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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35화 (35/224)

00035 나로 사는 것 =========================

“어, 거기서 기다려 그냥. 다 했으니까.”

사실 조금 더 해야 하긴 하는데 조금 무섭다. 대전에 갔다온 이후로, 나는 남자가 좀 무섭다. 아무리 이선준이라도 어쩔 수 없다. 일단 키가 커서 나를 압도하는 느낌이 든다. 공포증 같은 게 생겨버린 걸까. 가까이 다가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꺼려진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요리를 한다.

북어채를 찢고, 데친 콩나물을 넣고, 간장 조금 넣고 끓인다. 참기름도 조금 넣으면 좋다. 애초에 우리집은 해장국용 재료는 항상 구비되어 있다. 내가 워낙 술을 좋아하니까. 나가서 먹기에 너무 상태가 안 좋으면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

그러고 보니 이선준은 이거 좋아하지. 뭐 그래서 만든것도 있지만.

“상이나 펴놔.”

“아, 그래.”

이선준이 밥상을 펴고, 나는 완성된 북어국을 그릇에 담는다. 원룸은 정말 열악해. 뭘 하기가 힘들다. 조리공간이 너무 좁아터져서 뭘 하기가 어렵다. 계약 끝나면 좀 더 큰 방으로 이사가야지. 이선준은 요리 저능아 수준이고, 나는 중간, 박헌영은 달인 수준이다. 그 녀석, 글 써서 돈 번다고 얘기했지? 자기가 번 돈으로 주방이 큰 원룸으로 이사했다. 여러모로 사람은 자기 생활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최고다.

나는 따로 담은 국과 밥, 그리고 반찬을 꺼냈다. 엄마가 보내준 반찬도 있지만, 어지간한 건 나도 만든다. 이게 다 위대하신 백선생님 덕분이야. 자취생들의 생활 수준은 백종원 등장 전과 이후로 역사를 나눌 수 있을거다. 뭐 전문가들은 말이 많다지만, 지들이 보르도 와인으로 무슨 짓을 해도 우리가 따라할 수는 없잖아.

“나가서 먹지 굳이….”

“집 잘 지켜준 것에 대한…. 우렁각시의 마음이라고나 할까.”

나는 웃는다. 이선준은 나를 보며 피식 웃는다. 이선준은 철벽이라서 내가 이런 걸 하는게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콩나물국에 흰쌀밥, 어묵볶음, 감자볶음과 김이다. 자취생 반찬치고는 호화롭다. 이선준은 군말 없이 먹는다.

“국이 좀 싱거운데.”

취소, 국을 한 술 뜨자마자 투덜거린다. 나는 째릿 노려보며 핀잔을 준다.

“지금까지 짬밥은 어떻게 먹고 살았대?”

“요즘 밥 잘 나와.”

군대가 좋아져봐야 군대지. 나는 이선준이 먹고있는 국그릇을 빼앗으려 한다. 이선준이 그런 내 손을 낚아챈다.

“안 먹는다고는 안 했어.”

딴에는 장난이었던 것 같지만 나는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놔!”

이선준이 깜짝 놀라서 손을 놓고, 나는 뒤로 멀찌감치 물러난다. 뭐지,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그랬다.

“야, 너 왜…. 괜찮냐?”

“어? 아, 아니…. 괜찮아. 아, 그, 그냥 놀라서….”

심장이 미친 것처럼 뛴다. 손을 잡히는 순간 어제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 양팔을 붙들고 나를 잡아두던 서준영의 모습이 떠오른다. 식은땀이 난다. 나는 숨을 천천히 쉰다. 정신병자라도 된 기분이야.

“너…. 무슨 일 있었지.”

이선준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당연한 추측을 한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아, 아냐. 그냥 놀라서, 그냥 놀라서 그런거야. 밥 먹자.”

나는 밥술을 뜬다. 손이 덜덜 떨린다. 이선준은 내가 손을 떠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이래놓고도 아무 일 없다고 하는 걸 믿는다면 그 쪽이 멍청이다.

“무슨 일인지 말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아.”

“…….”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바닥만 쳐다본다. 서럽다. 내가 왜 이래야 하지. 이선준은 어묵볶음을 밥 위에 올려 한 술 먹는다. 한 입 삼키고 말한다. 평온한 표정이다.

“힘들면 말해.”

“…….”

그 말투는 마치 오늘 날씨가 좋네 정도의 평온한 말투다. 위기감도, 슬픔도, 분노도 없다. 그저 잔잔한 말투다. 언제든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처럼 느껴진다.

“응.”

다시 밥을 먹는다. 이선준은 잘 먹는다. 너무 잘 먹어서 웃길 정도다. 이선준은 어느 새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더 주라.”

“어? 응….”

나는 한 그릇을 더 퍼온다. 국도 한 그릇 더 준다. 다시 마구 먹는다. 왠지 그게 웃기다.

“하하하! 뭐야. 배고팟어?”

“응.”

먹는 모습이 바보같다. 일부러 웃기려고 하는 것 같다.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나도 밥을 먹는다. 입맛은 별로 없지만 눈앞에서 하도 맛있게 먹으니까 나도 덩달아 맛있다.

“어제 빈속에 술 먹었더니 죽겠다 그냥.”

“누구랑 먹었는데?”

뭐야, 안 궁금하다고 생각했는데, 술 먹었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나도 모르게 물었다. 이걸 굳이 왜 물었지? 이선준이 대답한다.

“혜인이랑.”

“그래?”

서혜인은 온몸으로 이선준을 좋아한다는 걸 사방팔방으로 광고하고 다니는 것 같은 후배다. 얼굴도 반반하고 몸매도 좋다.

“둘이서?”

“어, 둘이서 먹었지.”

“아아….”

뭐야. 굳이 이걸 묻는 내가 이상하다. 아냐, 그냥 묻는거다. 그냥 궁금할 수 있는거잖아. 친구의 연애사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할 수 있는거다.

맞아. 이상한게 아니잖아. 여자친구 생기면 축하해 줄 수도 있는거니까.

“대단하네, 말년휴가 나와서 벌써부터 하나 만들어놓고 시작하고? 역시 능력자야.”

내가 그렇게 말하며 킥킥 웃자 이선준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냐는 것 같은 표정이다.

“안 사귀는데.”

“아, 그래? 뭐 사귈 수도 있는거잖아.”

“아니 별로.”

“왜? 오는 여자 안 막자는 주의잖아?”

“그거야 옛날이고, 전역까지 했는데 옛날처럼 그래봐야 좋을 거 있냐.”

흠 그런가. 하긴, 연애에 집중할 때가 아니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도 신기하다.

“그럼 애초에 둘이서 술 마신 이유는 뭐야?”

“그건 그냥 먹자고 하길래 마셨지.”

“…어장남?”

“미친 소리.”

이선준은 밥을 깨끗이 비웠다. 나도 다 먹었기에 상을 치웠다. 이선준이 설거지는 자기가 한다는 것을 나는 한사코 말렸다. 요리의 끝은 설거지다. 해주기로 했다면 끝까지 해주는게 맞다.

나는 어쩐지 웃는다. 그게 좀 싫다. 뭐가 좋은 건지도 모르면서 웃는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쉰다. 눈물이 찔끔 날 것 같다.

설거지를 다 하고 나는 침대맡에 앉았다. 이선준도 내 앞에 앉았다.

이선준에게는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내가 당한 일을 이야기한다. 설훈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그런 일을 당할뻔한 것과, 맞았던 일을 말했다.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지만 얼마 전 일이다. 나는 그 일을 침착하게 설명할 수 없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하며 점차 감정이 격해진다.

“미친 거 아냐? 나한테, 나한테 뭐라는지 알아? 비싸게 굴지 말래. 이게, 이게 정상적인 사람이 할 말이야? 비싼 척이라고? 그럼 내가 싸게 굴어야 한다는거야? 내가 그 자식이 원하면 벌려주는게 쿨한거야? 내가, 내가 남자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취급을 당해야 마땅한 건 아니잖아. 오히려 그러니까 더, 그러니까 더 그래서는 안 되는거 아냐? 나한테 중요한 건 이 몸이 아니라 관계였어. 그 관계가 변해버리고, 내 존재가 본질이 아니라 육체로 취급되는게 싫어. 그게 비싸게 구는 거고, 여자인 척을 하는 건 아니잖아. 아니잖아. 그렇지?”

이선준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눈물이 터져나온다.

“윽…... 치졸하고 비겁하고 비열한 새끼…. 나를 왜 때려? 지가 뭘 잘했는데…. 으흐흑! 그런데…. 그런데 나는 그 상황에서 사과하려고 했어. 그 새끼 말대로 사과하려고 했어. 맞는게 무서워서, 너무 무서워서 진짜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어. 진짜로, 진짜로 너무 무서워서 오줌이라도 쌀 것 같았어. 진짜로…. 진짜로….”

나는 오열한다. 이선준의 앞에서 울부짖는다. 나는 몸을 덜덜 떨고,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린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설훈의 일도 떠오른다. 내 몸을 더듬던 손길이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당하지 않은 것 뿐이야. 나는…. 나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강간당했어. 나를 보면서 벗은 몸을 상상하겠지. 나를 덮치고 괴롭히는 상상을 하겠지.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수십 번, 아니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수백 번은 강간당했어. 수치스러워, 죽고 싶어…. 으흑!”

나는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침대 위의 이불을 쥐어뜯는다. 이선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악에 받쳐서 소리친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해? 내가 뭘 잘못했어? 뭐가 그렇게 잘못된거야? 이렇게 된 게 내 잘못이야? 나는 왜 나를 아는 사람들의 그런 행동과 시선, 폭력에 아무 말도 하면 안 돼? 남자였으니까,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니까 가만히 있어야 하는거야? 이건 저주야. 정말 지독하고, 기분나쁜 저주야. 왜 나를 괴롭히는거야!”

나는 한참을 소리지르다가 지쳐서 숨을 몰아쉰다. 눈물도 말라버려서 나오지 않는다.

“잘못한 거 없어.”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겨? 왜…. 이런 일을 당하는거야?”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세상이 아니야. 너도 알고 있잖아. 이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잖아.”

그렇다. 잘못한 사람은 더욱 높이 올라가고, 선량한 사람은 손해를 보는게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이선준의 그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네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이해할 수 없어.”

무슨 말을 하려는걸까. 이선준은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영원히 이해할 수 없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우리가 할 수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리고….”

이선준다운 말이다. 우리는 영원히 이해라는 이상향에 닿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세상의 먼지 한 톨조차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거기에 따라오는 말도 나는 알고 있다. 이선준은 나를 뚫어버릴 것처럼 노려보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그리고

“행동하는 것 뿐이니까.”

행동하는 것이다. 노력하고 행동한다. 우리는 초라한 인간이다. 초라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노력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밖에 없다. 그것이 전부다. 우리는 신이 아니고, 초인이 아니다. 단지 그 정도가 끝이다. 인간의 활동 범주는 사고, 행동 이 이상일 수 없다. 이선준과 나는 세상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행동이 모여서 혁명이 되고, 사고가 모여서 이념이 된다. 작고 하찮지만, 그것은 개별적으로 소중하며 위대하다. 하찮을 정도로 작다. 하지만 작으면서 동시에 위대하다.

이선준은 나를 보며 말한다.

“너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네 옆에 있어줄 수는 있어.”

다시 눈물이 난다. 세상은 아직 나를 버리지 않았다.

“내가…. 항상 이야기를 들어줄게.”

이런 친구가, 이런 사람이 아직 내 곁에 남아있다. 나는 운다. 서러워서 운다. 슬퍼서 운다. 그리고 기뻐서 운다.

그래도 아직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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