있을 곳에 있는 느낌이 든다. 주말의 카페에는 사람이 꽤 있다. 적당히 소란스러운 이 느낌이 좋다. 너무 조용한게 싫다. 나는 소리 속에 파묻히는 이 느낌이 좋다. 음악은 너무 크면 안된다. 너무 작아도 안된다. 옆 사람과의 대화가 방해되지 않을 정도가 좋다.

이선준은 구도자적인 자세로 과제를 한다. 나도 과제를 한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박헌영이 개소리를 하고, 나나 이선준이 욕을 하는 식이다. 이선준은 대체적으로 과묵하고, 나는 박헌영이랑 농담 따먹기를 한다.

“하루키가 우리나라 사람이었으면?”

“감옥에 있지.”

음란물 유포죄로 잡혀갔을거다. 그리고 문단에서도 개 병신취급을 받았겠지. 뒷짐 지고 구경하는 놈들에게 관대한 세상이 아니다. 실천적 사고방식에서 하루키의 포즈는 회색분자일 뿐이다. 그저 멀리서 비아냥거리기나 할 뿐. 노르웨이의 숲 같은건 이단서적이 됐겠지(우리들의 입장에서). 대학 폐쇄를 뭐 그딴 게 있냐는 식으로 비아냥거렸으니까.

뭐 나는 그냥저냥이다. 물론 1Q84는 개 쓰레기다. 논할 가치도 없다. 볼륨이 큰데 내용이 없을 수 있다는 걸 그걸 보고 알았다. 하루키는 그런 쓰레기의 제목을 1Q84라고 정한 시점에서 조지 오웰에게 사과해야 해. 무릎 꿇고 우리의 위대한 왕 인조가 했던 것처럼 삼배구고두라도 해야 한다. 조지 오웰의 무덤 앞에서.

하지만 하루키의 다른 책들은 좋아한다. 하루키의 감정선을 좋아한다.

“그런 쓰레기가 노벨 문학상 후보에 거론된다는 현실만으로도 아시아계 문학이 얼마나 천대받는지 알 수 있지.”

이선준은 그렇게 말하고 더 이상 의견이 없다. 이선준은 하루키 극혐을 외치는 인간들 중 하나다. 박헌영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글쎄, 나는 하루키 좋아해서.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오는 거라고, 그런 시각들은.”

“그건 이해가 아니지.”

“왜?”

“천편일률적인 섹스에 대한 단상이 무슨 인간에 대한 이해야? 누굴 만나도 섹스하는 새끼가 주인공이지 항상. 그리고 항상 심상을 노래로 대체한다고 심상을 다른 곳에서 차용한다는 지점에서 이미 무책임해. 출간물마다 비슷비슷한것도 그렇고, 문장과 감정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남지.”

“하지만 그 노래를 아는 사람들은 그 심상을 더 섬세하게 알잖아? 글 쓰는 사람은 오로지 글로만 승부해야 한다는 것도 편견이야. 하루키는 그 지점에서 어떻게 보면 그 부분에서 해방된거야. 포스트모던이라고.”

이선준도 꽤 편견이 심하다. 둘은 더 논쟁을 했지만,

하루키를 모르는 사람도 있으니까 여기까지. 짧게 말하자면 박헌영은 결국 팔리는 놈이 옳다는 논리다. 이선준은 순수주의자다. 뭐가 옳다고는 말할 수 없다. 팔려야만 문학인 것도 결국 사실이니까.

포스트모던이니 모던이니 하는 것들도 결국 벗어나려는 시도에서 시작된거다. 기존의 패러다임에 대한 반항같은거다. 포스트모던이 이제 지금의 패러다임이다. 언젠가는 이것도 무너진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든, 다다이즘이건 간에.

뭐 사실 나도 그렇게 제대로 아는 건 아니니까. 아는 척 말하는 것도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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