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27화 (27/224)

00027 변할 수밖에 없는 것들 =========================

“니가 어떻게 알아? 내 태도가 그런지.”

“너는 여자를 구멍 이상으로 생각 안 하잖아.”

“아니거든? 아니거든아니거든?”

사람을 많이 만나는 사람이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하는건 아니다. 한 명, 두 명과 깊고 오래 사귀는 사람이 오히려 인간에 대한 이해도는 깊다.

인간은 깊은 존재다. 몇 번 만났고, 그 사람의 습관, 그 사람의 성격, 그 사람의 인생을 알았다 해서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한 사람을 오십 년 만났어도 그것은 같다. 우리는 절대로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단지 다가가려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연애다. 온전한 이해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그 차이를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메꾸며 만나는 것이다.

나는 여자를 많이 만나보지 않았다. 두 번 만났고, 연애기간은 반 년 정도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들을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서준영은 그런게 없다. 서로의 의견이 상충하고, 부딪힌다면 헤어진다. 양보가 없다. 이해하지 못하면 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게 욕한다. 여자들의 이상한 점에 대해서. 그리고 여자를 다시 만난다.

서준영은 내 주변 사람들 중에서 여자를 제일 많이 만나봤다. 평범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만났다. 하지만 이 녀석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여자를 제일 모른다.

“존나 웃기지 않냐? 내가 싫다고 했다니까? 싫다고 하면 안 하면 되는거잖아. 그런데 그게 하고 싶대. 그래서 양보했어. 양보해서 그거 해줬다고. 그리고 할 때는 진짜 그냥 싫은 티 안 내고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했어. 그런데 다음에 뭐라는지 아냐?”

“뭐라는데?”

“헤어질 때 나한테 서운하다는거야. 내가 하고 싶다고 했는데 싫다고 했다는 말이 서운하대. 미친거 아냐? 했는데 왜 지랄이야? 그래서 내가 해줬더니 왜 그러냐고 했더니 해줬다고? 해 준거라고? 아 그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런다니까?”

“허….”

전 여자친구와 헤어진 경위에 대한 얘기였다. 이렇게 들으면 진짜 이상한 여자를 만난 것 같다. 하지만 싸움에 대한 것은 양 쪽 이야기를 전부 들어야 한다. 유명한 말이 있지. 이소라의 노래 ‘바람이 분다.’ 라는 노래에 나오는 가사다. 내가 정말 명심하고 살아가는 말이기도 하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같은 추억도, 같은 기억도 누군가에게는 행복하게, 누군가에게는 불쾌하게 기억된다. 싸움의 원인도 그렇다. 서준영이 말한 것과 달리, 그 여자는 서준영이 먼저 잘못했던 순간, 즐겁게 놀았다고는 했지만 때때로 불쾌한 표정을 드러냈을 이 녀석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보호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애정이다. 애정, 사랑, 이런 것들은 서로에 대한 불만과 슬픔을 누그러뜨리고 함께 하게 만든다.

나는 문과지만 수학적으로도 설명해볼 수 있다. 상대에 대한 불만과 서운함에 대한 총량이 애정의 총량을 초과하게 되면 싸움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애정 수치를 과하게 초과하는 불만과 서운함이 생기면 헤어지게 된다. 단순하다.

하지만 산다는 건, 사람을 만난다는 건,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하고 함께한다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말로는 쉽지만 말처럼 되는게 사람 인생이던가.

서준영은 어딘가 비틀려 있는 인간이다. 자존심이 매우 강하다.

“옛말 틀린거 하나도 없어. 북어랑 여자는 삼일에 한 번은 두들겨 줘야 돼.”

좀 짜증나는 말이다. 하지만 이 녀석은 그래도 여자를 패지는 않는다. 그냥 울분에 받쳐서 하는 소리다. 하지만 여자가 된 입장에서 기분은 좀 나쁘다. 남자일 때는 별 생각 없이 들었는데 이 상황이 되니까 기분 이상하네. 참 빌어먹게도 고맙다. 이 녀석은 나를 진짜 설원으로 보고있다. 겉모습이 여자니까 말은 가려서 해야지 이런 태도가 아니다. 이거 기뻐해야 되는건가?

“나는 언제까지 그런 공허한 관계 유지하면서 살거냐는거지. 여자를 만나도 제대로 만나라는거야.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네가 성적 매력을 느끼는 대상 말고.”

이 녀석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본 적이 없다. 그냥 연애 한 번 해보고 싶어서 아무데나 찔러봤고, 그게 됐다. 그 이후로 이 모양이다. 이 녀석에게 연애는 그냥 장난같은거다. 그래서 쉽게 흥미를 잃거나, 다른 매력적인 대상이 나타나면 떠난다. 아니면 감정적으로 질척해지는 순간 양보하지 못하고 싸운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이 녀석은 상대에 대한 불만이 생기면 곧바로 싫증을 낸다.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양보할 마음 자체가 없다. 그리고 헤어진 다음 말한다. ‘역시 여자들이란 이해할 수 없어.’

본인은 스스로 사랑에 대한 불감증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다르다.

“그런 마음이 안 드는걸 어떡하냐? 얘 아니면 안되겠고, 계속 보고싶고 이런게 사랑이잖아? 나는 누구한테도 그런 마음 가져본 적 없어. 여자를 너무 많이 만나서 여자들 만나면 뭐랄까, 몇 번 대화하면 얘가 어떤 앤지 보여. 얘랑은 어떤 식으로 싸우게 되겠구나 하는거? 그리고 그 상황이 와, 그리고 싸워. 헤어지지. 항상 이런 식이야.”

“그 순간을 피해야 하는거 아냐?”

“내가 왜?”

이런 식이다. 양보에 대한 합리적 이유가 없으면 양보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상대가 말도 안 되는 일로 화를 내거나, 필요 이상으로 감정적으로 나온다 싶으면 역으로 엄청난 분노를 터뜨린다.

“더 잘 지내고 싶고, 더 오래 만나고 싶은게 사람 마음 아냐?”

“그다지, 그냥 다른 애 만나면 되는건데 뭘 그러냐? 귀찮아. 감정 낭비라고, 그렇게 만나다 보면 얘 문제점은 뭔지, 다른 애 문제점은 뭔지도 보여. 그리고 대개 그게 맞아. 조금 못생겨도 좋으니까 그런 단점 없는 여자 만나고 싶어.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여자 있을리가 없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 없는 이유는 그거야. 여자를 너무 많이 만났어.”

가끔은 이 녀석의 논리가 역겹다.

“야, 개소리 지껄이지 마. 내가 제대로 말해줘? 니가 왜 여자를 왜 못 좋아하는지?”

화난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녀석의 잔에 술을 따르고 있다. 우리는 다시 한 잔 마신다. 엄청 친한 친구라고 하지만 나는 이 녀석에게 좀 가혹하다.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욕을 한다. 술이 조금 올라오는 것 같다. 혀가 조금 마비되는 느낌이다. 나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면서 입을 연다.

“여자를 많이 만난 거랑은 전혀 상관없어. 개 풀 뜯어먹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너는 여자를 너와 같은 존재라고 상정하고 있지를 않아. 같은 층위의 존재로 상정하고 있지를 않다고.”

“이 새끼 또 문자 쓰네.”

녀석은 피식 웃는다.

“너는 항상 여자의 결점만 말해. 그리고 그 여자의 결점과 이상한 행동을 지적하면서 항상 지적인 수준에서 좀 딸린다는 걸 상정하고 말한단 말이야. 너는 그 여자를 이해해준다고 말한다고.”

“이해해주는게 나쁜거냐?”

“당연히 나쁘지.”

내 말에 녀석은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다. 무슨 헛소리냐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네가 주긴 뭘 줘? 이해해’준’다.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 너는 그 이해를 배려라고 상정한단 말이야. 그건 배려의 각도에서 바라볼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면 당연히 전제되어야 하는거라고, 싫어도 상대를 존중하니까 같이 하는거야. 상대방의 즐거움을 이해하기 ‘위해서’ 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한국말 아 다르고 어 달라. 이해해준다고 여기는 순간 너는 그 여자에게 맞춰준다는 식으로 너는 심리적 우월감을 얻는단 말이야. 내가 너를 배려했다. 고마워해라. 이런 태도를 가지는데 여자가 당연히 안 빡치겠냐? 이해해주는게 아니라. 이해한다. 이게 되어야 한다고.”

“야, 그건 좀 너무 심하게….”

나는 녀석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무슨 개소리를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말은 아직 안 끝났다.

“반면에 너는 여자가 너를 이해해’준’ 경우에 대해서는 굉장히 인색하지. 흔히 말해서 네가 콘돔 안 끼고 섹스하는거. 그건 이해의 층위에서 다뤄야 할 문제가 아니지? 그건 오로지 여자가 너를 이해해준 경우야. 그건 상대방의 자존감을 말살시키는거야. 단순히 네 쾌락을 위해서 상대방은 엄청난 부담을 가져야 한다고. 그런 부분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아. 너는 네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시켰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말해. 너도 좋고, 나도 좋았으니까 내가 나쁜게 아니라고 말하잖아.”

“야, 그건 안전한 날에 계산 다 해가면서 한거야.”

“지랄하네, 피임은 언제 어디서고 항상 안전한 건 없어. 저번에 여자친구 생리 늦는다고 아주 오만상을 쓰고 나한테 징징댔던 건 누구냐?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너는 여자를 너와 동등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아. 여자는 네 설득에는 항상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게 해야만 하지만, 너는 여자의 이기적인 행동은 항상 태클을 걸고, 배려도 아닌 배려를 가지고 빚이라도 지운 것처럼 행동한다고. 이게 동등한 관계로 보여? 그러니까 당연히 사랑할 수 없지. 여자를 그냥 구멍으로 보고 있는데, 너는 구멍을 사랑할 수 있냐?”

내 신랄한 독설에 녀석은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소주를 한 잔 마셨다. 내가 엄청 심하게 말한 것 같지만 내가 딱히 여자가 되어서 그런 건 아니다. 나는 항상 이렇게 말해왔다. 녀석도 내가 이렇게 말하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도 자기가 잘하고 있다는 생각은 절대로 안 한다.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