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5 가족 =========================
오랜만은 아니지만 집에 왔으니 느긋하게 있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부스스한 채로 일어났다. 역시 집이 좋다. 약간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창밖에는 햇살이 눈부셨다. 내 방은 아침이 되면 햇빛 때문에 자다가도 저절로 눈이 떠진다. 건강한 생활습관을 만들기 좋은 방이다.
핸드폰을 확인한다. 카톡이 몇 개 와있다. 이선준에게, 박헌영에게, 그리고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았는지 한정운에게도 연락이 와 있다.
이선준 - [얘기는 잘 했냐?] 08:43
박헌영 – [야 TS발병자들 제대로 알아봤는데, 가끔씩 아픈 사람도 있대. 너도 조심해라.] 02:34
한정운 – [선배, 그래도 생각 잘 해봐요. 학과장님한테 말씀드린 것 같아서 일단 TS바이러스에 관련된 부분은 빼고 전달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쓸데없이 간섭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진짜로, 진짜로 잘 생각해 보세요.] 09:46
박헌영이나 이선준에게 연락이 오는 건 흔한 일이지만, 한정운에게까지 연락이 오는건 신기하다. 이 자식, 생각보다 나쁜 놈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이 한 번 불행을 지켜본 사람과 같은 결과를 마주하기 싫은 것뿐이겠지. 나는 부스스한 채로 답장을 보낸다.
이선준에게 [잘 했음.]
박헌영에게 [ㅇㅇ]
한정운에게 [신경 써주는 건 고맙다. 잘 생각해볼게.]
한정운을 오해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녀석은 그냥 냉정할 뿐이다. 해야 할 말을 하고,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다. 약간 핀트가 어긋난 놈처럼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타인에게 별 관심이 없는 녀석이 나에게 카톡까지 보낼 정도라면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다른 의도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사람은 의외로 쉽게 미워지지만 그 미움을 푸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한정운에 대한 감정을 푸는 것도 사실 시간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그 녀석이 했던 이런저런 말들이 아직 가슴에 남아있다. 사람이 죽었다는 걸 말할 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느껴졌던 녀석의 눈이 아직도 무섭게 뇌리에 박혀있다.
아버지는 카센터로 갔고, 나와 설훈, 엄마가 같이 밥을 먹는다. 설훈은 오늘 오후 강의인 모양이다.
“너 학점은 제대로…. 아니다.”
내가 누구에게 학점을 논한단 말인가. 나부터 잘 해야지. 설훈은 롤창인생인 주제에 학점은 그냥저냥 잘 따고 있는 모양이다. 나나 잘 하자.
밥을 먹는데 엄마는 자꾸만 나를 쳐다보고, 설훈도 나를 계속 쳐다본다. 내면이야 당연히 이 가족이었던 설원이지만 겉모습은 아니다. 그냥 보면 낯선 여자애가 갑자기 나타나서 밥을 먹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만 좀 봐, 얹히겠어.”
내가 말하자 엄마도, 설훈도 밥을 먹는다.
“야, 너네 아빠가 어제 뭐라고 했는지 아니?”
“응? 뭘?”
엄마는 뭐가 재미있는지 피식피식 웃었다. 아빠랑 엄마는 부부다. 그러니까 자식들 앞에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을 서로에게는 보여준다. 물론 아빠는 엄마가 이렇게 둘만 있었을 때 한 얘기를 자식들에게 하는 것을 모른다.
“글쎄…. 그 양반이 어휴…. 딸래미 갖고 싶었다는 얘기를 하지 뭐냐.”
“푸웁!”
“에?”
설훈이 먹던 밥을 토해냈고, 나는 숟가락을 놓쳤다.
“글쎄 어쩜 그렇게 귀엽고 예쁜 애가 있어서 설원이 나를 닮아서 보는 눈은 있다고 생각했다나봐. 그런데 막상 너라니까 그것도 별로 싫지는 않은 것 같더라.”
“아…. 그래?”
“우리집이 여자가 나뿐이라서 더 삭막하잖아. 그러니까 너도 이제 아빠한테 애교도 좀 부리고 그래라, 혹시 아니? 아빠가 귀여워서 용돈이라도 줄지.”
“…무리한 걸 요구하지 마.”
엄마는 진짜 나사가 어디 빠진 것 같다. 어이가 없어서 웃게 된다. 애교라니 그런 게 가능할리가 없잖아. 그런 게 되는 놈이라면 애초에 남자일 때도 할 수 있을 거다.
스물 네 살에 용돈 받고 싶어서 애교 부리는 딸이라니, 내가 진짜 여자라 해도 뭔가 이상하지 않나?
나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밥을 먹고 내 그릇을 싱크대에 넣는다. 설훈은 나를 뚱한 표정으로 보더니 물었다.
“그런데 나 누나라고 해야 돼 이제?”
“…….”
사실 이제 형은 아니다. 형이라고 부르게 할 수도 없고, 누나라고 부르게 하는 것도 뭔가 낯간지럽다.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선택지를 고를 수가 없다.
칭호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나는 실제로 이선준을 원래는 형이라고 스스럼 없이 불러왔다. 하지만 이렇게 변하게 된 뒤에는 왠지 의식적으로 안 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원래는 안 그랬으면서 이선준이라고 이름을 부르거나, 일부러 주어를 삭제하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한정운은 유리한 위치에 있다. 누나나 형이라고 부르지 않고 선배라고 부르고 있다. 여자나 남자나 선배는 선배니까. 진짜 어떻게 하지.
내 입에서 오빠라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 이선준에게 오빠라고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자 뭔가 속이 메슥거렸다. 하지만 여자 주제에 남자를 형이라고 불러대면 사람들이 다 쳐다볼게 분명하다. 일부러 주목받는 짓거리를 하고 싶지는 않다.
설훈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너 마음대로 해….”
듣는 건 어차피 대충 듣고 흘리면 되니까 상관없겠지.
“누나.”
“….”
취소, 기분 나쁘다. 그래도 하지 말라고 하기는 또 그렇다. 어쨌든 이 모습으로 살기로 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나는 누나라는 말을 듣고 살아야 한다. 그래, 익숙해질거다. 언젠가는 내 입으로 누군가를 오빠라고 부르는 날도 오겠지.
언젠가, 그 언젠가라는 말이 너무 막연하고 두렵다. 이대로 가면 언젠가는 누나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고, 여자 취급이 아무렇지도 않고, 오빠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그리고 남자를 이성으로 대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내 몸의 호르몬이 제대로 기능한다면 나는 정신과는 달리 남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게 될 것이다. 정신적인 문제도…. 언젠가 변화할거다. 이 몸으로 여자를 사랑할 수는 없다.
사실 그래, 나는 여자를 보면서 성욕이 안 느껴진다. 이 몸으로 변한 이후로 그렇다. 내 몸이 야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성욕이 마구 끓어오르고 그런 느낌은 없다. 호기심은 들지만 그게 전부다.
내 정신은 이미 육체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고 보니 박헌영이 항상 말했던 게 있다. TS되면 여탕에 갈 수 있으니 개이득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했다.
“원아, 엄마랑 목욕탕 갈래?”
“뭐, 뭐어어어어어!”
엄마가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하자 나는 감전된 고양이처럼 펄쩍 뛰었다.
“무무무무 무슨소리야!”
아버지랑 가는 건 상상했어도 엄마가 목욕탕에 가자고 하다니, 상상도 못 했던 말이었다. 이 아줌마가 정말 미친건가? 아들이었던 자식에게 같이 목욕탕을 가자고 말하다니, 진짜 믿을 수가 없다. 설훈도 뭔가 께름칙한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본다.
“아, 근데 부럽다….”
“닥치고 꺼져.”
내가 눈을 부라리자 설훈은 흠칫하더니 이층으로 올라갔다. 엄마는 왜 동생을 나무라나며 웃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뭐야, 엄마 이상해.
“너 이제 여자니까 이것저것 알아야 할 거 아냐. 여자는 씻는것도 대충 씻으면 안돼. 너 어떻게 씻는데?”
“어? 어?”
나사 빠진 줄 알았던 엄마가 갑자기 진지하게 말해오자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냥 머리 감고…. 린스하고…. 몸 닦고…. 그거지 뭐.”
“피부관리는? 화장품은?”
엄마는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아줌마다. 그런데도 엄마 입에서 관리라는 말이 나오다니 뭔가 이상하다. 엄마 같은 사람도 당연하다는 듯 관리를 하는구나, 그건 정말 의외였다.
“너 질세정제 없지.”
“뭐? 지, 질? 뭐야 그게?”
“이런 멍청이. 안 되겠다 빨리 옷 챙겨, 목욕탕 가게.”
“시, 싫어! 싫다구! 싫다구우!”
나는 소리를 빽빽 질렀다. 엄마는 단호했지만 내가 진짜 울려고 하자 그제야 놓아줬다. 여자는 몸을 깨끗이 해야 하고, 남자보다 더 그게 잘 되야 한다고 했다. 특히 그 부분이 청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더러우면 병도 생기기 쉬워, 질염 같은거 한 번 걸리면 오래 가니까 말이야. 병원에서 산부인과 의사가 니 거기에 이상한 거 넣는거 싫으면 잘 씻어줘야 돼. 알았지?”
여자는 소중한 그곳을 씻을 때 비누나 바디워시가 아니라 질세정제라는 것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 알았다. 여자들은 복잡하구나….
비누칠을 너무 해도 안좋고, 그냥 씻을 것이며 질세정제도 너무 많이 사용하면 안된다는 둥 주의사항을 듣고 나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여자들은 이런 걸 전부 기억하고 사는구나, 귀찮고 힘들다.
“피임약은….”
“그, 그런 게 내가 왜 필요해!”
심지어 엄마는 여성용 피임법까지 설명했다. 나는 질겁했다. 꼭 언젠가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잘 들어 인석아 사람 일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건데 너처럼 몸 막 굴리고 다니는 애가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어떻게 알아? 알아서 나쁠 거 있어?”
“마, 막 굴리다니! 무, 무슨 소리야!”
다른 의미로 말한 거지만 소름이 쭉 돋았다. 하지만 엄마 말은 맞다. 알아둬서 나쁠 건 없다. 중고등학생이 콘돔을 사용 안 하고 자꾸 싸지르다가 임신하고 화장실 변기에 애를 버리는 것처럼, 알아둬야 하는 건 분명했다.
정말 많다. 먹는 피임약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먹어야 한다는 것, 사후피임약은 몸에 안 좋다는 것, 여성형 콘돔, 루프, 이런 것들을 들으니 머리가 팽팽 돌았다. 그냥 남자가 콘돔 쓰면 되잖아! 이게 다 남자가 안 낀 채로 하고 싶어하는 못된 욕망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