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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32화 (32/224)

00032 변할 수밖에 없는 것들 =========================

녀석과 나는 근처 카페에 왔다. 엄마가 보면 놀랄 게 분명하기에 부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있기로 했다. 설훈이 묻기에 나는 결국 어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설훈은 다시 찾아가서 죽여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나는 말렸다.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아서 나는 무기력하게 앉아있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카페 안은 따뜻하다. 나는 흐트러진 몸을 정돈한다. 머리를 제대로 한다. 그래도 부스스해 보이는 건 여전하다.

“그러니까 술 좀 적당히 마셔.”

설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술이라면 신물이 난다. 안 먹을거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서도 생각대로 안 될 거라는 건 잘 안다. 생각대로 된다면 애초에 세상은 평화롭고, 못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진짜….”

다시 생각하니 울컥 감정이 밀려온다. 나는 진정하고 다시 말한다.

“큰일 날 뻔 했어.”

“조심해.”

설훈의 말이 위로가 된다. 설훈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씨익 웃으며 말한다.

“고마우면 나 가슴 한 번 만져봐도 돼?”

“너 죽을래 진짜?”

내가 으르렁거리듯 낮게 말하자 설훈은 흠칫하며 뒤통수를 긁는다. 미친놈, 내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알면서 이런 말이 나오나? 설훈은 좀 멍청하다. 실망하기에는 내가 애초에 기대하는게 별로 없다.

“싫으면 말고.”

“너 왜 그렇게 가슴에 집착하는데?”

“아니 그냥.”

얘는 동정이다. 여자친구 아직 한 번도 안 만나봤다.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할텐데 해소할 길이 없으니, 형이었던 나는 좀 편한지 자꾸 치근덕거린다. 위험해. 정말 위험하다. 하지만 장난이다. 장난이니까 용서한다. 서준영은 위험한 선을 넘었다. 나도 이선준에게 내가 여자인 걸 이용해서 장난을 쳤다. 그런 수준이니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뭘까.

남자는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여자인 것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였던 여자다. 지금 그게 무엇보다도 큰 문제다.

여자가 아니니까 신경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슨 짓을 해도 받아들여준다는 생각을 한다. 서준영은 나를 비난했다. 왜 비싸게 구냐고, 비싸다니? 그러면 나는 남자였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인가?

그건 아니다. 나는 순결을 잃는 것을 두려워한 게 아니다. 관계를 잃는 걸 두려워한거다. 변화하는 관계가 두려운거다. 그까짓 거 개나 줘버려, 나는, 나는 내 몸이 소중한게 아니야. 달라지는 시선이 두려운거야. 다르게 살아야만 해야 하는 이 상황이 두려운거야. 내가 나로 존중받지 않는다. 내 이성과, 내 존재로 취급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단순히 ‘육체’로 취급받는게 무서운거야.

정말 너무하잖아. 사람이란 이렇게 쉽게 태도를 바꿀 수 있는건가.

“가자.”

부기가 좀 가라앉은 뒤에 나는 설훈과 같이 돌아갔다. 엄마는 무슨 일이 있는지 몰랐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핸드폰에는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서준영은 어디든 알아서 제 갈 길로 갔을 것이다.

이제 만날 일은 없을거다. 나를 때리고, 덮치려 하고, 다시 만나서 또 때렸던 서준영은 이제 내 삶에서 만날 일이 없다. 그리고 나를 때린 것보다 더 심하게, 아주 심하게 맞았다. 통쾌하지 않다.

너무 우울하다.

내 인생이 변화한 방식이 너무 거칠고 폭력적이다.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집에서 점심을 먹는다. 침대에 앉아서 책을 본다. ‘백년의 고독’ 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름이 정말 특이하다. 묘하게 하루키를 닮은 것 같은 작가의 얼굴을 보며 나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긴다. 사실 하루키하고는 전혀 안 닮았지만… 남미 마술적 리얼리즘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어렵다. 난해하다. 하지만 좋다.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좋다고 할 수는 없는거다.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고 생각할 수 있는거다. 문장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한국말로 표현한 남미소설 등장 인물의 이름은 뭔가 이상하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 레메디오스 모스코테, 뭔가 이건 이름이라기보다 노래처럼 느껴진다. 어떤 노래의 가사를 뚝 잘라서 가져다 놓은 것 같다. 백년의 고독이다. 백 년 동안 고독하다. 백 년이나 고독하다. 나는 제목과 소설의 상관관계를 생각해본다. 모르겠다.

단지 고독하다. 고독한 사람에게 고독한 이야기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슬픔 사람에게 슬픈 이야기가 위로가 되지 않는 것처럼.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저녁을 온 가족이 모여서 먹는다. 아버지는 내게 늦게 다니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하고 심란하다. 밥을 먹고 방에 올라가서 가만히 있는다.

정말 나는 옳은 선택을 한걸까. 한정운의 제안이 떠오른다. 나는 아직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미 만신창이나 마찬가지다. 학교에 돌아가서 많은 사람들이 내가 발병자라는 걸 알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는 접근하고, 누군가는 나를 속된 말로 어떻게 해보려 할지도 모른다. 뒤에서 욕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괴롭고 부담스럽다. 나는 온전히 나로 살 수 없다. 모든 걸 버리고 떠나갔어야 하는게 아닐까.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아직 내가 겪어야 할 일의 절반, 그 절반의 절반도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 돌아가지 않더라도, 그냥 남아있는게 나은 선택일수도 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남아있을지 생각해보면 두렵다.

정말로 나는, 아직 극히 일부분도 겪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떤다. 두려워 떤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샌다. 잠이 오지 않는다. 불을 끄고 누워있지만 의식은 멀쩡하다. 방문 너머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게임 중인가. 금요일이라 이거지.

설훈 때문에 오늘은 정말 큰 일을 당할 뻔 했다가 구해졌다. 정말 다행이다. 맞았던 일, 공포심에 굴복해버렸던 일을 떠올리자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그런 것에 굴하지 않는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맞는 게 두려워서 전혀 사과해야 할 상황이 아닌데도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다.

그것이 너무나 수치스럽다. 고작 몇 대 얻어맞는 게 두려워서 나는 내 생각을 꺾으려 했다. 굴복당한 기억은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동안 남는다. 나는 이렇게 만든 서준영에 대한 증오가 치솟는다. 배신감에 몸을 떤다.

점점 피곤해져서 내 의식은 점차 아래로 잠겨간다. 깬 채로 생각을 하는건지, 꿈을 꾸면서 생각을 하는건지 모르겠다. 의식이 마치 물에 젖은 종이처럼 흐늘거리는 것 같다. 그런 생각조차 점점 흐릿해진다.

너무 잠이 안 올 때, 몇 시간을 누워있으면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잠에 빠져든다. 몸이 점점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 때쯤.

-끼이이이이

조용히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의식이 몽롱해져 있다. 나는 그래서 눈을 뜰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낯선 손길이 내 몸을 더듬었을 때였다.

누군가, 나를 만지고 있다.

온몸에 소름이 쭉 돋는다. 그리고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뭐지, 또, 아직도, 여전히 내가 겪어야 할 일이 남은거야?

실눈을 뜨고 본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어진다.

설훈이다.

미친 놈, 미친 놈 뭐하는거야. 오늘 나한테 얘기 들었잖아. 그런 일 있었던 거 들었잖아. 내가 괴로워했다는 거 알잖아.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하는거야? 진짜 어떻게 이럴 수 있는거야? 나한테? 나한테 어째서?

나도 안다. 사람이란 원래 타인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게 관대하다. 내가 정말로 잠들어 있고, 아무 일도 없는 것이 되었다면

일어나야 할지, 가만히 있어야 할지 고민한다. 일어나서 뺨을 후려치고 싶다. 소리를 지르고 싶다. 하지만 나는 아주 조용히 누워있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마음과 달리 몸을 가만히 있도록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내가 일어난다면 설훈은 나를 마주해야 한다. 그 상황이 두렵다. 서준영은 친구다. 하지만 설훈은 가족이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싫지만, 친구는 헤어지면 안 만나면 된다.

하지만 설훈은 내가 이 가족과 인연을 아예 끊지 않는 이상 계속 만나야 한다. 이미 나는 설훈의 가출 사건으로 서로간의 아픈 기억을 공유하는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알고 있다.

내가 일어나면 설훈은 물러날거다. 아래층에는 엄마와 아빠가 있다. 나를 강제로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심하면 설훈과 나는 서로를 없는 사람 취급해야 할 수도 있다. 설훈과 나 사이에 또 다른 앙금이 생기는 게 너무나 두렵다. 지금처럼 평범하게 대화하기 위해 나와 설훈은 아주 오랜 시간을 서로 힘들어했다.

이 가족은 내게 전부나 다름없다. 내가 지금까지 지켜오려 했던 관계다. 다시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싶지 않다. 그건 너무 괴롭다.

나만 잠들어있는 척 하면, 없던 일로 될거다. 없던 일로 되어버린다. 나만 참으면, 나만 참으면 된다.

녀석이 내 몸을 더듬는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정도였다가. 이제는 마구 주무른다. 역겹다. 토 할 것 같다. 기분이 좋거나 이딴 생각은 전혀 안 든다. 소름이 끼친다. 나는 이를 꽉 깨문다. 빨리 가버려, 뭐든 좋으니까 빨리 하고 가버려.

내일 태원으로 갈거다. 내일 일어나면 전부 때려치우고 태원으로 갈거야. 집으로 오는 게 아니었어. 고향에 내려오는게 아니었어.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참는다. 억지로 우겨넣는다. 몸에 거대한 벌레가 올라탄 것 같다. 녀석이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거칠다. 무서워. 이성을 잃고 서준영처럼 나를 덮치려고 하면 어떡하지? 그것까지는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제발, 제발 만지는 정도로 끝내, 그 정도로 만족해줘. 그러기를 바란다.

녀석은 옷 위로 만지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지 옷 속으로 손을 넣는다. 속옷을 헤집고 들어와 내 가슴을 만진다. 섬뜩하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몸에 힘을 뺀다. 깨어있는 걸 들키면 안 돼.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차라리 처음 닿았을 때 일어나서 깽판을 쳤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든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녀석은 지금 욕정하고 있다. 이 상황은 어떻게 말로 풀어낼 수 있는게 아니다. 녀석이 이성을 잃고 더 심한 짓을 하려고 할지도 몰라.

녀석은 한참 내 몸을 만진다. 녀석이 내 하반신에 손을 옮길 때, 나는 정말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건 아니잖아. 진짜로 아니잖아. 아무리 친형제가 아니더라도 이건 아닌 거잖아. 어떻게 나한테 이런 짓을 할 수 있어?

몸이 움츠러들고, 나는 결국 소리를 내고 만다.

“흑!”

입술이, 몸이 덜덜 떨린다. 나를 만지던 녀석의 손이 순식간에 빠져나간다. 나는 몸을 새우처럼 웅크린다. 싫어, 진짜 싫어, 너무 싫어. 참고 싶었지만 참을 수 없어. 그런 거 참을 수 있을리가 없잖아.

녀석은 내가 깨어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녀석이 내 방 문을 빠져나간다. 도망친다. 사과와 화해의 말 같은 건 없다. 그저 도망친다. 머저리, 등신 같은 놈, 미친새끼.

“으으…. 으으으으으….”

나는 이상한 신음을 흘리며 이불을 뒤집어쓴다. 누가 들을까봐, 혹시 아래층에서 자고있을 엄마와 아버지가 들을까봐 최대한 숨을 죽인다. 숨죽여 운다. 서럽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걸까. 왜 이런 일이 한 번도 아니고,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일어나야만 하는걸까.

내가 남자였다면, 내 주변의 어떤 누군가가 여자가 되었다면 나도 이렇게 했을까? 아니야. 나는 그럴리가 없어. 나는 이런 짓 하지 않아. 다른 사람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길 게 뻔한 이런 짓 절대로 하지 않아.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숨죽이고 오열한다. 울부짖는다. 소리내지 않고 있는 힘껏 울부짖는다. 몇 년은 지나버린 것 같다. 내가 남자였던 순간이 모두 꿈이었던 것 같다. 너무 바뀌었다. 너무 달라졌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져야만 하지?

왜 나는 이런 일을 겪어야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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