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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223화 (223/224)

223회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설원은 어제 늦게까지 술을 마셨는지 일어나는 걸 힘들어했다. 몇 번을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았고, 어쩐 일인지 평소라면 소름돋는 말이라도 귓가에 속삭였을 박헌영은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 언니가 깨워줘. 나, 나는 아침.... 준비할게.”

“어? 아. 응.”

박헌영은 어쩐지 주저하는 것 같다가 도망치듯 방에서 나가버렸다.

설원을 깨우는 건 쉬웠다. 억지로 침대에서 굴러떨어지게 당겨버리자 죽을 것처럼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뒤질.... 것 같아.... 제발, 조금만 더....”

“얼마나 처먹은거야?”

“한 세 병.... 먹었나....”

“미친, 폭죽 사러 갈 거니까 빨랑 일어나!”

내가 잠들고 나서도 한참동안 마시다가 잠든 모양이다. 어떻게 용케 방에 기어들어와서 잔 모양이지. 설원은 빌빌거리다가 힘겹게 일어났고, 흐리멍덩한 눈으로 날 한 번 바라보더니 화장실로 향했다.

나도, 설원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서로를 대한다. 어제의 그 입맞춤은 솔직히 아무것도 아니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긴 했지만. 나는 태연하게 대했고 설원도 딱히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뭔갈 느끼긴 했지만 그건 즉물적으로 다가온 건 아니었고, 그게 무엇이었는지 나조차도 아직 규명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평범하게 대하는 게 힘들진 않았다.

하지만 설원 쪽에서도 그렇게 대한다는 건, 설원도 아무렇지 않았다거나 숨기겠단 걸 의미하겠지. 하지만 술에서 덜 깬 상태에서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은 기색은 설원의 태도가 전자에 가깝다는 걸 의미한다.

이거 조금 서운한데. 솔직히 나는 조금 묘했다는 걸 부정할 순 없는데.

박헌영이 아침으로 김치찌개를 만들었고, 다들 먹고 씻었다. 씻을 곳이 일층의 욕실뿐이라 순서를 정하고 나머지는 이층에서 기다렸다. 물론 나는 아무 상관 없었지만 설원이 위층으로 꺼지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해변가에선 편의점에서 폭죽을 판다. 택시를 불러 마트에 갈까 했지만 기왕 바닷가에 왔으니 산책이나 할 겸 시가지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잔 박헌영의 말에 나와 설원 모두 고갤 끄덕였다. 해변가를 세 명이 나란히 걷는다. 설원은 기지개를 쭉 켜며 하품을 했다.

“김치찌개 때문인가. 죽을 것 같았는데 속이 확 풀렸네.”

“아, 그, 다행이네....”

박헌영은 어쩐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약간 떠는 목소리로 말한다. 설원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은 눈치지만 나는 박헌영의 그런 변화를 느낀다.

설원을 가운데에 두고 걷고 있지만, 나와 설원의 거리보다 설원과 박헌영의 거리가 더 멀다. 박헌영은 의식적으로 설원과 조금 떨어져 걷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박헌영이 왜 저러는지 알 것 같다.

내 마음을 직설적으로 뱉어버린 뒤, 내가 변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박헌영도 어제 설원에게 자기 마음을 말했을거고, 말해버리는 순간 뭔가 바뀌어버렸을거다.

평소보다 더 설원을 의식하게 되어버린걸테지. 평소처럼 농담을 하며 들러붙기엔 어제 한 말이 너무 부끄러웠다거나, 아니면 자기 마음을 말로 내뱉어버린 순간 자기 마음이 어느 정도 크기인지 알아버려서 더 이상 설원에게 장난을 칠 수 없게 되었다거나.

뭐 그런.

말하지 않으면 없는 거지만 말하는 순간부터 존재하게 되어버리는 그런 것을 박헌영도 느끼는걸테다. 내 경우엔 설원을 가지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할거지만, 박헌영은 더 이상 전처럼 들러붙을 수 없게 된건가.

입장이 역전되었다.

우물쭈물하며 얼굴 붉히는 것 따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 건 순정만화에서나 통용되는거다. 일단 남자 주인공인 설원은 연애에 관심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연애를 혐오하기까지 하는 또라이니까. 대체 왜 예전과 달라졌냐며 다그쳐줄 위인이 아니다.

그러니, 멈춰있는 것으로는 저 자식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춥네....”

“...그러게 왜 그렇게 입고 나왔어?”

나는 지금 반팔 셔츠만 입고 있다. 박헌영과 설원이 가벼운 외투를 걸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썅년이 될 준비가 얼마든 되었다고 말했다. 확실히 춥다. 너무 이른 아침은 아니지만 아직은 추운 날씨다.

일부러 그랬다.

추운 걸 알아서, 일부러 외투를 입지 않았다. 설원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고, 나는 손을 내밀었다.

“추워.”

“...뭐, 옷이라도 벗어달라고? 나한테 뭘 기대하는거야?”

설원이 뜨악한 표정을 짓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 옷을 벗어달라니. 나는 설원의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내 주머니가 아니라 설원의 외투 주머니에.

“좀 낫네.”

“...왜 이래?”

“추우니까.”

손을 잡은 건 아니다. 그저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만큼 더 가까이에서 걸을 수밖에 없다. 박헌영이 흔들리는 눈으로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내가 이럴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 나는 박헌영을 쳐다보지 않는다. 설원은 나를 뿌리치지 못한다.

박헌영은 지금껏 장난스러움을 가장해 설원에게 접근했다. 그래서 그 장난스러운 접근을 설원은 얼마든 밀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이제껏 그러지 않았고, 어제 내가 얼마나 망가져버렸는지 설원에게 똑똑히 보여줬다. 태도부터가 다르다. 나는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진지하게 설원에게 장난을 친다. 진심의 장난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지금 내 행동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설원은 나를 밀어내지 못한다.

박헌영은 밀어도 밀어도 다시 다가오고 상처받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설원은 날 밀어내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내가 산산조각나버릴지도 모른다는 걸 알기에, 설원은 내 이런 행동을 밀어내지 못한다. 관계는 결국 일종의 인과다. 나는 지금껏 이러지 않았기 때문에 설원은 날 밀어낼 수 없다.

설원의 상냥함과 착함에 기댄다. 박헌영은 내가 이런 행동을 취해올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처럼 날 바라본다. 그렇다는 건,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몰랐다는 걸 의미한다.

순진하게, 정말로 잤구나 너. 설원은 나를 바라보며, 박헌영에겐 안 보이는 각도에서 입모양만으로 말한다.

‘제발, 이러지 말자.’

나는 설원을 보며 웃는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로, 입모양만으로 말한다.

‘싫어.’

그 말에 설원의 표정이 잠깐 일그러진다.

사실을 인정하자면,

많이 불안하다.

그냥 이대로 있어도 충분하긴 해. 분명히 그래. 네가 내 곁에 있기만 하는 것으로 내 불안감은 대부분 사라지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니까 이대로도 괜찮아. 굳이 더 깊은 관계가 되고픈 마음은 원랜 없었어. 하지만 나는 힘겹게 고개를 푹 숙인 채 걷는 박헌영을 본다.

그 모습은 애처롭다.

애처롭다 못해 서럽다. 나조차도 그런 박헌영을 보면 마음이 흔들린다.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맴돈다. 저 약해진 모습을 보니 끌어안아주고픈 생각이 든다.

설원은 자신의 연애방식에 대해서도 문제를 느끼고 있고, 나는 그게 뭔지 잘 알고 있다. 설원은 연애를 하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모든 걸 건다. 그 사람과 만나는 것에만, 그 사람에게만 모든 시간을 할애하려 한다.

만약 박헌영과 설원이 서로에게 끌려 만나게 된다면, 나는 내팽개쳐진다. 설원은 한 번에 두 가질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내 버팀목이 되어주면서 연애도 할 수 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이대로도 충분했던 것들은, 박헌영이 저 모습이 되며 달라졌다. 박헌영은 충분히 매력적이고 마음 또한 진심이다. 장난스러운 접근들이 쌓이고 쌓여, 설원이 박헌영에게 연애감정이 생길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저런 녀석에게 빠지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이젠 제 마음을 고백하고 수줍고 부끄러워하는 저 모습.

설원은 신경쓰지 않을지 몰라도, 나는 신경쓰인다. 저대로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거라 생각하지만, 사람 일은 모른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항상 감정을 환기시키게 되어있다. 설원은 신경쓰지 않을테지만 나는 그런 박헌영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그리고 내가 신경쓰듯 설원은 언젠가 저런 박헌영을 바라보게 될지도 모른다.

리스크는 짊어지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래서 나는 이 균형을 깨고 설원을 가지려 한다.

빼앗겼을 때 후회하느니, 빼앗고 후회하기 위해서. 헌영아, 네가 시작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어.

박헌영을 그 누구보다도 두려워하는 건 사실 설원이 아니라 나였다. 설원이 박헌영을 사랑하게 될까 두려워서, 나는 사랑하지도 않는 설원을 가지려 하고 있다. 둘이 만나게 된다면 그 사이에 내가 들어갈 자리는 생기지 않는단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설원을 내가 잘 알기에.

박헌영이 아니라 날 사랑해달라 말하고 있다. 차라리 내게 갈구해, 네가 원하는 거 뭐든지 들어줄 수 있고 뭐든지 해줄 수 있으니까. 박헌영은 네 사랑을 원하겠지만 나는 네 존재 그 자체만을 원하니까.

차라리 내 쪽이 더 다루기 쉽지 않아? 그냥 곁에 있는 거 하나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으니까.

생각을 이어나갈수록 궤변같은 말만을 늘어놓게 된다. 나를 합리화하려는 시도를 할수록 내가 미쳐버렸다는 자각만 하게 될 뿐이다.

그래도 명확한 건 하나다.

너는 내 거다.

비록 지금은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되도록 만들거다. 그래서 나는 설원에게 조금 더 다가간다.

“뭐, 어때.”

미쳐버리고 병든 수많은 말과 생각들을, 단 한 마디로 덮어버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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