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9 변할 수밖에 없는 것들 =========================
“으응? 으… 우….”
설원은 이상한 소리를 내고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서준영은 설원을 부축하며 가게를 나왔다. 너무 작아서 부축하는 것이 힘들어서 서준영은 설원을 그냥 업어올렸다. 늘어진 사람을 업는 건 힘든 일이지만 설원은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집에…. 전화해야 돼에에….”
“집 간다….”
서준영은 설원을 업고 비척대며 걸었다. 자신도 취기가 아찔하게 올라와 있는 탓에 정신 차리기가 힘들었다. 길가는 취객으로, 2차, 3차 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서준영은 설원을 업고 한참을 걸었다. 등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이 어느 때보다도 섬뜩하게 다가왔다.
서준영도 잘 알고 있다. 인간의 몸은 정말 놀랄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하다. 술기운 때문에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이 계속해서 밀려온다. 설원은 의식이 없으면서도 떨어지지 않으려 서준영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디 가아?”
서준영의 귓가에 약간 들뜬 것 같은 설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험하다. 술 마셨는데도 숨결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약간 젖어있는 것 같은 음성이 위험할 정도로 서준영의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흘리지 마 미친….”
“으응….”
묘하게 신음소리 같은 것도 낸다. 서준영은 지금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힘을 쓰니까 취기가 더 올라왔다.
버릇은 무섭다. 서준영은 이런 경험이 많았다. 술 먹고 떡이 된 여자를 모텔로 데려간 경험이 정말 많았다. 그렇다. 버릇은 정말 무섭다. 서준영은 갑자기 멈춰서서 자신의 생활습관을 진심으로 바꿔야 되는지 고민했다.
“아….”
서준영은 주변에 모텔이 즐비한 거리에 들어와 있었다.
“아, 아…. 씨…. 아 진짜….”
힘들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술에 취한 애를 집에 돌려보내면 설원의 아버지에게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잠깐 들어가서 쉬다가. 애가 술이 좀 깨면 돌려보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 자기합리화다. 서준영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최면을 걸 듯 그 생각이 굉장히 설득력 있게 들렸다. 설원의 아버지는 정말 무섭다. 진짜 뼈도 못 추릴 수도 있었다.
‘그래 잠깐…. 잠깐 쉬었다가….’
그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이미 그의 걸음은 모텔로 향하고 있었다.
서준영은 대실이 아니라 숙박 요금을 지불했다. 서준영의 손은 덜덜 떨렸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설원을 들쳐업은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모텔에 들어가서 설원을 침대에 내려놓았을 때도 서준영은 아직 약간 이성이 남아있었다.
“으응….”
설원은 침대에서 몸응 웅크린 채 누웠다. 침대에 눕자 아예 곯아떨어져버린 것이었다. 서준영은 그런 설원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성의 끈은 이제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사실 술은 마시면서는 그렇게 취하지 않는다. 취기가 늦게 올라오기 때문이다. 오히려 술을 다 마시고, 집에 가면서 필름이 끊기는 경우가 더욱 많다.
‘아….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지.’
서준영은 후드티 위로 올라와 있는 설원의 가슴 굴곡을 쳐다봤다. 아까 닿았던 그 부분을 한 번이라도 만져보고 싶었다. 서준영은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는 설원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잡티 하나 없이 매끄러운 하얀 피부였다. 몸에서 나는 냄새는 달콤하다.
서준영은 여성의 몸을 만지는 것도 좋아했지만, 그보다 여성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좋아했다. 향수 냄새나 샴푸 냄새가 아니라 몸 자체에서 나는 냄새를 좋아했다. 솔직히 외모보다 침대에 가면 그런 살냄새가 사람의 마음을 더욱 아찔하게 했다. 그리고 그 냄새는 사람의 몸에서도 귀 뒤나 목덜미 부분에서 나기 마련이었다.
참기 위해 마지막으로 마셨던 술기운이 올라왔다. 서준영은 이성을 잃었다. 그는 설원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깊게 들이쉬었다. 지금껏 맡았던 어떤 냄새보다 향긋하고, 달콤했다.
술을 많이 마셨다. 머리가 아프고 골통이 웅웅 울리는 기분이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정신이 제대로 안 차려진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머리가 너무 아프고, 속이 메스껍고, 뭔가가 내 몸을 자꾸 만지고, 쓰다듬고, 닿고 있다.
가슴 부분에 자극이 느껴진다. 미끌하고 뜨거운 것이 닿는다. 간지러워서 몸을 비튼다. 뭐야, 귀찮게. 졸려. 나를 내버려 둬.
하지만 다시 한 번 뭔가 닿아온다. 귀찮다. 귀찮아 죽겠다. 머리가 아파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나를 내버려 둬. 몸을 비틀고 엎드려 누웠다. 뭔가가 자꾸만 내 몸을 만진다. 나를 만지는 손길은 뜨겁다. 뭔가를 갈구하듯 어루만져온다. 뭐야, 귀찮게….
그리고 갑자기 다리가 확 젖혀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리가 양 옆으로 벌려지는 것과 동시에, 뭔가 내 몸이 개방되었다는 불길한 예감이 번쩍 든다. 순식간에 의식이 번쩍 하고 켜진 느낌이다.
“앗!”
나는 몸을 앞으로 빼며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위를 쳐다봤다. 노란 조명이 있다. 노랑 조명을 등지고 선 누군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뭐야. 뭐야 이거, 이거 무슨 상황이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해. 내 눈앞에 있는 그것은 옷을 입지 않고 있다. 벌거벗은 몸으로 나를 어루만지고 있다. 나도 알몸이다.
나는 지금 덮쳐지고 있다.
“누, 누구… 누구에요?”
“가만히 있어봐.”
“!”
목소리가 익숙하다. 그것은 나를 제압하려 움직인다. 그리고 노란 조명에 잠깐 비친 얼굴을 본다. 서준영이다. 뭐지? 뭐야 이거, 뭐야, 얘가 왜? 대체 왜?
“미, 미, 미, 미쳤어? 미쳤어 너? 뭐야. 뭐 하는거야! 비켜!”
“아 좀! 귀찮게 하지 마!”
“악!”
녀석은 내가 벗어나려 하자 나를 찍어 누르고 양팔을 붙잡았다. 한 손만으로 양팔이 구속되었다. 아무리 힘을 써도 몸을 움직일 수 없다. 녀석은 내 다리를 벌리고 그 안으로 상체를 밀어넣으려 한다. 나는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왜, 왜 이래! 꺼져! 꺼져! 뭐 해! 뭐 하냐고!”
“보고도 모르냐?”
눈빛이 맛이 갔다. 이 녀석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그 와중에 나는 그걸 본다. 녀석의 하반신에 있는 그것을, 뭔지 안다. 이제는 없지만 나도 있었다. 녀석이 뭘 할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저걸 나에게, 나에게 하려는거다. 무섭다. 나는 몸부림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으윽! 놔! 놔! 미친 새끼야! 놔!”
녀석은 말없이 하려는 일에 열중한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면 제대로 할 수 없다. 내가 계속 몸을 뒤틀며 어떻게든 안 하려고 하자 녀석은 인상을 쓰며 버럭 소리질렀다.
“아 씨팔 가만히 있어! 뭐 얼마나 중요한 거라고! 씨발 여자 되니까 니가 진짜 여자같냐? 그냥 좀 줘!”
“주, 주긴 뭘 줘…. 이 미친!”
-짝!
“악!”
“가만히 있으라고.”
아파, 아파, 아프다. 정말 세게 얻어맞았다. 나는 저항할 생각도 잊은 채 멍하니 있었다. 맞았다. 친구에게 뺨을 맞았다. 친구가 나를 강간하려고 한다.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이해조차 되지 않는다. 머리아파, 머리도 아프고 뺨도 아파.
녀석이 내 무릎을 잡고 벌린다. 무섭다. 조금만 가까이 오면 들어온다. 저런 게 들어온다니, 상상도 할 수 없다. 상상도 못 해. 하기 싫어, 죽을거야.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협이 든다. 어떻게? 어떻게 몸에 저게 들어가?
크기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몸에 뭔가 들어온다는 상상만으로도 두렵다.
“제, 제발… 이, 입으로 해줄게, 입으로…. 하지 마. 하지 마…. 응?”
“입으로? 좋지.”
녀석이 그 말에 반응한다. 알고 있다. 이 자식이 좋아하는 게 입으로 하는 거라는 걸. 나한테 자랑했던 것들은 대개 입으로 여자가 해줬을 때의 얘기다. 녀석은 그 말에 내 다리를 놓더니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나는 덜덜 떨며 녀석의 몸 위로 올라간다. 무섭다. 너무 무섭다. 뭐야 이거. 뭐야. 뭐야. 이런거야? 이런 거였어?
내가 걸린 병은, 이런 거였어? 모멸감과 수치심 때문에 미칠 것 같아. 흥분 때문에 거칠게 서 있는 녀석의 물건이 눈앞에 있다. 나는 알몸, 녀석도 알몸이다. 냄새 나, 진짜 이상한 냄새 나고, 구역질 나고, 토할 것 같다.
“소, 소, 소, 손으로… 손으로 하면.”
“아 입으로 해준다며어!”
녀석이 소리를 지른다. 이걸 손으로 잡아뜯어버리고 싶다. 짓뭉개버리고 싶다. 하지만 나는 안다.
고통보다 분노가 클 때, 고통은 잠시 잊혀진다. 내가 때려도, 이 녀석은 따라올 수 있다. 이 방을 나가기 전에 나는 잡힌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렵다. 단지 강간당하는걸 떠나서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 녀석은 여자를 때린 적은 없다고 했다. 그건 거짓말이다. 이제 알겠어. 이 녀석은 여자까지 때리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다.
하고 싶지 않아. 하고 싶지 않아. 정말 하고 싶지 않아!
정말 하고 싶지 않은 건, 하기 싫다.
나는 결심했다. 정말 하기 싫어. 하기 싫은 건 하지 않아.
-퍽!
“억!”
-퍽!
“이, 이 씨발!”
“죽어. 이 미친새끼. 죽어.”
나는 그 녀석의 음낭을 전력으로 내리치고 한 손으로 잡아뜯어 버릴 듯 움켜쥐었다. 나는 굴러 떨어지듯 침대맡으로 내려갔다. 녀석은 벌떡 앉아서 자신의 물건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한다.
“악! 아! 아으!”
나는 옆을 바라본다. 휘두를만한 것, 그런 것을 찾는다. 침대 옆 테이블, 거기에는 유리 재떨이가 있다.
“죽어!”
-뻑!
전력으로, 이 몸으로 낼 수 있는 전력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그 자식의 머리를 내리쳤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진심으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내리쳤다.
“꺽!”
죽은건지, 기절한건지 녀석은 앉은 자세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유리 재떨이가 바닥에 떨어지며 쿵! 하는 둔중한 소리를 냈다. 다시 주워서 내리칠까 했지만 곧바로 이성이 돌아왔다. 도망쳐야 해, 뭣보다 도망쳐야 해.
녀석은 죽은 듯 미동조차 없다. 나는 손발을 덜덜 떨며 속옷을 주워입고, 바지와 후드티를 입는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몇 번이나 주저앉는다.
“흐, 흐흐, 흐흐흐….”
나는 우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낸다. 핸드폰과 지갑을 챙긴다. 이 상황에서도 나는 소지품을 잃어버리려 하지 않는다. 그게 왠지 웃기다.
이 상황이라면 홀딱 벗고 튀어나가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옷을 주워입고 있다. 그게 너무 웃긴다.
“흐. 흐흐.. 흐흑!”
눈물이 터져나온다. 웃긴다. 옷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고, 나는 이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나를, 모텔 복도의 CCTV에 내 알몸이 찍힐까 두려워서 옷을 입고 있다.
이 상황이 웃기다. 내 처지가 웃긴다. 녀석은 여전히 자빠져 있다. 죽었을까?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 쉽게 죽기도 한다.
모르겠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몇 번이나 주저앉는다. 걸어 갈수가 없다.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는다. 온몸이 덜덜 떨린다. 나는 모텔 복도를 걷는다. 약한 조명이 켜저있는 모텔 복도에서 나는 몇 번이나 주저앉는다. 무릎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간다.
녀석이 갑자기 일어나서 나를 잡으러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나는 힘겹게 일어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엘리베이터는 아주 천천히 올라온다. 나는 계속 이상한 소리를 낸다.
“흐흑! 흐… 으윽! 윽! 으… 아….”
온몸에 남은 미끌미끌한 느낌, 다리가 벌려질 때 느꼈던 수치심, 그것을 입에 넣으려고 고민했던 순간들이 스쳐지나간다. 바로 몇 분 전의 일인데, 수십년 전 일처럼 멀게 느껴진다. 그 자리에 있던 건 진짜 나였을까?
술이 문제다.
술 때문에 여자가 되었고, 또 술 때문에 친구에게 강간당할뻔했다.
아니, 술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안다. 재수가 없는 탓이다. 지독하게 재수가 없는 탓이다. 재수가 없어서 TS바이러스에 걸렸고, 하필이면 제일 친한 친구가 저런 쓰레기였다.
나는 비틀거리며 모텔 카운터를 지나 바깥으로 나온다. 밤늦은 거리, 아직 사람들은 몇 지나다닌다. 나는 전봇대를 붙잡는다. 고개를 숙인다. 나는 몇 번 심호흡을 한다.
“우웨에에에엑!”
구토를 했다. 모든 걸 게워내 버릴 것처럼.
다리가 풀려서 택시 정류장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빠졌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바보처럼 길거리에 주저앉는다. 술은 다 깼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울렁거리던 속은 좀 괜찮아졌다.
택시에 탔다. 장소를 말하자 택시는 조용히 출발한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가만히 있는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보고싶지 않다.
죽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이 어제다. 그 결심은 하루만에 깨진다.
죽고싶다.
정말 그 어느 때보다 진심으로 죽고싶다. 택시기사는 나의 그 행동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볼이 뜨겁다. 따끔따끔할 정도로 쓰라리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너무 두려워서도 그렇고, 너무 온 힘을 다해 몸부림치고, 때리고, 휘두른 탓에 온몸의 근육이 안 아픈 곳이 없다.
녀석의 머리를 내리칠 때 느꼈던 묵직한 느낌은 아주 섬뜩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죽어버렸을 수도 있다. 진짜로 죽었으면 어떡하지?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든다. 택시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을 본다. 고층 건물의 불은 꺼져있고, 술집의 불빛은 아직 밝다.
밤이 싫다. 밤이 두렵다. 이 밤이 나를 어딘가로 삼켜버릴 것 같다.
고향에 오지 말걸, 서준영에게 연락하지 말걸.
하루에 몇 개씩이나 후회해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
하지만 삶을 뒤로 돌릴 수는 없다. 사는 건 그래서 힘들고 슬프다. 너무 괴롭다.
가로등 불빛이 스쳐지나간다. 춥다. 외롭다. 세상에 혼자 떨어져버린 기분이다. 원래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인다.
“아가씨.”
“네?”
목소리가 갈라져 있다. 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한다. 나는 택시에 탓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울고있다.
생각해보니 나는 눈물이 많은 게 아니다. 그저 울 일이 많다. 울어야만 할 일이 너무나 많이 생긴다. 울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일들이 자꾸만 닥쳐온다.
“눈 오네요.”
나는 고개를 들고 창 밖을 다시 바라본다. 하늘을 보니 눈이 내리고 있다. 삼월의 눈, 늦은 눈, 이번 겨울 마지막 눈이 내리고 있다.
“아….”
눈이 온다. 함박눈은 아니고, 싸라기눈도 아닌, 그저 몇 송이 떨어지고 있을 뿐인 눈이다. 기사 아저씨는 내게 눈 이야기를 왜 했을까. 울고 있는 여자에게 눈이란 무슨 의미일까. 모르겠다. 아무 의미가 없을수도 있다.
“우리 딸래미가 눈을 좋아해서요. 눈 좋아하세요?”
“…...네”
제설하면서 눈을 많이 치웠다. 그래도 나는 눈이 좋다. 설원, 내 이름이 생각난다. 전혀 관계없지만 나는 눈을 보면 내가 생각난다. 나를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온 세상에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설원이 된다. 그런 상상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감상은 지금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그 눈을 보며 생각한다.
어쩌면 이게 내 생애 마지막 눈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년의 눈을 볼 수 있을까?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두렵고 두렵다.
아저씨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나를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은 고맙지만, 지금은 그저, 그저 어딘가에 홀로 앉아서 죽음 같은 잠의 세계로 몸을 던지고 싶다. 잠들면 아무 생각도, 아무 느낌도, 아무 고통도 없다.
단지 그 잠을 자각할 수 없는 것만이 서럽다. 눈을 감았다 뜨는 것만으로도 나는 고통에 다시 빠질 테니까.
택시는 눈 오는 도로를 달린다. 눈발은 옅다. 이 눈발은 세상을 설원으로 만들기에는 턱없이. 턱없이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