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1 변할 수밖에 없는 것들 =========================
이것만 봐도 이 녀석과 나는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다. 나는 이미 여자다. 이 녀석은 원래 남자다. 서로 닿을 수 없다. 뭔가, 지나칠 수 없는 현실의 벽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선준도, 박헌영도, 남자일 때의 관계 모두 그대로 가져갈 수 없다.
녀석은 계속 사과한다. 점점 슬퍼진다. 이렇게나 매달리는데 용서해줘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든다. 이 녀석과 내가 쌓아온 시간들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 정말로, 정말로 소중하다. 소중한 사람이다.
친구가 몇 없는 나다. 내 중, 고등학교 시절은 없어지는게 된다. 누구와도 이야기할 수 없다.
하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다. 변해버린 관계와 내가 당한 걸 잊을 수가 없다. 녀석도 점점 한계다. 이렇게나 사과하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화가 날 것이다.
녀석은 이를 악물고 말한다. 울고 있다.
“너는 그렇게 쉽냐? 야, 우리가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몇 년인데 이제…. 내가 잘못했어. 진짜 잘못했어. 봐주라, 정말…. 너무 길잖아. 너무 아깝잖아.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이렇게 쉽게 절교하자는 말이 나오냐?”
화를 낸다. 당연한 반응이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쥔다. 너무 작은 주먹이다. 이걸로 뭔가를 때릴수나 있을까. 싶다. 나는 입을 연다.
“쉬울리가 없잖아 병신아!”
나는 악에 받쳐서 소리쳤다.
“그런 말 쉽게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나도 운다.
“안 돼, 못 해. 너는 나를 받아들일 수 없어. 인정할 수 없어. 그러니까 꺼져. 영원히 꺼져. 제발 부탁이야. 친구 하나 없다고 사람은 안 죽어. 나도 너를 받아들일 수 없어. 갈게, 따라오지도, 찾아오지도 마.”
나는 벌떡 일어났다. 돌아간다. 눈물이 줄줄 흐른다. 눈물이 많은게 아니야. 울 일이 너무 많은거야.
울지 않고는 견딜 수 없으니까 우는거야.
“야!”
녀석이 뒤에서 따라와 내 팔을 붙잡는다. 왠지 웃긴다. 헤어지는 연인같다 우리.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거다. 나는 녀석의 얼굴이 코앞에 있는 걸 본다. 어제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뺨을 맞았던 게 떠오른다.
“놔, 놔! 놔! 저리 가!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잖아!”
나는 발버둥친다. 녀석이 내 양 팔을 붙잡고 힘으로 억누른다. 뭐야, 뭐야, 뭐 하는거야. 하지 말라는데 왜 다가오는거야!
“놔! 아퍼! 아프다고! 이 미친놈아!”
“병신 같은 새끼야! 대체 왜 지랄인데! 그게 그렇게 큰일이야!”
“뭐, 뭐라고?”
나는 멍청해져서 녀석을 쳐다본다.
“했냐! 내가 했냐고! 안 했잖아! 씨발 그게 뭐라고 존나 비싼 척이야! 어! 여자도 너처럼 비싸게는 안 굴어!”
녀석이 폭언을 내뱉는다. 뭐지? 뭐라고 하는거지?
“말해! 씨발 내가 했냐고!”
“그딴 소리를….”
“했냐고 안 했냐고! 내가 쑤셨어? 진짜로 하고 이딴 소리 들으면 안 억울하지. 씨발 너는 사람 머리를 그런 걸로 후려쳤잖아! 나 죽었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하자 울분이 터져나온거다. 이 녀석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무슨 논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녀석이 날 붙잡고 마구 소리치고 있다. 잔뜩 격앙된 눈동자와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린다. 잡힌 팔이 아프다. 너무 아프다.
이런 걸 원한 건 아니다.
마음이 찢어져버릴 것 같다. 배신감을 넘어서 인간 자체에 실망하게 된다.
“안 했지? 그런데 내가 이만큼 사과하면 받아줘야 되는거 아냐? 어? 아니냐고! 너 씨발, 생각이 있냐?”
“받아들이는 건 내 마음이야! 내가 싫다고! 내가 싫은데 네가 옳고 그른 게 무슨 상관이야!”
내 말을 듣고 녀석이 피식 웃는다. 명백하게 비웃는 표정이다.
“아 씨발 이래서 여자들이란…. 아, 미안. 여자 아니지?”
“너, 너 이 쓰레기 새끼….”
모멸감이 든다. 녀석은 조소하고 있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나를 비웃고 있다. 그 시선의 의미는 명백하다. ‘제대로 된 여자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비싼 척이냐.’ 이런 시선이다.
“내가…. 내가 여자라서…. 내가 너한테 그런 짓 당할뻔한 게 화나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해? 그 이유뿐인거라고 생각해?”
“그러면 뭔데!”
“너는 나를 배신했어! 너는 나를 친구로 보지 않잖아!”
“아니 그럼 씨팔 여자가 여자로 보이지 뭐로 보여! 술 먹고 실수 좀 한 거 가지고 계집애마냥 삐져가지고!”
“계집애? 계집애라고? 삐졌다고? 미친 쓰레.. 악!”
“너 쓰레기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아파. 아파. 녀석은 내 뺨을 다시 쳤다. 눈에서 불이 번쩍하는 기분이다.
“니가 뭔데 나를 쓰레기니 뭐니, 언제까지 참으라는거냐? 씨발 그래, 나도 엿같아서 필요없어.”
“진짜…. 진짜 미친….”
“욕 그만 해라, 더 처맞기 싫으면.”
녀석은 나를 내려다본다. 눈빛이 두렵다. 일어나고 싶은데 몸에 힘이 안 들어간다. 어이가 없고 맥이 빠진다. 나는 이런 놈을 지금까지 친구라고 생각했던 걸까? 녀석은 진짜로 나를 때리려고 한다.
녀석이 참아가면서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이제 없다. 그래서 자신이 양보했다고 생각한 만큼, 나에게 화를 내고, 분노하는 것이다. 이 녀석은 이런 놈이다. 그래, 여자에게는 이런 놈이다.
나는 여자다. 맞은 곳이 아프다. 입 안에서 피맛이 난다. 내 처지가 너무 비참하다. 할 말이 더 많다. 얼마든지 저 녀석의 저열한 논리를 비판하고, 헤집어서 무참하게 만들 자신이 있다. 빈약한 논리를 파고들어서 말로 얼마든지 찢어버릴 수 있다. 그런데….
맞는 게 무섭다.
내가 더 비난할수록, 욕할수록 녀석은 날 때릴거다. 맞는 게 두렵다. 무섭다. 나는 맞을 수밖에 없다. 신체적 한계가 있다. 나는 한 번도 반항하지 못하고 맞을거다. 눈물이 난다. 슬퍼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다. 서러워서 나오는 눈물이다.
“흐끅!”
너무 놀란 탓에 딸꾹질까지 나온다. 녀석은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찌질한 새끼. 말만 존나게 많고 진짜 짜증나 너, 예전부터 좆같았어.”
“흐, 흐끅!”
말하지 못한다. 싫었는데 왜 만난거지? 묻고 싶다. 따지고 싶다. 욕해버리고 싶다.
하지만 나는 폭력 앞에 나약하다. 아파, 너무 아파. 아픈 건 싫어. 더 아파지는건 싫어. 더 맞으면 진짜로 죽을지도 몰라.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기절 했을 때 머리를 부숴버렸어야 했는데, 그런 후회가 지금에서야 든다.
“사과해.”
“흐, 흐윽! 무, 무슨….”
“사과하라고! 말 좆같이 한 거 사과해! 진짜 엿같아서 못 가겠으니까!”
나는 주저앉아서 운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 서 있을 힘도 없다. 무슨 소리야. 사과하라니, 내가 왜? 내가 왜 사과를 해?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하지만 여전히 두렵다. 녀석의 눈빛은 이미 맛이 갔다. 나를 죽이기라도 할 것 같다. 나는 진짜로 위협을 느낀다. 진짜로 죽일 것 같다.
“내가… 내가 뭘 잘못했는데…. 미친새….”
-퍽!
“아악!”
“너 따라와, 씨발 조용한데 가서 얘기하자. 너 원래 남자잖아? 어? 여자 아니라며? 여자로 보는거 싫다며? 남자 대 남자로 얘기하자고.”
“놔! 놔! 놓으라고!”
녀석이 나를 어딘가로 끌고간다.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진짜로, 진짜로 무섭다. 나는 녀석의 손에 질질 끌려가고 있다. 저주스럽다. 내 인생이 저주스럽다. 나는 질질 끌려가며 도망가려 한다. 하지만 공포에 젖은 몸은 이미 내 통제를 벗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힘도 안 들어간다. 사과해야 해,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게….
-퍽!
“억!”
“!”
갑자기 둔중한 소리와 함께 내 팔을 잡고 끌던 손이 없어졌다. 서준영이 자신이 끌고가려던 골목에 처박혀 있다. 뭔가 거대한 것이 거기로 달려간다. 곰 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하다. 나는 멍청히 주저앉아서, 울면서 그 형체를 본다.
그 곰이 볼품없이 널브러져 있는 서준영을 집어올린다. 멱살을 잡은 채 얼굴을 때린다.
-뻑! 뻑!
사람과 사람의 몸이 부딪히는데 저런 소리가 날 수 있구나, 나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한다.
“억! 윽!”
서준영의 몸이 구겨진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저렇게 덩치가 큰 건 하나밖에 없다.
“어디 씨발 대낮에 여자를 패!”
-뻑!
“설훈?”
“너는 뒤졌어 이 씨팔새끼.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설훈이 내팽개쳐져 있는 서준영을 쓰레기처럼 밟는다. 밟는다기보다 짓이긴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걷어차고, 밟는다. 서준영은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심하게 밟힌다. 진짜 저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그, 그만 해! 그만! 그만 해!”
나는 필사적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설훈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다. 서준영은 그 짧은 시간에도 얼굴이 피투성이였다. 눈빛에는 명백한 공포가 어려있다. 설훈 정도 되는 사람을 만나면 누구라도 일단 겁먹는다. 그런 사람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표정으로 노려보고, 그리고 엄청나게 얻어맞았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하다.
“놔 봐, 아주 죽여버릴 테니까.”
“지, 진짜 진짜 죽는단 말이야!”
“진짜로 죽여버릴거야. 이 새끼가 감히 누구를….”
“안 돼, 안 돼.”
“형…. 아니, 누나는 이 새끼 걱정하는거야? 이 새낀 누날 때렸어!”
이 와중에도 이 녀석이 나를 누나라고 부르는 게 왠지 웃기다. 누나 누나 노래를 부르더니, 진짜 좋은가보다. 서준영은 덜덜 떨며 뒤로 물러나고 있다. 나는 벽은 짚은 채 위태위태하게 서서 서준영을 쳐다본다.
“아냐, 너 살인자 되는게 싫어. 감옥 가잖아…. 가자. 그냥 가자. 응?”
“그래도….”
“부탁이야. 제발 가자.”
“후….”
설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게 다가오다가 갑자기 뒤를 돌았다.
-뻑!
“억!”
“안 죽었으니까 괜찮지?”
서준영이 날아가서 골목에 처박힌다. 설훈은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다. 서준영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 걱정은 전혀 되지 않는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이미 서준영이라는 인간에게 실망했고, 모든 애정을 상실했다. 감정이란 이다지도 쉽게 증발한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는다. 허망하고 허무하다.
“괜찮아?”
“나….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나는 설훈을 보며 말한다. 눈물이 난다. 맞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안심한다. 그런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눈물이 난다. 겨우 폭력 따위에 굴복했다. 폭력 따위가 두렵고 무서웠다.
폭력 때문에 내 의지를 배반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려 했다.
“미안해. 업어줘.”
“응.”
설훈이 나를 업는다. 등이 아주 넓다. 나는 번쩍 들어올려진다. 시선이 갑자기 위로 올라가니 꼭 나는 기분이 든다.
“고마워.”
내가 말한다.
“동생인데 뭘.”
나는 설훈의 등에 얼굴을 묻고 운다. 그 말이 고맙다. 설훈이 동생이어서 다행이다. 이런 덩치 큰 동생이 있어서 다행이다. 때마침 동생이 봐줘서 다행이다. 이런 착한 동생이어서 다행이다.
“흐윽…. 으으….”
“우쭈쭈. 울지 마.”
설훈이 내 엉덩이를 토닥인다. 나는 울다가도 설훈의 등을 깨문다.
“아, 아퍼! 미안! 미안!”
“흑….”
쓰레기처럼 구겨진 서준영은 어떻게 될까.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도 잘못한 게 있으니까.
오늘 친구를 한 명 잃었다. 모든 것이 쓰레기만도 못하게 되었다. 나는 운다. 서러워서, 슬퍼서, 추해서, 수치스러워서 운다. 설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