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3 가족 =========================
두 판을 더 했다. 전부 이겼다.
“야, 어, 어떻게 그렇게 해?”
“리신이 원래 하려고 하면 뭐든지 되는 챔프지.”
롤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생략, 굳이 설명하자면 5:2 상황에서 궁 한 방으로 상황을 전부 정리했다. 죄다 쓸어담았다. 어떻게 이게 돼? 나는 모르겠다. 정말 달라, 천상계란 이런건가?
나는 갑자기 높아진 MMR에 적응하지 못하고 똥오줌을 질질 지렸지만 동생 녀석이 전부 해결했다. 꼭 나까지 엄청 잘하게 되는 기분이었다.
“야, 진지하게 너 이 길로 가보지 그래?”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데, 이렇게까지 잘 하면 진짜 프로게이머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나도 마스터나 챌린저 만나면 발려, 뭐 가끔 이길때도 있지만.”
“너를 이긴다고?”
그런 놈들은 대체 또 뭐 하는 놈들이지? 정말로 누구 말마따나 전자두뇌라도 되는건가?
“얘들아! 아빠 왔다!”
엄마의 외침이 들렸다. 그래 아버지가 남았다. 아빠한테까지 말하면 가족들에게는 전부 말하는 거였다. 나는 컴퓨터를 끄고 말했다.
“내려가자.”
“어? 나도?”
“그럼 너도 가야지 나만 가냐?”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견습 정비사로 시작해서 카센터 하나를 가질 때까지 우직하게 일한 사람이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 집념이라는 것이 사람의 얼굴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는 의지의 사나이였다. 의리가 두텁고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다. 용감했고 추진력이 있었다.
아버지는 먼 사람이다.
엄마와는 조금 달랐다. 항상 무뚝뚝했다.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나를 싫어한다고, 못마땅해한다고 항상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계단을 내려가기가 두렵다. 화가 난 이선준을 볼 때와 같은 공포감이 든다. 아버지는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이해할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잘못한 게 없는데 혼날 것 같아서 무섭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 그날 술을 좀 많이 마셨을 뿐이야. 아버지가 역정을 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설훈이 나를 쳐다본다. 나는 바보처럼 설훈을 올려다봤다. 나는 계단참에 주저앉은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설훈은 눈치없이 내게 왜 안 내려가냐고 얘기하지는 않았다.
“야…. 나 무서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것도 아주 작게 말했다.
“아빠잖아.”
“…….”
설훈은 단지 그렇게 말했다. 다른 어떤 말도 없었다. 그 한 단어가. 그 짧은 말이 위로가 되었다. 녀석과 나 사이에 있던 벽이 한 꺼풀 벗겨진 느낌이 들었다. 그래, 여기서 주저앉으면 어쩌자는거냐.
나는 일어났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선이 굵고 각진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짧게 깎은 머리, 주름마저 강인하게 새겨져 있는 얼굴이다. 구릿빛 피부, 바깥일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은 항상 저런 빛깔이었다. 손톱 사이에 항상 기름때가 껴서 아버지는 항상 손톱을 바짝 깎는다. 그래도 손의 빛깔은 다른 곳보다 거무튀튀했다.
아버지는 나를 흘끗 보더니 시선을 돌렸다. 나는 아버지 앞에 앉았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무릎 꿇고 앉았다. 부모 앞에서 자식은 항상 죄인이니까. 그런 말로 최면을 걸어봐도, 이 상황 부담스럽다.
아버지는 음주를 하고 돌아왔다. 얼굴빛이 평소보다 붉고, 술 냄새가 났다. 엄마는 살짝 떨어져 앉았고, 설훈은 내 옆에 앉았다.
아버지는 말이 없다. 흘끗거리며 내 얼굴을 보는 것 같기는 하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다. 화 난 것 같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줘야 내가 입을 열 텐데, 묵묵부답이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건가? 그래,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기껏 키워놓은 아들이, 그것도 장남이 계집애가 되어서 돌아왔다.
가부장적인 사람이다. 항상 ‘우리 집안은 네 손에 달렸다’ 라고 말하는 아버지였다. 내가 문창과에 가고 나서는 그런 말이 없었지만, 장남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그런 장남이 자그마한 여자애가 되었으니 속에서 천불이 일겠지. 얼마나 처신을 똑바로 못 했으면 계집애가 되냐고 소리질러도 할 말 없다.
엄마 말이 맞아. 나는 진짜로 내가 처신을 잘못 해서 이렇게 된거다. 그 날 술만 먹지 않았어도, 아니. 내가 소설을 조금만 더 잘 써서 그 날 호평을 받았더라면 다른 술집에서 좋은 거 먹었을 수도 있다. 기분좋게 집에 가서 잤을수도 있다. 꿀꿀한 기분에 내 주제에 무슨 고급 안주냐며 팔천원짜리 오뎅탕에 소주를 너무 많이 깠던 게 문제다.
싫다 정말, 소설을 더 잘 썼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 생각하니 정말 자괴감이 든다.
아버지는 계속 말이 없다. 너무하는 것 같다. 그래도 내 잘못은 아닌데, 정말 내 잘못은 아닌데, 불가항력이잖아. 내가 거기서 뭘 어떻게 할 수 있어.
정신착란을 일으킬 것 같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뇌와 아니라고 말하는 뇌가 한바탕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고, 설훈도 가시방석인지 자꾸 움찔거렸다. 엄마는 무슨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보고있다. 엄마 너무해….
아버지의 굳게 다물고 있는 입은 도무지 열릴 생각을 않는다. 입꼬리가 점점 내려앉는다. 화나고 있다는 표시다. 대체 왜, 너무해, 나도 원한 게 아니야. 이렇게 살 수밖에 없어 이제, 이해해 줄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던 것 같다.
이를 으스러질 정도로 꾹 깨물었다. 고개가 더욱 숙여진다. 긴 머리칼이 어깨 앞쪽으로 흘러내렸다. 내 표정이 안 보이겠지. 아, 울기 싫다. 진짜로 울기 싫다. 하지만 너무 서럽다. 왜 날 이해해주지 않는거야?
눈물이 떨어졌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주먹을 쥔 손등에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울음은 한 번 터뜨리면 너무 쉽게 나온다. 계속 눈물이 난다.
아버지는 우는 걸 싫어한다. 정말로 싫어한다. 남자든 여자든, 울지 말고 할 얘기는 하고 살아야 한다고 항상 말해왔다. 우는 건 비겁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그랬다. 그래서 울면 더 크게 혼났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진짜, 진짜 서럽고 슬프다. 이렇게까지 화내지 않아도 되는거잖아. 뭐가 그렇게 화가 나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버지가 벌떡 일어났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설마 맞는건가. 진짜로 맞는건가. 아버지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날 보더니 갑자기 어딘가로 갔다.
-쿵! 쿵! 쿵! 쿵!
아버지가 이층으로 올라간다. 내가 보기도 싫다는 뜻인 것 같다.
내 안의 뭔가가 망가진 기분이 들었다.
“으윽…. 윽….”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나는 내 입을 막고 울음을 억누르려 한다. 잘 안 된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든다. 안방으로 들어가면 될 걸 굳이 왜 이층으로 올라가는거지? 이층으로 올라간 아버지가 소리를 지른다. 온 집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소리다.
“설원 너 이 자식! 너 어디 있어!”
“….?”
“어?”
“어머?”
-덜컥! 쾅!
문을 열었다 닫는 소리가 들렸다. 또다시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계단을 내려온다.
“제 여자친구만 내버려두고 어딜 갔어 이 자식은! 애가 울잖아!”
“아, 아….”
나는 우는 것도 잊고 아버지를 멍하니 쳐다봤다. 뭐야, 뭐야 이거.
전혀 잘못 짚었다.
“아, 아버지이…. 나야…. 흐끅!”
울음을 참고 있었던 탓에 입을 열자 딸꾹질과 함께 눈물이 터져나왔다.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말했다.
“나야, 내가 원이라고오… 흐흐흐흐! 흐흑!”
“큭큭큭큭큭큭!”
“호호호호! 당신 뭐야, 내 말 제대로 못 들었어요?”
이건 우는게 아니다. 웃는거다. 진짜 웃긴데, 엄청 웃긴데 눈물은 계속 나온다.
“뭐, 뭐라고? 무슨 소리야? 원이 이 자식 어딧냐고! 우, 울지 마라. 원이 데려올 테니까 응? 아, 아버지? 너 설마 원이 그 녀석이? 이런 빌어처먹을 새끼가! 아이고 아가야 울지 마라 응?”
아버지가 내가 울면서 웃는 기이한 행동을 하자 미쳤다고 생각했는지 절절 매며 나를 달래려 했다. 대뜸 여자애가 아버지라고 해대니 뭔가 책임져야 할 행동이라도 저지른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뭐야, 아빠도 그렇게나 대단하게 말하더니 여자의 눈물에는 약한건가.
“아, 내, 내가… 흐흐흑! 흐끅! 내가 원이야…. 아부지…. 히힉!”
눈물은 계속 나는데 웃음도 같이 나온다. 진짜 미친 것 같은 기분이다. 엄마도, 훈이 녀석도 못 견디겠는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아버지가 술이 과한건지 엄마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웃기는 일이었다.
“히히히힉! 흐윽! 흐, 흐어엉….”
긴장이 풀리자 울음이 다시 터진다.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고, 진짜 이게 뭐야. 정신과 진짜로 가봐야 할 것 같다. 아버지는 아직도 이 상황이 뭔지 제대로 이해를 못 하고 막 나를 찾아 온 집안을 뒤졌다.
“나야 나, 내가 원이야…. 나 여자 됐어… 여자 됐단 말이야아…..”
“뭐, 뭐라고?”
“여보, 얘가 원이에요.”
“어, 형이야 아부지.”
“어? 어? 뭐,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거야? 내가 술이…. 술이 좀 됐나? 내 눈에는 여자애…. 여자애로 보이는데….”
아버지는 눈을 비비며 나를 보고, 다시 비비고 나를 봤다. 본인이 술에 취해서 잘못 보고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화난게 아니었다. 그냥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 엄마가 카톡을 이상하게 보낸 탓이다.
============================ 작품 후기 ============================
그래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