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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26화 (26/224)

00026 변할 수밖에 없는 것들 =========================

아직 알아야 할 게 산더미만큼 많다는 얘기와 함께 나는 엄마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질 세정제는 자주 쓰면 안 좋지만 하나 있어야 한다고 하니 엄마는 하나 사러 가자고 했다.

“너 속옷이랑 이런 건?”

“샀어. 지원금 받은거로.”

“필요한 거 없어?”

“응….”

“목욕탕이나 다녀 와.”

“지, 진짜 싫다고!”

“엄마 안 갈 테니까 다녀 와!“

“죄 짓는 기분이란 말이야!”

“죄는 무슨? 너 여잔데 거기에 할머니들밖에 없는걸 덮치기라도 하려고?”

“시, 싫어! 안 가!”

원래도 목욕탕은 잘 안 갔다.

여탕에 갈 생각은 정말 추호도 없다. 거기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에로티시즘이 아닐 게 뻔하다. 그냥 적나라한 육체가 돌아다니는 것 밖에 없다. 에로틱은 나체에서 나오는게 아니다. 나체는 오히려 동물적이다. 보면 오히려 아무 느낌도 나지 않는다. 에로틱은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다. 정말 야한 걸 원한다면 그냥 야동을 보면 된다. 그쪽 방면의 대가들이 지금도 열심히 찍어내고 있지 않은가.

욕탕에 에로틱한 상황 따위 있을리가 없잖아. 거기서 야한 포즈를 잡고 있는 여자는 없다. 그냥 물바가지로 물을 끼얹고, 샤워를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건 그냥 생활의 풍경이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물론 궁금하기는 했다. 금남의 구역이니까. 하지만 여자가 됐으니까 신나서 여탕에 갈 생각은 없다. 차라리 그런 건 환상으로 놔두는게 좋아. 가봐야 축 처지고 늘어진 할머니와 아줌마들의 체념된 육신을 보게 될 뿐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꼭 가본 것 같지만 안 가봤다. 앞으로도 안 간다.

엄마가 나갔고 나는 카톡을 했다. 이선준에게 답장, 박헌영에게 답장, 한정운에게는 답장이 안 왔다.

서준영 [대전 안 오냐?]

카톡이 왔다. 고향 친구다. 이 녀석도 나에게 소중한 친구다. 이미 대전이라고 말하자 왜 일찍 말하지 않았냐며 대뜸 욕이 날아온다. 이 녀석은 대전에서 통학한다. 그래서 대전에 오면 항상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어제 막 내려왔다고 말했다.

서준영 [나 금공이라 노는데 한잔해야지.]

설명해야 할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하지만 이선준이나 박헌영처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친구다. 물론 그들과는 조금 다르다. 확실히 다르다.

서준영 [감주가자, 하나 꽂아줄게.]

이 녀석은 여성편력이 좀 있다. 아니 조금 심하다. 수많은 여자를 갈아치웠고, 원나잇도 아무렇지 않게 한다. 내가 헌팅류의 행동을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꾸준하게 말해온다. 자기 능력을 내게 과시하고 싶은건지, 좋은 건 같이 하자는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다.

남자로서는 최악이다. 하지만 친구로는 최고다. 내가 여자친구랑 헤어졌을 때, 헤어졌다는 카톡 한 마디에 다 팽개치고 대전에서 태원까지 그 날 바로 온 녀석이다. 수업이고 뭐고 전부 때려치웠다. 그 마음만은 진짜다. 그러니까 믿을 수 있다.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니까. 나는 답장을 보낸다.

[야, 전화 할 수 있냐.]

일단 전화로 먼저 말해야겠다.

그 날 저녁, 나는 은행동에 나왔다. 은행동에서 만날지 궁동에서 만날지 고민하다가 궁동에서 만나기로 합의를 봤다.

대학생들 상대로 영업하는 곳들은 대체로 맛이라던지, 서비스라던지 형편없다. 배짱장사 하는 것들 전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원룸비 담합 같은 행위가 특히 나를 열받게 한다. 그래도 궁동으로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야! 여기!”

나는 멀리서 서준영을 확인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녀석은 나를 찾지 못하고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정말 많다. 한참 손을 들고 있다가 짜증나서 결국 전화를 했다.

[야, 어디야?]

“왼쪽 봐, 왼쪽!”

[왼쪽?]

녀석이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친다. 나는 인파가 싫다. 거기 비집고 들어 갈 자신이 없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너야?]

“그럼 누구겠냐?”

나는 가운뎃손가락을 올려보인다. 녀석은 전화를 끊더니 내게 다가왔다.

“뭐야, 뭐야 이게?”

“뭐긴 뭐겠냐.”

녀석은 주먹을 내민다. 나도 그 주먹을 이제 작아진 내 주먹으로 맞부딪힌다. 으, 예전에는 꽤 세게 했던 것 같은데 좀 아프다.

녀석은 당황과 놀라움이 뒤섞인 듯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 나는 왠지 진짜로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는 이선준보다, 박헌영보다 중요한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정말 힘들고 괴로웠던 중,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녀석이라 더욱 그렇다.

“일단 어디 들어가자. 사람 너무 많아.”

시끄럽고 오다니는 인파 속에 휩쓸릴 것 같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술집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감성주점이니 뭐니 했지만 내가 이 꼴이니 들어가면 그냥 커플 취급이나 받을 것이다. 목요일인데도 사람이 엄청 많았다. 아, 도시 싫다. 사람 없고 한적한 곳으로 가고 싶다. 이 녀석과 나는 취향이 정 반대다. 얘는 사람 많은, 특히 여자 많은 곳을 좋아한다.

“야, 너 근데 어쩌다 그렇게….”

“말 했잖아. 술 먹고 일어나니까 이렇게 됐다고….”

“허….”

그 녀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녀석은 의심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이미 전화로 그런 과정은 모두 끝마쳤기 때문이었다.

“됐고 술이나 먹자.”

궁동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내 지금 외모는 완전히 중고등학생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동시에 완전 성인 여자같지도 않다. 대학가는 신분증 검사를 잘 안 한다. 내 예전 신분증을 내밀어봐야 얼굴이 다르니 믿지 않을게 뻔하다. 뭐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진단서를 가져오기는 했다.

신분증 검사는 안 했고 무사히 주문을 마쳤다. 술이 먼저 나왔다.

“이게 무슨…. 와 진짜…. 너 괜찮아?”

“괜찮을리가 있냐.”

“어떻게 하려고?”

“뭘 어떻게 해. 그냥 살아야지….”

녀석과 나는 소주를 한 잔씩 마셨다. 녀석은 학생 때는 몰랐는데, 대학교 가서 연애 한 번 해보겠다고 이것저것 꾸미고, 옷도 사고 하더니 갑자기 인생이 변했다. 몰랐는데 여자를 참 잘 후리는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군대에 다녀온 뒤로도 똑같다.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 정도 사귀어가며 지낸다. 사귀는 동안에도 원나잇을 한다.

“여자친구는?”

“여자친구? 누구?”

여자친구는 어떻냐는 말에 누구라고 대답하는걸 보면, 이 자식 인생도 적잖게 글러먹었다. 나는 저번에 들었던 이 녀석의 여자친구를 말했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났다.

“저번에 걔 있잖아.”

“수정이? 야, 걔가 언제적인데….”

“세 달 정도밖에 안 지난 것 같은데.”

“그 사이에 두 명 더 있고, 지금은 솔로다.”

대단하신 능력이다. 그게 부럽지는 않다. 나도 평범한 남자였다. 과거형으로 말하게 되니까 씁슬하네, 나도 예쁜 여자를 보면 설레고 그런 여자와 사귀는 걸 망상한다. 그 여자와 섹스하고 싶다는 상상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걸 실행에 옮기려고 시도를 하지는 않는다.

문란한 성관계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런 삶의 방식도 있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항상 친구든, 이성이든 그 관계에 있는 순수성을 추구한다. 아주 순수한 우정, 아주 순수한 사랑을 원하는 건 아니다.

우정은 이 사람을 진정한 친구라고 느끼고 싶고, 유대감을 증명하려 한다. 나는 아무나 친구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우정이 친구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할 수 있고, 불구덩이라도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서준영 같은 녀석은 그런 불타는 우정을 논하지만 난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는다. 그냥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서로를 존중하는 느낌을 받으면 된다.

순수한 사람에 대한 의견은 별 거 없다. 나는 섹스를 하기 전에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섹스하지 않는다. 그게 나의 생각이다. 감정 없는 성관계는 휘발유 같은거다. 가만히 놔두면 증발하고, 불을 붙이면 거칠게 타오른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나는 친구의 입장에서, 항상 서준영의 여자 관계를 비난해왔다. 타인이라면 그냥 ‘응 그렇게 살아.’ 라며 그냥 지나쳤을 거다. 하지만 친구니까 가만히 내버려두질 못한다.

“너 그따위로 좀 살지 말라니까….”

“또 시작이네. 만나자마자 지랄하는거 보면 설원이야 역시. 좀 긴가민가 했는데.”

“우리 이제 스물넷이야. 학교는 이제 곧 졸업도 해야 하는데, 언제까지 여자나 훑으면서 살거야?”

“얼씨구, 그러는 너는 인생 참 대단하게 살아서 학점이 그 모양이냐?”

우리는 술을 마셨다. 누구와 이야기하든 끝이 없다. 끝이 없는 이야기를 붙잡고 가다 보면 필름이 끊긴다. 안주가 나왔고, 우리는 술을 계속 마셨다.

“내가 말하는 건 학점이나, 취직에 신경쓰라는 얘기가 아니잖아.”

“몰라 나는 그딴 거.”

“나는 삶을 대하는 태도를 얘기하는거야. 너는 여자를 대하는 태도가 아주, 매우, 명확하게 개 쓰레기같잖아.”

내 거친 비난에도 녀석의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얘기, 지금껏 너무 많이 해왔다. 나는 열심히 살지는 않았지만 진지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이 녀석은 대학에 들어간 이후 뭔가 항상 들뜬 느낌이다. 마치 ‘인생은 즐거워!’ 라고 온 사방에 광고하고 다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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