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3 변할 수밖에 없는 것들 =========================
다음 날, 나는 잠을 자지 못하고 밤을 지샜다. 방문을 나오는데 지금 막 방문을 나오던 설훈과 눈이 마주쳤다. 설훈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잠을 자지 못한 것 같다. 그래,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걸 내가 다 알고 있는데 제대로 잘 수 있을리가 없지.
나는 설훈을 쳐다보지 않는다. 나는 일층으로 내려가 화장실에 들어간다. 슬퍼하기보다는 체념한다. 그래, 나는 이래, 누구도 날 이해할 수 없어. 누구도 나를 나로 생각하지 않아.
변기에 앉아서 항상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건 그다지 귀찮은 일은 아니었다. 진짜 귀찮은 점은 그거다. 큰 거든 작은 거든 항상 닦아줘야 한다.
나는 화장실에 우두커니 앉아있다. 참으려고 했던 건 결국 물거품이 되었다. 설훈이 사과해 온다면 받아 줄 생각이다. 가족이라는 단위는 내게 정말로 소중한거다. 이걸 지키기 위해 힘겨워했던 날들 때문에라도 나는 그래야 한다. 하지만 설훈을 예전처럼 대할 수는 없다. 나는 이제 집에 최대한 오지 않을거다. 설훈이 군대에 갈 때까지는 돌아오지 않을거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설훈이 우두커니 서있다. 이른 새벽이라 가족들은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 저기….”
무슨 말을 할지 안다. 하지만 듣고 싶지 않다. 나는 녀석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한다.
“말 안 할거야. 걱정하지 마.”
“…….”
가족이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버지는 설훈을 죽일 듯 팰거다. 엄마는 울겠지. 당연한거다. 가족들에게 그런 일을 들킨다는 건 죽음보다 더한거다. 설훈이 집을 나가지 않는 이상 괴로울거다. 가족애에 금이 간다. 정말 싫고 열받고 화나지만 이 일을 가족들에게 말할 수는 없다.
“지금은 네 얼굴 보기 싫어.“
나는 최대한 분노를 자체하며 말한다. 욕도 안 한다. 잠깐 미친개에 물렸다 생각하고 잊자. 서준영 때와는 달라. 이 가족에 남아있는 이상 나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해선 안돼. 그냥 내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마주치지 말자. 설훈은 입을 우물거린다. 사과하고 싶은 모양이다.
“미….”
“사과하지 마, 듣기 싫어. 나중에 해. 나중에.”
설훈은 아무 말이 없다. 나는 이층으로 올라간다. 풀어놓은 짐을 싼다. 애초에 짐이 많은 게 아니라서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나는 짐을 싸다가 잠시 멍해진다. 가서 또 어떻게 되는걸까. 가면 또 무슨 일을 겪게 되는걸까.
박헌영이라고, 이선준이라고 다를까? 그 녀석들도 나에게 욕정하고,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지 않을까? 나는 여자라서 이렇게 된 게 아니다. 남자였던 여자라서 그런거다. 그래서 더 쉽게 생각하는거다. 그래서 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거다.
나는 덜덜 떤다. 이선준과 박헌영도 나를 그렇게 대한다면, 나는 대체 누구를 보고, 어디를 보고 살아가야 하는걸까.
진짜로 죽을 수밖에 없잖아. 이전의 삶을 모두 부정당하고, 쌓아올린 모든 관계를 부정당하게 된다면, 진짜로 죽어버릴 수밖에 없잖아.
자신의 얼굴을 난도질하고 죽었다는 발병자가 떠오른다. 그게 무슨 기분일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작 며칠 지났다고, 나는 그 사람의 기분이 뭔지 알 것 같다. 축복받은 몸과 외모는 이 상황에서 나에게 가장 큰 저주나 다름없다.
스포츠백에 가져온 짐을 전부 되넣는다. 그 새 날이 밝았다. 아랫층에서 엄마가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린다. 미안해 엄마, 나 여기 더는 있을 수 없어. 불행하기만 해. 더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어.
“뭐 그리 급한 일이길래 그래?”
터미널에서 엄마와 아버지는 나를 보고 말한다. 나는 내 몸에 부담스럽게 큰 스포츠백을 떠안고 말한다. 나는 어색하게 웃는다.
“그냥, 과제도 좀 많고 그래서. 수업도 많이 빠져서 일단 가서 이것저것 물어볼 것도 많아.”
엄마는 기껏 왔는데 조금 더 쉬다 가라고 한다. 아버지는 말은 없지만 아쉬운 눈치다. 미안해. 하지만 더 있을 수는 없어.
설훈은 오지 않았다. 엄마는 한사코 따라오라고 했지만 설훈은 피곤하다며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나를 배려한 거겠지. 설훈의 얼굴은 보고싶지 않다.
“추운데 빨리 들어가. 나야 뭐 앉아있다가 가면 되니까.”
“원아.”
아버지가 나를 부른다. 그 묵직하고 힘있는 음성이 왠지 위로가 된다.
“내가 한 말, 기억해라 꼭.”
“응, 고마워요.”
‘너는 내 자식이다.’
그 말은 마음에 새기고 있다. 나는 이제 아들은 아니지만, 이 두 사람의 자식이다.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참았던거다. 이 가족의 울타리 안에 계속 있고 싶어서. 그것을 떠나는 것이 두려워서 그랬던거다.
아버지는 뭔가 작은 동물 바라보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서운한 것 같다. 티는 안 냈지만 딸 하나 있었으면 한다며 노래를 불렀단다. 덜컥 재앙처럼 여자가 되었지만 나는 정말 귀엽다. 그래도 아버지다.
“아, 아, 아빠….”
아버지라고만 불러오다가. 처음으로 아빠라고 발음해본다. 우와, 이거 엄청 낯간지러워. 아버지는 내 말에 당황한 것 같다.
“엄마…. 으…. 으.”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인다.
“사랑해요. 잘 지낼게요.”
진심이다. 나는 행복하고 싶다. 잘 지내고 싶다. 그런 마음을 전한다. 지금 이렇게 떠나는 것도 잘 지내고 싶어서다. 설훈과의 앙금을 시간에 흘려 없애버리고 싶어서다. 설훈이 싫다. 밉다. 구역질이 난다.
그래도 가족이야. 버릴 수는 없어. 내 마음이 무던해지도록 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아버지는 멍한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웃는다. 아버지의 이런 표정, 정말 처음 본다.
“가, 가, 갈게!”
나는 뛰어서 대전 터미널로 들어간다. 아버지와 엄마가 뒤에서 손을 흔든다. 나는 떠난다.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떠난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떠난다.
하지만 나는 다시 돌아올거야. 행복한 표정 하고 돌아올거야.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지만, 그래도 엄마와 아빠는 나를 온전히 이해해줬어.
부모라는 건 그런거다. 어떤 모습을 하더라도 자식은 자식이다. 나를 사랑해준다. 그게 너무 고맙다. 너무 고맙고 다행이다.
“우리 딸 힘내라!”
아버지의 쩌렁쩌렁한 음성이 귓가에 들려온다. 우와, 목소리 저렇게 클 수도 있나, 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쳐다본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돌아볼 수 있을리가 없잖아.
이렇게 엄청나게 울고 있는데.
말했듯, 나는 친자식이 아니다.
내 이름은 설원이다. 눈동산에 대한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내 이름의 원이 바랄 원자라는 걸 일곱 살 때 알았다. 일곱 살이다. 아직 세상에 대해 모르던 나이였다.
‘원이는 안대 그래?’
‘모르지 않을까? 큰오빠 성격에 말했으려고.’
‘에휴. 저기도 차라리 애가 안 섰으면 괜찮을 텐데 말이여.’
‘사정도 어려운데, 애를 둘씩이나 잘 키울 수 있으려나 몰라.’
나는 큰고모의 집에서 놀다가 문득 그 이야기를 들었다. 숨죽여 말하는 그 음성이 꼭 못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홀린 듯 그 이야기를 문 너머에서, 가만히 서서 들었다.
자세한 것은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알았던 것은 몇 가지였다. 우리 집의 사정이 어렵다. 아마 아버지는 이 때 사기를 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설훈은 두 살이었고 나는 일곱 살이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결혼한지 꽤 오래 되었음에도 아이가 없었다. 어머니 쪽이 문제였는지, 아버지 쪽이 문제였는지, 아니면 그냥 운이 나빴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애가 서지 않았다.
아버지는 입양을 결심했고, 나를 데려왔다. 엄마는 내 이름을 설원이라고 지었다. 바랄 원 자를 써서 설원이라는 뜻이었다. 엄마는 아이를 바랐다. 그렇게나 바란 아이가 나라는 뜻이 아니다.
엄마는 나를 입양하면서도 아이를 가지길 바랐다. 그래서 설원으로 지었다.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촌구석에서는 딸을 다섯 낳은 부모가 막내딸 이름을 말년으로 짓는 경우도 있다. 계집애 좀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는 뜻에서다. 조금 부드러운 경우지만 호남(好男)으로 짓는 경우도 있다. 남자애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뜻이다.
엄마는 나를 데려오고 나서도 아이를 갖기를 바란 것이다. 내 이름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나를 입양하고 몇 년 뒤에, 어머니는 설훈을 가졌다. 가족들은 기뻐했고, 나는 질투했다. 당연한거다. 어린애가 동생이 생긴다고 기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이유 없이 설훈을 괴롭혔다. 그냥 밉고 싫었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은 온통 그 쪽으로 쏠려 있었다. 더 어린 아이에게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운해하면 안 되는 거지만 서운해할 수밖에 없다.
나는 친척들이 말하던 말들을 기억한다.
애가 성격이 지랄맞아서, 뻐꾸기 새끼 같은 놈, 파양은 안 되는건가…. 이런 류의 말들이 들려왔다.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덩치 큰 뻐꾸기 새끼는 다른 약한 새들을 제치고 혼자 먹이를 다 받아먹는다. 뻐꾸기 새끼 이외의 새끼들은 영양실조로 굶거나 죽는다.
친척집에서도 나는 설훈을 괴롭혔다. 그 때마다 느껴졌던 친척들의 더러운 것을 보는 듯 쳐다봤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 경멸의 시선을 그제야 깨달았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알아버렸다. 그들에게 나는 남이었다. 남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설훈이 받아야 할 사랑을 내게 달라며 꽥꽥 울어대는 뻐꾸기 새끼였다. 그들은 내가 설훈에게 진짜로 못된 짓을 하면 어떡하냐고 이야기했다.
그 자리에 엄마와 아빠는 없었다. 그게 다행이다.
지금은 순수하게 생각한다. 꼰대들의 빌어처먹을 오지랖이다. 전부 골통을 부숴서 한강수에 흘려버리고 싶다. 정말 순수하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대화를 듣지 않았더라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했더라면 나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친척들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저들을 어떤 방식으로 죽여야 할지에 대해서. 물론 상상만 한다.
인생은 갈림길이다. 순간의 선택과, 잠깐의 경험 때문에 삶은 깊은 바닷 속에서 저 우주 끝만큼 다르게 변화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변했다.
나는 착한 아이가 되었다.
설훈을 항상 보살펴주고, 예뻐해주고, 아껴주는 형이 되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기뻐했다. 바보짓이다. 그런 짓 안 해도 엄마와 아버지는 나를 버리지 않을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는 불안했다.
버림받을지도 몰라, 나는 친자식이 아니니까. 기억나지도 않지만 고아원으로 돌려보낼지도 몰라.
나는 친자식이 아니니까. 나는 남이니까.
그런 것을 묻지는 않았다. 설훈에게 가는 애정과 관심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게 당연한거야. 훈이는 친자식이고, 원이는 남이거든. 그러니까 나는 항상 양보하고, 잘해주고, 어른스러워야 해.
그래야 버림받지 않아.
어른스럽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반면 학교에서 나는 폭력적이고, 신경질적이고 어두운 아이가 되었다. 나는 자주 물건을 부쉈다. 집어던지고 짜증을 냈다. 누군가가 시비를 걸면 피를 볼 때까지 두들겨 팼다.
엄마와 아버지는 학교에 불려오면 항상 의아해했다. 집에서는 천사처럼 착한 아이가 왜 학교에서는 폭력적으로 돌변하는지에 대해서.
당연한 일이다. 나는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너무 일찍 깨달았다. 학교에서의 관계는 집으로 돌아가면 끝나버린다. 연 단위로 끊어진다. 항상 새로운 아이들을 만난다. 그들과의 관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스트레스를 학교에서 풀었다.
반면 나는 가족들과 멀어지게 되면 내 인생은 회생 불가능한 타격을 받는다. 가족들에게 잘 해야 한다. 당연한 거지만 내게는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아버지는 나를 혼내기도 하고, 매를 들기도 했다. 집안에서 나는 항상 웃고, 설훈을 항상 챙겨주고, 부모님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부모님이 하지 말라고 해서 나는 학교에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그만뒀다. 나는 부모님의 말을 잘 들으니까.
하지만 풀리지 못한 스트레스는 어딘가에서 비뚤어진 방식으로 터져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