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0 변할 수밖에 없는 것들 =========================
다음 날, 나는 늦게 일어나서 우두커니 침대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지만 자꾸 떠오른다.
서준영의 뜨거운 숨, 발악하는 나, 그리고 내 몸에 당장이라도 들어올 것처럼 벌떡이는 그것.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혀를 깨물고 싶어진다. 그런 것이 몸 안에 들어온다는 것이 이상하다.
그런 게 어떻게 들어가지? 왜 들어가는거지? 왜 들어가야만 하는거지?
실제로 그런 것은 세상에 없는 것 같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것 같다. 나도 했지만, 어째서인지 비현실적이다. 무엇보다 ‘내 몸에’ 그런 것이 들어온다는 상상 자체가 잘 되지 않는다. 아플 것 같아. 엄청 아플 것 같아. 이런 작은 몸에 그런 게 들어가면 내 몸은 찢어져 버릴지도 몰라.
두렵다. 그런 현실을 마주하고 나니 두렵다. 섹스 같은 건 절대로 못할거야.
“욱….”
또다시 구역질이 올라온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떠오른다. 서준영은 왜 그래야만 했을까. 나는 아직도 팔다리가 떨린다. 몸에 힘이 잘 안 들어간다. 마치 나와 내 육체를 연결해주던 연결고리 같은 것이 끊어져버린 느낌이다.
맥이 탁 풀려서 손끝 하나 까딱할 힘도 없다. 하지만 나는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덜덜 떤다. 마치 감기 환자처럼.
알고 있다. 녀석의 술버릇에 대해서, 하지만 그 술버릇이 나에게까지 해당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다.
-우우우우웅!
나를 안심시키고, 나를 불안하게 하는 전화기 진동이 계속 들린다. 진동을 무음으로 바꿔놓는다. 화면이 계속 켜진다. 전화가 온다. 계속 오고 있다. 벌써 수십통째다.
서준영의 전화다. 녀석은 죽지 않았다. 그래서 안심이 된다. 하지만 자꾸 전화가 온다. 그게 나를 불안하게 한다. 받고 싶지 않다. 전화를 받지 않으니 카톡이 온다. 알림화면에 뜬 글자를 나는 멍한 표정으로 본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다. 전화 좀 받아줘.]
[진짜 할 말이 없다. 내가 죽일 놈이다.]
잘 알고 있는 녀석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술 취해서 진짜…. 아, 진짜 미치겠다. 진짜 술 때문에 그런거야.]
그건 나도 알고 있어.
[내 술버릇 알잖아…. 나 미친놈 되는거, 진짜 미안하다. 정말로. 전화 좀 받아주면 안되냐?]
[죽고싶다 진짜. 아 내가 너한테 대체 왜…. 진짜 미안해.]
전화가 오고, 카톡이 오기를 반복한다. 죽어줬으면 좋겠어. 나하고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죽어줬으면 좋겠다.
나는 핸드폰 알림과 전화가 오는 것을 바라본다. 눈물이 나도 모르게 툭 떨어진다. 정말 친한 친구다.
나에게 정말 소중한 친구다. 언제나 나를 이해해주고,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준 소중한 친구다.
너와 나는 왜 이런 상황을 겪어야만 했을까. 너는 왜 그런 술버릇을 가졌고, 왜 그 날 우리는 술을 그렇게 마셨고, 왜 너는 나의 몸을 욕망했을까.
왜 나는 여자가 되어야만 했나. 그래서 왜 내게 중요한 친구를 그런 시험에 들게 하고, 패배하게 하고, 나는 배신감을 느껴야만 했나.
답은 어디에도 없다. 단지 결과만 있다. 녀석은 나를 갖고 싶어했다. 술김에 그런 거라 하더라도 그건 명백하다. 실수라고 넘어갈 수는 없다. 나는 나를 성적 대상으로 보는 사람을 친구로 둘 수 없다. 수치심의 문제다. 발가벗기는 듯한 그 시선을 참을 수가 없다. 녀석의 시선을 접한 것만으로도 나는 강간당한 기분이 들 것이다. 나는 예민하다. 심각할 정도로 예민해서 그런 것을 참을 수 없다.
녀석의 잘못이 있듯, 나의 잘못도 있다. 생각했어야 한다. 녀석의 술버릇, 그 타겟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서준영을 너무 믿었다. 그러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아니었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 일어날 거라는 의문조차 가지지 않았다. 나는 당해야 할 일을 당했다.
하지만 실수라 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이미 어떤 계단을 뛰어넘어 버렸다. 그 일 이후로 녀석과 나 사이에는 어떠한 간극이 생겨버려서, 그것은 넘어갈 수 없다. 나는 녀석을 볼 때마다 나를 강간하려 했던 그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괴롭힐거다. 인생은 외길이다.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생각하자 온 몸에 소름이 끼친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고, 카톡 메시지를 보낸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친다.
하지만 거기서 가장 큰 것은 역시, 배신감과 분노다. 뺨을 맞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저항하는 나를 제압하기 위해, 잠잠하게 만들기 위해 녀석은 내 뺨을 때렸다. 나는 분노를 담아 메시지를 보낸다.
[연락하지 마. 쓰레기 새끼야.]
전화가 다시 오고, 카톡 메시지가 온다. 온통 미안하다는 얘기뿐이다. 아무런 대답도 할 생각이 없다.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하나 있다.
서준영과 내가 친구였던 것을 없던 일로 하자. 앞으로 만나지 말고, 서로의 인생을 살자. 너무나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사실 잘 지낼 수 있었던 게 이상했어. 그런 쓰레기 같은 놈.
나는 쓰러진다. 자야겠어. 자고 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아.
“얘, 얘 원아.”
잠들어 있던 나를 깨운 것은 엄마다. 나는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몸이 무거워.
“왜?”
“친구 왔어.”
“응?”
“걔 있잖아. 준영이.”
“아!”
나는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난다. 그래, 집으로 찾아올 수도 있다는 걸 생각했어야 한다. 녀석과 나는 서로의 집을 알고있다.
“너 보러 왔다는데? 그거 얘기 했어?”
“나, 나 있다고 했어?”
“그럼 없다고 하니?”
그건 그렇다. 엄마에게 말할까? 어제 그런 일을 당했다고.
아니야, 말할 수 없다. 엄마는 그럼 서준영을 죽이려고 날뛸거다. 아버지가 알게 되면 서준영은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죽이는 것은 안된다. 엄마나 아버지가 죄인이 되는 것은 싫다.
“안으로 오라는데 굳이 밖에서 기다리겠다는데? 한 번 나가봐.”
“…….”
나가기 싫다. 정말로 싫다. 하지만 내가 밍기적거릴수록 엄마는 이상하다고 생각할거다. 나는 천천히 일어선다. 머리가 산발이다. 안 말리고 자서 그렇다. 나는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슬리퍼를 신는다. 츄리닝 차림이다. 나는 대문으로 나간다. 문 너머에 녀석이 있을 것이다.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문을 열지 않고 말한다.
“무슨 낯짝으로 여기까지 오냐?”
고운 말이 나갈리가 없다.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 내가 진짜 미안해. 진짜 미안하다. 잘못했….”
“얘기 하기 싫어. 꺼져.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
“제발, 야, 진짜 미안하다. 잘못했다. 내가 뭐 어떻게 하면 돼? 진짜 내가 미쳤어. 미친놈이야. 진짜 잘못했어. 안 그럴게, 진짜 안 그럴게.”
“제발 꺼져.”
“문 좀 열어주면 안되냐,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얘기라도 하자. 응?”
“싫어, 니 얼굴 보고싶지 않아.”
나는 돌아선다. 뒤에서 녀석이 애원한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나를 때렸고, 덮치려 했던 녀석이 이 문 뒤에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다리가 휘청거린다.
“야, 너가 항상 말했잖아. 화를 내는 것도, 사과하는 것도 얼굴을 마주보고 해야 되는거라고. 진짜 이러지 마, 나 진짜 미칠 것 같아. 진짜 알잖아, 너 나한테 제일 중요한 친구라는거. 문이라도 열어줘, 얼굴이라도 보고 얘기하자.”
그래, 그렇게 말했다. 얼굴을 보고 얘기해야 서로의 진심을 알 수 있고, 그래야 더 마음이 잘 전달되는거라고 말했다. 눈을 보고 얘기하자고 말했다. 항상, 누구에게나 그래왔다. 그건 이선준의 말이다.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한 사람일 때 얘기잖아. 나는 네 진심같은거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아. 어제부로 확실해졌잖아. 그러니까 부탁한다. 꺼져줘.”
“야, 나 죽는 꼴 보려고 그러냐. 내 인생에 제대로 된 인간관계 너밖에 없어. 너 없으면 진짜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진짜 사과할게, 네가 하라는 거 다 할게, 진짜 내 자지라도 잘라버릴까? 그러면 용서해줄거냐?”
이러는 모습을 보니 꼭 구애라도 하는 것 같다. 왠지 웃기다.
나는 돌아선다. 친구가 나 하나뿐이다. 성격이 나보다 더 지랄맞아서 그렇다. 녀석의 말이 어쩐지 웃기다. 녀석에게 친구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나도 안다. 어제의 일은 불가항력적인 사고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서준영을 만나고 싶지 않다. 이것도 불가항력이다. 어쩔 수 없다. 정말 화가 나고 배신감을 느끼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런 마음은 점차 옅어질거다. 나는 조소하듯 말한다.
“진짜 자르라고 하면 안 자를 거잖아.”
“아니야! 할게! 할게! 한다고!”
“지금 해, 잘라버려, 잡아뜯어버려. 그럼 용서해줄게.”
녀석이 그럴리가 없다는 걸 안다. 아무리 우정이 소중하다 해도 그런 짓을 할리가….
-지이익
지퍼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정정, 정정해야겠다. 이 자식 진짜로 하려고 한다. 뭔가 벗는 소리가 들린다. 미친놈이, 아무리 사람이 적다 해도 여기 남의 집 대문 앞이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있다.
“미, 미, 미, 미친놈아!”
-덜컹!
나는 대문을 연다. 녀석이 속옷까지 홀랑 내리고 있다. 흉물스러운 물건이 덜렁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녀석은 어디서 주워왔는지 수박만한 돌을 들고 있다. 녀석은 멍청하게 내 얼굴을 쳐다본다.
“치, 치워! 치우라고!”
“어, 아, 알았어!”
-쿵!
녀석은 돌을 내려놓는다. 그거 말한 게 아니야!
“그거 말고 그거 치우라고!”
속이 울렁거린다. 다시 보니까 더 역겹다. 무슨 죽은 동물처럼 보인다. 나는 헛구역질을 한다. 나도 저런 게 있었다. 하지만 어제의 경험과 합쳐지니까 세상에서 제일 징그러운 물건같다. 녀석은 바지를 급하게 추켜올린다. 그리고 무릎을 꿇는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잘못했어!”
“….”
문을 열어버렸다. 녀석은 울고있다. 나도 울고싶다. 너는 왜, 너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이렇게나 후회할 거면서. 하나밖에 없는 친구를 잃게 되리라는 걸 알았을 텐데. 나도 안다. 남자란 그렇다. 원래 그런 동물이다. 너무나 잘 안다. 그러니까 이해해야 하는걸까? 그건 모르겠다.
그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자.
“따라와.”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아서 춥다. 녀석은 외투를 허겁지겁 벗더니 나에게 주려고 한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선다. 무섭다.
“야, 이거라도….”
“가까이 오지 마, 진짜로 가까이 오지 마, 다섯 걸음 이상 떨어져 있어.”
“아, 아 그래….”
인근의 공원으로 향한다. 겨울이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벤치에 앉는다. 녀석은 나와 멀리 떨어져 앉았다.
“거기서 들어.”
“어….”
“얼굴 보고 얘기할거야. 두 번 말 안 해.”
나는 녀석을 똑바로 쳐다본다. 내 안에서 이미 결론은 나 있다.
“너는 나를 배신했어. 너는 나를 때렸어. 강간하려고 했어. 내가 싫다고 해도 너는 나를 제압하고 강제로 하려고 했다고.”
“미안, 정말 미안해.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경찰에 신고 안 하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그렇게 말하고 숨을 깊게 들이켰다.
“나는 여자야. 여자가 됐어. 너의 여성관은 스스로도 알다시피 개 쓰레기고, 나는 거기에 어울려주고 싶지 않아. 이제는 피곤해. 너를 이렇게 쳐다보고 있는 것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아. 뭘 해야 되냐고 물어봤지? 잊어버려, 나라는 사람이 있다는 거 잊어버려. 연락하지 말고, 찾아오지 마.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야, 제발 그것만은…. 진짜 내가 잘못했어. 한 번만 용서해줄 수 없을까?”
“안 돼. 못 해. 네가 여자도 때리는 구제 불가능한 쓰레기라는걸 안 이상 절대로 못 해.”
나는 단호했다. 아, 정말 싫다. 오래됐고 질긴 인연이다. 끊어내는 것은 정말 한 순간이다. 하지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이 녀석은 정말 간절하게 매달리고 있다. 친구관계는 평등해야 한다. 이렇게 사과하고, 누군가가 용서하는 것은 연인관계다. 친구들 사이에서 관계의 우위는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