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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24화 (24/224)

00024 가족 =========================

“그러니까 그 티에스인지 하는 뭐…. 그거라고?”

“응, TS바이러스.”

나는 제대로 설명했다. 아버지는 그제야 제대로 이해한 것 같았다. 그리고 방금 전에 일어났던 해프닝을 생각하는 건지 머리를 긁적였다.

“허, 거 참. 세상에 망조가 들었네….”

“….”

“그게 뭐…. 아예 여자가 된다는거냐? 고치는 건 못하고? 서울 큰 병원 가봤어?”

“없대.”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럼…. 여자로 살아야 된다는거냐?”

“…응. 뭐… 그렇지.”

“허….”

아버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TS바이러스가 시끄럽게 떠들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것에 관심 가지지 않아도 세상은 별 문제없이 돌아간다. 발병자 자체도 몇 없으니 이건 그냥 단순한 이슈에 불과하다.

“그럼 그 뭐냐…. 거시기 그거….”

아버지는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말끝을 흐렸다. 뭘 물어보는건지 다 안다.

“생리도 하고, 임신도 한대. 남자가 된 경우에도 똑같고.”

“뭐, 뭐 그런 게…. 어이구….”

내가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자 아버지는 대단히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한동안 장판을 쳐다보다가 내게 말했다.

“너는 괜찮냐?”

“괜찮도록 노력하려고.”

가족들한테 그늘을 보여주는건 싫다. 일부러 걱정시켜봐야 내 기분만 착잡해진다. 그런 것 치고는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말이라도 깔끔하게 해야지.

부모님은 나를 많이 걱정한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자살시도를 했었다. 두 번이라고 못하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이다. 장래가 불투명한 문창과 진학을 약간의 우려 정도만 표현하고 그러라고 한 것도 그 맥락에서 허락한 것이었다.

“괜찮아. 나쁜 생각 안 해. 진짜로.”

나는 학자금 대출 건이 해결된 것을 말했다. 발병자 보호 프로그램을 저버린 것은 말하지 않았다. 괜히 그런 말을 해봐야 마음만 심란해진다. 아버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자식의 빚은 부모에게도 빚이다.

역시나 돈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내가 여자가 된 건 불행이지만, 다른 고통이 덜어졌다고 하니 솔직히 불안감에서는 벗어났을 것이다. 정말 하기 싫은 생각이지만, 엄마랑 아버지는 내가 여자가 된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남자인 나는 집안에 도움이 되는 게 없었는데, 지금은 그나마 학자금 대출이라도 해결됐다. 다른거 다 빼고 금전적으로만 보면 솔직히 나쁠게 없다.

그래도 돈이 중요하지만 돈만으로 살 수는 없다.

아버지는 냉장고에서 소주를 한 병 꺼내 들이켰다. 안주도 없이 마신다. 아버지는 항상 말했다. ‘깡소주는 진짜 등신들이나 하는거다.’ 라고. 그런 아버지가 깡소주를 한다.

“후우….”

아버지는 한숨을 쉬었다. 설훈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이층으로 올라간다. 그래, 너 있어봐야 도움도 안 돼. 아버지는 세 번에 나눠서 소주를 한 병 다 마셨다.

아버지는 위로라는걸 못 하는 사람이다. 항상 두꺼운 철벽 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자살시도를 해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입을 다물고 나를 묵묵히 쳐다봤다. 그리고 내 이마를 한 번 쓸어줬다. 내가 살면서 아버지에게 받았던 유일한 위로였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너무 미안하고 죄송해서 침대에 누운 채 죄송하다며 마구 울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딱히 예전에도 울보가 아니었던 것 같지는 않네.

엄마도 표정이 점점 굳는다. 내가 무슨 상황에 빠진건지 애써 잊으려고 억지로 밝은척 했던거다. 나를 놀리기도 하면서.

자살시도를 한 번 했던 자식이 이번에는 이상한 병에 걸려서 여자가 되었다. 자식이 느낄 스트레스와 고민을 공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힘들고 어려울 거라는 사실은 당연히 짐작할거다.

엄마나 아버지는 내가 혹시나 또 자살을 시도할까봐 걱정할거다.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아버지는 소주 한 병을 더 비우고 다시 한 병을 가져왔다. 너무 많이 드시는데.

“처, 천천히 마셔….”

내 말에 아버지는 나를 흘끗 쳐다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나에게 화난 건 아니지만 기분이 좋을리가 없다.

“따라 나와라.”

“어? 아, 응….”

아버지는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비틀거리는 폼이 그새 취기가 올라온 모양이었다. 분명히 친구들이랑도 적게 마신 건 아닐 거다. 그런데 와서 깡소주 한 병을 들이켰으니 제대로일리가 없다. 아버지는 집 앞의 마당에서 담배를 꺼내 피웠다. 원래는 집 안에서 피웠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점점 엄마의 힘이 강해지면서 아빠는 이제 담배를 밖에서 피운다. 왠지 슬프지만, 부부관계라는건 점점 나이가 들수록 무게추가 여자 쪽으로 기울어지는거다.

겨울의 밤이다. 아버지의 숨이 하얗다. 내 숨도 옅은 회색빛이다. 아버지는 속에 든 고민을 쏟아내듯 담배연기를 뿜어낸다. 아버지는 과묵하다. 나는 그 과묵함이 항상 불안하다.

“학교는 계속 다닐거냐?”

“어? 아, 응….”

“힘들거다.”

“알아….”

아버지는 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보며 담배를 피웠다. 두 대 째 피울 때쯤, 아버지가 날 불렀다.

“이리로 와라.”

나는 아버지 곁에 섰다. 아버지도 당연히 키가 크다. 솥뚜껑만한 손이 내 어깨에 올라왔다. 딱딱하고 거칠다. 이 손으로 아버지는 스패너와 공구를 만지고, 타이어를 빼고, 미션오일과 엔진오일을 교환한다. 아버지의 손은 자동차 부품을 교환한다. 경차에서 중형차, 대형차, 화물차까지. 아버지의 손은 두텁고 크다. 아버지는 양손으로 우리 가족을 여기까지 끌고왔다.

내가 아버지의 손을 처음 잡았던 날은 언제였을까. 내가 입양된 것은 아마 두 살인가 세 살 무렵이다. 아버지는 그때도 이 큰 손으로 나를 잡고 데려왔을 것이다.

아버지는 두 번째 담배가 절반쯤 타들어갈 때 말했다.

“너는 내 자식이다.”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연한 말이기도 하고, 당연하지 않은 말이기도 하다.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라.”

“응.”

“너 하나 먹여살리는 거 어렵지 않아. 코딱지만해졌으니까 먹는 것도 덜 먹겠지.”

아버지는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와도 괜찮다 말하고 있다. 다 큰 아들을, 아니, 자식을 떠안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다. 전부 포기해서 집안에서 처박힌 채 식충이로 살아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까 많이 울었던 탓에 눈물은 더 안 나온다.

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다가 담배를 다 태운 뒤 재떨이에 올려놓았다. 아버지는 말없이 집으로 돌아가며 한 마디 한다.

“요즘은 딸이 더 좋다는 얘기가 많다. 티비에서도 그러더라.”

그게 아빠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부드러운 위로였다. 그 말을 듣자 나는 왠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꼬아서 들으면 나보고 여자가 되라느니 하는 소리로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아버지는 여자가 된 나를 긍정해준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고맙다.

“티비에서 그러는건 애기들 보고 하는 말이잖아 아부지.”

“너랑 애랑 다를게 뭐냐, 다 커서 질질 울기나 하면서.”

“아니 그건 아부지가….”

나는 투덜거리며 아버지의 뒤를 따라간다. 다행이다. 가족들에게는 큰 문제 없이 받아들여진 것 같다. 가족이라서 그렇다.

정말 다행이야. 말하기를 잘 했어. 왠지 자신감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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