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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28화 (28/224)

00028 변할 수밖에 없는 것들 =========================

하지만 이 녀석은 내가 뭐라고 하든 항상 이렇게 살고 있다.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녀석은 시무룩해져서 한숨을 푹 쉬었다.

“너 오늘따라 말이 좀 심하다.”

“더 심한 말도 할 수 있어.”

“그렇게 생겨서 쫑알쫑알거리니까 귀여워서 때리지도 못하겠고.”

“뭐?”

내가 버럭 노려보자 녀석은 질린 표정으로 슬슬 일어났다. 설마 제대로 듣지도 않은건가. 뭐 나도 내 말에 저 녀석이 삶의 노선을 바꾸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냥 그릇된 일이라는 사실을 계속 주입시킬 뿐이다. 이 녀석은 자꾸 합리화를 하려고 해서 이렇게라도 해줘야 한다. 그나저나 귀엽다니, 친구한테 그런 얘기 들으니까 소름이 오소소 돋을 줄 알았는데 그냥 평범하게 웃겼다.

뭐라고 해야할까, 이 녀석은 그런 말을 어물쩍 할 수 있다. 별 생각 없이 습관처럼 하는 말이다보니 별로 거부감이 들지도 않는다. 오 카사노바, 이런 게 스킬인가.

“담배나 피우러 가자.”

피씨방, 카페, 술집 전면 금연화로 인해 담배는 이제 어지간한 곳에서는 전부 나가서 피워야 한다. 나는 녀석을 따라 나갔다. 불을 당기고 빨아들인다. 담배 피우고 싶다.

“담배 없냐?”

녀석이 담뱃갑을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몸 바뀌니까 담배 안 땡기고 받지도 않아. 이 김에 끊으려고.”

“그건 부럽네.”

그 부럽다는 말도 별로 상처가 되지 않는다. 뭔가 실없어 보여서 나도 신경쓰지 않게 된다. 그냥 뭐라고 해야 할까…. 이선준과 박헌영을 만나면 나는 온몸을 곤두세우고 있는 기분이다. 모든 대화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하지만 이 녀석과 얘기하면 편하다. 방금 전의 대화를 제외하면 거의 실없는 얘기다. 사소하게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술집 밖에는 담배를 피우러 나온 사람들이 꽤 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한 번씩 흘긋 쳐다본다. 그렇게 절세미녀는 아니다. 하지만 충분히, 조금 과할 정도로 예쁜 외모다. 쳐다보는게 당연하다. 나는 빨간색 후드티와 스키니진, 그리고 빨간색 운동화를 신고있다. 오늘의 컬러는 레드. 그런 느낌이다. 이런 깔맞춤 한 번 해보고 싶었다.

“니 말이 맞는 것 같다. 나는 솔직히 그래. 내가 병신이고 이기적인 것도 알아.”

“알면 그렇게 살지 마.”

“좋아하고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여자는 하나 있어.”

“그냥 또 한 번 자고싶다 이런 거 아니야?”

내 말에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마치 뭔가를 상상하는 것 같은 표정이다.

“아니, 그래서 더 신기해. 누나거든? 졸업한 누난데 원래는 별 생각 없었단 말이야. 근데 저번에 만나서 같이 밥 먹었어.”

“그게 왜?”

“그냥 말도 잘 통하고, 얘기도 잘 되고 그랬어. 그냥 좋더라고, 그렇게 예쁘지도 않은데. 집에 가는 내내 웃고 있더라고, 그냥 평범하게 재미있었던 것 같아. 여자 만나면 항상 그런 생각 한단 말이야.”

녀석은 나를 보며 말했다. 밤이라 그런지 점점 더 추워진다.

“어떻게 하면 자빠뜨릴까.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모텔로 갈까 그런단 말이야.”

“응, 그래서?”

“그런 생각은 하나도 안 들더라고, 아니, 일부러 해봤는데 내가 존나 쓰레기처럼 느껴졌어. 꼭 신성모독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가. 이 녀석도 그런 사람을 만났구나. 평생 정신적 고자로 살 것 같았던 서준영도 자신이 좋아하게 되는 사람을 만났다. 잘 되든 안 되든, 이걸 계기로 서준영은 한 단계 변할거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만났는데, 솔직히 좋은 것 같아.”

“그런데 왜 없다고 했냐 아까는?”

“몰라, 사랑이라는게 어떤건지 한 번도 못 느껴봤으니까. 나도 이게 사랑인지, 그냥 잠깐 오는 호감인건지 모르잖아.”

“등신아, 그게 좋아하는거야.”

“그런가?”

녀석은 씨익 웃는다. 나는 그걸 보며 생각한다. 멋진 웃음이다. 뭔가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것 같다. 나는 이 녀석이 정말 쓰레기고,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여자들이 얘를 만나고 망가졌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입었다.

하지만 그래도 내 친구다. 정말 소중한 친구다. 아무리 시궁창이고, 쓰레기같이 살아온 삶이더라도 행복해질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정의가 세상에 있다면 이 녀석은 엄청나게 불행해질거고,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건 없다. 그러니까 이 녀석이 행복해져도 큰 문제는 없다.

“춥다. 다 폈으면 들어가자.”

“그래.”

우리는 들어가서 술을 더 마셨다.

“가족들은 뭐래?”

“그냥, 다 받아들였지 뭐.”

“다행이네.”

“그게 있잖아….”

나는 어제 일어났던 해프닝을 말해줬다. 아버지가 나를 내 여자친구인줄 알고 아무 말도 안 하다가 갑자기 버럭 화내며 나를 찾으러 마구 뛰어다녔다는 것, 아버지가 당황해서 허둥지둥했다는 것도 말했다. 녀석은 내 부모님을 안다. 나도 이 녀석 부모님을 안다. 그런 친구다.

“뭐? 너네 아빠가?”

“대박이지!”

녀석은 그야말로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나도 다시 떠올리자 웃음이 비식비식 새나왔다. 정말 아버지 성격에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뭐야, 방금 내 말투 묘하게 여자같았다. 이 녀석이 나를 보는 시선도 왠지 묘했다.

“….”

“….”

서로 말없이 잠깐 쳐다봤다.

“대, 대박이네! 하하하하하!”

녀석이 먼저 맞장구를 쳤다. 뭔가 타이밍 이상하잖아 이 자식아. 그래도 고맙다. 받아줘서. 나는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도 모르면서 웃었다. 술을 더 먹는다. 나와 녀석은 조금 취했다.

“야, 근데 솔직히 섹스만 하는게 나쁜거냐? 원래 그러려고 만나는건데…. 아냐? 너도 해봤으니까 알거아냐?”

다른 테이블 사람들에게 안 들려서 다행이지, 만약 들렸다면 나와 이 녀석의 관계를 다들 엄청 이상하게 생각했을거다. 순진하게 생긴 여자가 껄렁하게 잘생긴 남자랑 둘이서 섹스니 어쩌니 하는 얘기를 하고 있다.

녀석의 여성비하 발언은 계속됐다.

“여자는 다 그래…. 솔직히 좀 멍청하지 않냐? 존나 대가리에 든 것도 없으면서 아는척은…. 조또 모르면서 무슨 예술영화는…. 아 열받아. 솔직히 여자는 그냥 가랭이나 벌리면 돼. 다른 거 필요없어.”

듣다 보니까 열받는다. 아까는 좋아하는 여자가 어쩌니 하더니 결국 이 놈은 이런 자식이다. 나는 녀석을 노려봤다.

“그럼 나도 똑같냐?”

“뭐?”

“나도 지금 여자잖아.”

“야, 무슨 말이…. 말이 그렇다는거지 너는….”

“나도 지금 여자야. 너가 말하는 것처럼…. 나도 그래. 나도 이제 생리하고, 나도 이제 임신하고, 나도 남자랑…. 남자랑 섹…. 그런 거 할 수도 있어. 너 말처럼 나도 그래야 한다는 말이지?”

“야, 너 웃자고 한 말에 왜….”

“하나도 안 웃겨. 열받고 짜증나…. 내가 여자가 되서가 아니라. 그냥 인간적인 시점에서 엄청 불쾌해. 그딴 얘기좀 그만 해, 존나 싸구려같아 너.”

참지 못하고 심한 말을 했다. 나는 이런 원색적인 비난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술을 먹어서 그런지, 여자가 되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짜증이 확 치솟았다. 서준영은 남녀에 대해 확고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다. 나의 둘도 없는 친구지만 내가 여자가 된 시점에서 이미 글러먹은 걸수도 있다.

“야, 너 말이 좀 심하다? 뭐? 싸구려?”

“그래, 너 싸보여.”

나는 서준영에게 으르렁거렸고, 서준영도 기분이 나쁜지 처음으로 신경질을 냈다.

여자는 보지만 달려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의외로 많다. 나는 안 그랬지만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특히 군대에서 많이 봤다. 여자는 좆집에 불과하다는 둥 말하는 태도를 나는 정말 심각할 정도로 혐오했다. 나는 내가 마초남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여성을 존중한다는 뜻에서였다. 여성이 약자라는 걸 인정한다는 것에서였다.

여성을 성적 도구로 대상화하고, 그것이 여성의 존재 이유라고 말하는 것이 나의 마초성은 절대로 아니다.

나는 여성을 그딴 식으로 말하는 것이 쿨한 거고, 여자를 많이 따먹은 것이 자랑이 되는 그 쓰레기 같은 남성적 사고가 싫다. 그것이 곧 경쟁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나이를 막론하고 어른이 덜 된거다.

남자일 때도 그런 것을 싫어했는데 나는 여자가 되었다. 싫다는 것에서 하나의 감정이 더 추가된다. 수치심이 든다. 나의 존재 자체를 격하시키는 것 같다. 이런 말 해봐야 서준영은 그냥 유난 떨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 이선준과 박헌영과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준영과는 힘들다. 대화가 안 통한다.

그래도 내가 서준영과 오랜 친구인 것은 간단하다. 녀석은 나를 보며 눈을 부라리더니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푹 쉬었다.

“아…. 그래, 내가 네 입장 생각을 못했네. 미안하다. 기분 나빴지?”

녀석이 표정을 풀었다. 이 녀석은 친구에게만큼은 무조건 져준다. 정말 무조건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그래, 이 대한민국, 아니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의 남자들은 거의 비슷한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이 녀석은 그 중 하나일 뿐이다.

여성이 존중받고, 여성성에 대한 고찰을 당연히 해야 하는 환경에서 대학생활을 했던 내가 조금 특별했던 걸지도 모른다.

“나도 심하게 말해서 미안해.”

나도 심하게 말한 걸 사과한다. 서준영은 웃으며 말한다.

“아 짜증나.”

“뭐가?”

“이제 니 앞에서 여자 욕 못할거아냐.”

“다른데 가서 해.”

“야, 내가 다른 데 가서 이런 얘기 하겠냐? 하면 그 자리에서 파묻혀.”

그래, 다들 그런 생각을 숨기고 산다. 녀석은 평소의 스트레스와 성적 편견을 나에게만 쏟아내고 있었다. 나라도 받아줘야 하는건가 싶기도 하지만 역시 아니다. 자꾸 이런 얘기를 들으면 정말 인간적 부분에서부터 혐오해버릴 것 같다.

우리는 술을 더 먹었다. 그리고 나는 핸드폰을 넣어둬서, 무음으로 바꿔놓아서 집에서 계속 전화가 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 전화를 받았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나중에 나는 후회했다.

(여기부터 3인칭)

서준영은 여성편력이 심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이보다 큰 문제가 있었다. 서준영은 술을 마시면 여자를 건드리는 버릇이 있었다. 남자가 가질 수 있는 최악의 술버릇 중 하나였다. 본인도 여자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 술버릇은 자의와는 상관이 없는 거였다.

“야, 너 근데 진짜 이쁘다….”

설원은 주량이 약해진 탓에 정신을 못 차리고 서준영의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밤이 늦은 시각이었다.

서준영은 설원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그의 오랜 친구였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이만큼 예쁜 여자를 만난 것은 그의 기억에 없었다. 자꾸만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마음이 동했다.

그저 남자는 궁금할 뿐이다. 눈앞의 여자는 어떤 느낌일지. 여자를 많이 만나본 서준영은 보자마자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설원의 몸은 정말 최고일 것이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에는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성욕은 무슨, 그런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래도 정상적인 도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언제나, 술이 문제다. 서준영은 지금 꾸벅꾸벅거리고 있는 설원을 보며 욕정이 일었다.

“에이 썅!”

서준영은 술잔에 소주를 따라서 마셨다. 참고 있는 것은 훌륭하지만 그것은 최악의 행위였다.

“아, 집에…. 집에 데려다 줘야지….”

여기 더 있다간 무슨 일을 해버릴지 몰라서 서준영은 비틀거리며 술값을 계산했다. 설원은 귀여운 모습으로, 추운건지 허벅지 사이에 양손을 넣은 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다. 작지만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야, 야, 야! 일어나.”

서준영은 설원의 볼을 툭툭 건드렸다.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설원은 그 부름에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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